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평도 - 아름다운 얼굴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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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평도 - 아름다운 얼굴바위
  • 이창희
  • 승인 2012.07.0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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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임경업 장군이 환생한 듯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이루어져 있다. 소연평도에는 아름다운 얼굴바위가 있어 귀한 섬으로 불리고 있다. 그 모습은 과거 임경업 장군이 한반도를 지키기 위하여 환생을 한 후 얼굴바위로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연평도는 북서쪽으로 38선과 인접하며, 북한 해안포 진지와 불과 12km 떨어져 있다. 지명은 평평하게 뻗친 섬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출토된 토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황해도 벽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조기 어장이었으나 현재는 꽃게잡이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임경업장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나뭇가지를 꺾어 개펄에 꽂아두었더니 물이 빠진 뒤 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었으며, 이것이 조기잡이 시초라는 설화가 전해진다. 섬에는 임경업장군각이 있어 주민들이 출어에 앞서 풍어제를 지내는 관습이 있다. 또한 과거 연평도는 조기가 많이 잡혀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대연평도의 동쪽에는 방파제(856m)가 설치된 2종항인 연평도항이 있고, 남쪽 끝에는 등대가 있다. 한편 소연평도에서는 함철품위 50.4%인 타이타늄 자철광상이 발견되었다. 1999년 6월 북한 어선이 계속 이곳 앞바다를 침범함으로써 6·25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의 해군 함정이 최초의 교전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연평도는 한동안 뉴스의 초점이 되었고 꽃게잡이가 금지되면서 주민들이 생계를 위협받기도 했다.

연평도는 '조기섬'이다. 조기를 빼놓고서는 연평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조기가 사라져버린 지금은 '꽃게섬'이 됐지만 연평도 역사에서 조기의 역할은 꽃게와 비교할 수도 없이 크다. 연평도 조기잡이는 조선 인조 때 명장 임경업 장군이 처음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임경업 장군이 어살법으로 조기를 잡았다는 안목어장은 오늘날 연평면 사무소가 자리한 마을의 앞바다이다. 연평도 일주여행에 나섰을 때 맨 먼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당섬, 책섬, 작은지리 등의 작은 섬들에 둘러싸인 어장은 호수처럼 얕고 잔잔하다. 이곳에서는 썰물 때 조개, 게, 낙지 등을 아이들과 함께 직접 잡아보는 갯벌체험이 가능하다.

안목어장 북동쪽 바닷가에 우뚝한 언덕에는 망향전망대가 있다. 연평도에서 북한 땅이 가장 가깝게 보이는 곳이다. 오늘날 연평도 주민의 70%가량은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들이다. 한국전쟁 때 잠시 피난살이 왔다가 여태껏 돌아가지 못한 채 눌러 살고 있는 것이다.

 

'대연평도'라고도 불리는 연평도의 면적은 7.295㎢에 불과하다. 면적이 좁고 택시나 시내버스 같은 대중교통편이 없어 외지관광객들은 두 발로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 연평도를 둘러보는 수밖에 없다. 거북이처럼 느긋하게 걸어도 1박2일이면 다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인조 때 명장 임경업에 얽힌 설화. 임경업은 병자호란을 전후로 활약하였던 인물인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 <임장군전>에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소설이나 전기에 없는 임경업의 설화가 문헌이나 구비로 전하여지고 있다.

≪동야휘집 ≫에는 <대녹림논검결의 >라는 제목으로 임경업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임경업이 어느날 사냥을 나가서 태백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났는데, 그 나무꾼은 검술이 신통하여 자기 여자와 간통한 세 남자를 죽이는 장면을 임경업에게 보여준 뒤, 뒷날에 쓸 일이 있을 것이라면서 검술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청구야담≫ 등 다른 문헌설화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구비로 전승되는 임경업의 이야기는 서해 연평도의 임경업 장군 사당과 관련된 것이다. 임경업은 호국의 요청으로 한나라의 수군대장이 되어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서해를 건넜고, 다시 청나라로 잡혀가다가 도망하여 서해를 건너 명나라로 망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연평도 부근에 머물게 되었는데, 바다 가운데 식수가 없어 군사들이 동요하자 한군데 닻을 내리고 바닷물을 퍼서 마시게 하였는데 이 물이 바로 담수였다는 것이다. 또한, 반찬이 떨어지자 근처의 가시나무를 베어다가 바다에 꽂아 놓았는데 조기떼가 가시에 많이 걸려 반찬으로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밖에 임경업 장군 사당에 왜병들이 들어갔다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와 임경업이 호국공주에게 관상을 보인 이야기, 병자호란 때 호국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으나 국왕의 항서 때문에 참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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