강제동원 조병창에서 벌어진 '악몽'의 실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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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조병창에서 벌어진 '악몽'의 실체는
  • 송정로 기자
  • 승인 2019.08.2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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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교수, '5차 인천역사포럼'에서 당시 노동자 12명 구술 내용 첫 공개

 

"조병창에서는 공장 일에 낮선 사람들이 안전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작업에 들어가 부상이나 사고가 잦았다. 조병창에는 전속 병원이 있었는데, 날마다 많은 환자들이 들이닥쳤다. 팔이 떨어진 사람, 다리가 부러진 사람..."
 
인천 조병창에 관한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조병창을 직접 경험한 12명의 노동자들의 구술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인천시민사회단체연대는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22일 부평구청 중회의실에서 ‘일제말기의 강제동원과 부평의 조병창 사람들’을 주제로 3.1혁명 100주년 기념 ‘제5차 인천역사포럼’을 열었다.
 
이 자리서 인천대 이상의 교수(기초교육연구원 초빙교수)는 논문 ‘구술로 보는 인천조병창과 강제동원 노무자들의 경험’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여기서 지난 2017년 12명의 조병창 강제동원 경험자들을 대상으로 총 15회에 걸쳐 구술을 진행하고 지난 2년간 점검하고 정리해온 내용을 발표했다.
 
구술에 참여한 사람들은 동원 당시 만 13~17세 였으며 구술을 채록할 당시에는 80대 후반 ~ 90대 전반의 나이였다. 1941년 개창한 조병창은 매달 소총 4천정을 비롯한 방대한 양의 무기를 생산하여 일제 말기 확대되던 전장에 공급한, 국내동원의 대표적인 시설 중 하나다. 일제는 이 조병창에 무기를 만들거나 토목공사나 운반을 하던 1만명 이상의 군속과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였다.
 
그러나 일본 본토 밖에 있던 군사시설로 관련 자료 확보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해방 직후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20일이 넘는 기간 인천 조병창에는 일본군이 그대로 주둔하면서,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는 문서를 통째로 소각했다.
 
일본 육군은 전선이 확대되자 본토를 벗어나 조선과 남만주에 1개씩 조병창을 설치했는데, 부평은 공업이 발달한 서울과 인천 중간에 위치해 있으면서 인천항과 경인선이 인접해 있고 부평평야가 있어 넓은 면적(1백만평 규모 추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부지반환이 결정된 산곡동 미군 캠프마켓 부지와 동아, 현대아파트 자리를 비롯, 부평역에서 동암역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었다.
 
이 교수는 이날 12명의 구술을 바탕으로 ▲인천조병창 동원과정과 조병창·기능자양성소의 구조 ▲노무자 구성과 노동실태(노동현장에서의 역할, 노무자의 일상과 노동환경, 노동현장의 단절과 통제) ▲강제동원에 대한 노동자의 인식과 저항 및 탈출, 해방의 감동과 귀환과정 등의 순서로 발표했다.




 
조병창에는 남녀노소 모든 층에서 광범위하게 '모집'과 '징용', '근로보국대' 등 다양한 형식으로 강제동원되었다. 모집의 경우 인원이 부족해서 시행하는 것인데 각 시·군으로 인원을 할당하면 행정기관에서 지역민들을 부추기면서 모집에 응하도록 재촉하였다.
 
장화두(1928년생, 경북 칠곡)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4월1일 바로 인천조병창 기능자양성소에 입소했다. “학교에서 ‘인천조병창 갈 사람 지원해라. 3년 동안 공부를 가르쳐주니까 집이 가난해 대구의 중학교에 못가는 사람은 거기에 가서 공부해라’고 말했다. 두고두고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구술했다.
 
중학생이던 전진수(1930년생, 경기 고양)는 학생근로보국대로 동원됐다. “어느날 경성역 앞으로 2학년 학생은 다(120명) 모이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다. 그러한 지시에는 누구건 감히 못 간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 각자 자신의 침구를 가지고 경성역에 집결하였고 담임 인솔로 부평역까지 갔다. 선생님에게 언제까지 일한다, 얼마나 받을 수 있다 등의 내용은 들은 적이 없다. 기차로 부평역에 내려 근처 미쓰비시철공소 직원 막사로 갔다.”
 
이번 구술 작업에서 대부분의 구술자는 공통적으로 조병창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언급한 것은 배가 고팠다는 것이었다. '세끼를 챙겨 먹었지만, 항상 배가 고팠다. 쌀에는 잡곡이 많이 섞여 있었고 반찬은 한두가지였지만 다들 배가 고프니까 먹어두었다.'
 
“콩 속에 어쩌다 쌀이 들어있는, 말 그대로 진짜 콩밥을 거기서 먹어 보았다. 그나마 많이 주었으면 나았으련만, 하는 일에 비해 양이 적어 늘 배 고팠다. 조병창에서 가끔 돈을 받았다. 월급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몇푼씩 받으면 부평에 나가 움무죽(우뭇가사리)을 사먹었다.” (김학수, 1929년생, 경기 여주)
 
조병창 병원 서무과에서 일했던 지영례(1928년생, 인천 부평)는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한번은 어떤 아이가 옷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팔이 하나 떨어져서, 팔 하나 따로 가져 오고 좀 있다가 아이들이 따로 그를 데려 오고 하는 일도 있었다”고 구술했다. 어떤 날은 팔을 다친 아이들이 댓 명씩 오기도 했다. 아직 어려서 일이 서툰데 기계를 쓰다가 그냥 끌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윤용관(1929, 충남 공주)는 나무로 총신과 칼자루를 만들고 나무에 옷칠을 했다. 매일 그걸 만지면서 옻이 오르자 얼굴이 부어올라 함지박만해지고 눈만 빼꼼하게 보였다. 윤용관은 결국 한센병이 발병하였다. 조병창에서 나와 몇 달이 지나면서 눈썹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소록도로 갔다.
 
조병창 내부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다. 그 속에 들어가면 굴뚝 속에 들어간 것처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조병창은 그 자체로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군사시설이라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어 여기저기 다닐 수가 없었다. 정해진 길 외는 가볼 새도 없고 분위기도 삼엄하여 가볼 수도 없었다.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은 조병창이 총과 칼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만 알았고 그나마도 자신이 하는 일밖에 몰랐다.
 
감시도 심하고 규율이 엄했다. 대부분 일본인인 간부들은 차를 타거나 말을 타고 나니곤 했다. "평소에도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감독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했다거나 물건을 훔쳤다고 하면서 얼굴이든 어디든 보이는 대로 때리고 ‘녹여버렸다’. 공장 내에서도 툭하면 집합해서 ‘엎드려 뻗쳐’를 했다. 잠시라도 쉴라치면 반장이 갑자기 ‘고치라에 고치라에’ 하면서 “너 왜 그렇게 안하느냐? 근무태만 아니냐?”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군인들이 총을 들고 있는 가운데 도망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삼엄한 감시로 인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한약방에 있다 돈을 벌기 위해 1941년 조병창에 들어간 김우식(1925년생, 충남 청양)은 1944년 12월 어느날 징병 시기가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자 무작정 부평역 방향으로 향했다. “출근한다고 나서서 무단결근했다. 어차피 숨어있어도 잡힐 것 같아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한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아서 지서에서 연락이 왔다” 김우식은 부모님이 ‘와이로’를 써서 조병창으로 다시 가지않고 평양에 있는 군무예비훈련소로 이중 동원되었다.
 
변명식(1928년생, 경기 여주)은 어느날 기숙사에 있다가 한 밤에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는 담벼락으로 향하였다.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무작정 그냥 나왔다. 둘러친 철조망을 마구 뜯고 발길 떨어지는 대로 내뺏다. 도로를 피해 산길로만 한 달 가까이 걸었다. 열매도 따먹고 농가에 들어가 얻어먹기도 했다. 수원까지 가서 여주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철길이 방향을 잡아주었다. 여주에 도착했지만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누이의 시댁이 있는 점동면 도리로 향했다. 사돈집 뒤곁에 파놓은 호에 숨어 낮에는 거기서, 밤에는 누이 방에서 잤다. 사돈 어르신들이 세끼 밥을 넣어주었다. 한 달 가량을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사돈 마나님이 해방이 되었다고 나오라고 했다."
 
이상의 교수는 “고령자인 구술자를 찾는 것도 향후 몇 년 이내에만 가능한 일인데, 그들이 사라지면 그 규명 작업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며 부평구 등에서 대책을 세울 수 있기를 당부했다.
 
이 교수는 또 “구술 과정에서 꿈에서라도 한번쯤 애기하고 싶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씀을 들었다”며 “그렇게 힘들고 기억하기 싫었던 것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도 모르게 해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토론자로 나선 손민환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관련 자료를 찾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조병창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들만이 내부 실상을 전해 줄 수 있음으로 그들의 구술은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며 그럼에도 "75~80년전의 일의 증언의 정확성과 신빙성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밝혔다.
 
곽경전 부평미군부대 공원화추진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은 ”90년대 문화재 전문가들이 캠프마켓 내부의 지장물 기초조사를 한 적이 있으나 이후 우리측에 의해 근대건축물에 대한 추가조사가 진행된 적은 없다”며 “88정비부대(부평공원 자리)의 건물들이 일제 강점기 때 건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캠프마켓의 일부 건물들의 양식이 철거된 88정비부대와 비슷한 부분들이 있어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명식 부평문화재단 이사는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천 조병창에서 종사하고 강제동원되었는지, 그 규모는 아직 파악되지 않는다. 적게는 3천명, 많게는 2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라며 “조병창을 비롯한 주변 공장지대에 근로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판자집이 늘어갔고 새로운 주택단지와 마을이 형성돼갔는데, 홍중사택, 신촌, 삼릉, 영단주택, 검정사택, 디젤사택, 다다구미, 하촌, 관동주 등이 근로자 사택으로 현재까지 일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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