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은 한류문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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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은 한류문화의 시작이었다!"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5.2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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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밴드연합 회장 정유천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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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미군부대가 인천에 있음으로써 서구 문화가 들어오게 됐습니다. 대중문화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고, 한류문화의 원천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2016년이면 완전히 이전하는 미군부대 자리를 잘 활용하면 외국 관광자원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인천밴드연합 정유천 대표는 부평이 한류문화의 시작이었고, 앞으로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군부대의 영향을 받아 밴드 클럽이 생활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고도 설명했다. 그를 만나 인천밴드가 어떻게 시작됐고 이어져 왔는지 들어봤다.


-1990년대에 남구 관교동 쪽에 밴드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밴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도 하는데 그때 어땠나요.

“90년대 초반에서 중반쯤 관교동 쪽에 밴드 연습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홍대 쪽에도 클럽이 본격적으로 많이 생긴 때는 90년대 말입니다. 홍대 쪽에 인디문화가 활성화하기 전에는 관교동 쪽에 밴드가 많이 모였습니다. 밴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관교동이 아주 유명했죠. 30~40개 정도 연습실이 있었습니다. 한 공간에서 한 팀만 연습한 게 아니어서, 팀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겁니다. 임대료가 다른 데보다 싸서, 몇 팀이 공간 하나를 빌려서 연습했거든요. 저는 그보다 전 세대였습니다. 이미 프로로 활동할 때였으니까요. 나이로 보면 10년가량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인천에는 언제부터 사셨는지, 밴드에는 언제부터 관심이 많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인천이 아니라 부평에서 오래 살았습니다.(웃음) 초등학교 중학교를 부평에서 나왔고, 동산고를 나왔습니다. 그때 정서는 인천사람이 아니라 부평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천과 부평이 정서가 많이 달랐거든요. 인천은 바닷가를 낀 해안문화이고, 부평은 좀 달랐습니다. 에스캄이라는 미군부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문화가 달라서인지 두 지역 정서가 달랐습니다.”

“지금 저는 인천밴드연합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는 10년 전에 생긴 단체이고, 그후에 밴드협회가 또 생겼습니다. 밴드는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원래는 기타리스트였죠. 7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하드락이라는 음악이 유행했습니다. 그때 가장 돋보이는 악기가 기타였고, 기타 치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그 음악을 듣게 됐습니다. 음악을 해도 나는 밴드를 하고 싶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했습니다. 일단 멋있어 보이잖아요.(웃음) 음악을 오래 하면 기타를 해도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드럼, 베이스기타 등 다하게 됩니다.”
 
 
 
-낮에는 서울 마포아트센터로 출근해 ‘라이브음악문화발전협회’ 대표이사 일을 보시고, 저녁에는 부평으로 내려가 ‘락캠프’라는 밴드 클럽을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음악활동을 해오셨는데, 힘들진 않으셨나요.

“음악 하는 것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지만,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 거개가 느끼듯이 경제적으로 안정치 않은 때가 많습니다. 월급쟁이들은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게 안 되니까 힘들죠. 그 부분에서는 힘들었지만, 음악을 한 자체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도 일주일에 3~4일은 연주하니까 참 좋죠.”

“저녁 때 가서 클럽 문을 엽니다. 오후 7시께 열어서 평일에는 새벽 1시까지, 주말에는 새벽 3시까지 엽니다. 주말에는 인디밴드들이 많이 와서 공연을 합니다. 상설공연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합니다. 토요일은 언제나 하고, 금요일에는 어쩌다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일요일에는 기획공연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 5월 25일 오후 7시부터는 한중일 밴드 공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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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 같이 하신 분들도 지금 밴드 활동을 하고 있나요. 하신다면 주로 어디에서 하고 계신가요.

“밴드 음악이 인천에서 가장 활성화한 시기는 1960~1970년대 중반입니다. 지난해에 만든 이 책은 <음악도시 부평>입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뿌리를 찾자는 의미에서 만들었죠.  미군부대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미군은 해방이 되면서 1948년에 들어왔다가, 다시 한국전쟁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때 백운역을 중심으로 에스캄이라는 부대가 들어왔습니다.”

“미군부대 에스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어떻게 흘러나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때 부평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전에 음악활동을 한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고증을 해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서 부평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당시 미군군수지원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미군의 군수물자를 여기서 보급한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빵 공장, 식료품 공장, 병원, 비행장, 형무소… 등등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다 있었죠. 미군부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대는 거의 부평에 있었습니다.”
 
 
-미군부대가 어느 정도 넓었나요. 많이 철수했다고 해도 여전히 면적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8만평 정도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30만평이 넘었습니다. 백운역에서 현대 아울렛으로 오는 그 길 오른쪽이 번화가였습니다. 부평역부터 고속도로 입구까지 대로변 왼쪽은 다 미군부대였습니다. 에스캄이 엄청나게 컸죠. 지금은 미군들이 철수하고, 또 철수하고 그래서 지금의 캠프마켓만 남아 있습니다.”
 
“미군부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일본이 지배하던 식민지 문화가 있어 우리 전통문화가 아니라 트로트가 생겨나게 됐습니다. 미군부대가 있으면서 서구의 대중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군부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민지 문화, 즉 일본문화가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음악도 전통문화가 아니라 트로트가 생겨난 거죠. 서구의 대중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지금 서구화한 음악, 음악적 스케일이 바뀌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부평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네요. 그 문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대중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미군부대가 완전히 떠나는 후년에는 그 공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인천에서 관광자원을 개발하겠다고들 많이 합니다. 중구 쪽에는 섬도 많으니 그래야지요. 그쪽에 도서지역이 있다면, 이쪽 부평 쪽으로는 대중문화가 있습니다. 한류문화의 뿌리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스캄 자리가 2016년에는 완전히 이주할 건데, 그 넓은 땅을 인천시에서 잘 써야 합니다. 저는 그곳을 한류문화의 원천지라고 봅니다. 그래서 대중문화역사 박물관 등을 지어 관광객을 유치해야 합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한류도, 이곳에 대중문화에 관한 자료들을 잘 모아놓는다면 외국 관광객을 얼마든지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가수 비를 비롯해 한류 열풍을 몰고 있는 연예인들에 대한 관심은 엄청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홍콩 분은 비가 군대 갈 때, 제대할 때도 꼭 옵디다. 그 관심이 엄청나더군요. 에스캄이 이전한 다음 그 자리를 정말 잘 쓴다면, 그러한 관광재원을 인천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에스캄 자리는 엄청 넓습니다. 역사박물관, 시립박물관, 시립미술관… 등등 관광객을 한자리에 불러들이면 참으로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백운역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습니다. 또 가능하면 미군부대 시설 중에서 가능하면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봅니다. 주한미군의 역사도 우리나라 근현대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돌이켜볼 수 있는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부평공원은 100% 밀어버리고 공원을 만들었는데, 참 아쉽습니다.”

“에스캄 건물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미군부대가 있을 때도 부평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주한미군의 역사도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정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러한 이야기를 자꾸 하고 있습니다. 에스캄 안에는 건물뿐만 아니라, 야구장 잔디밭 등 그대로 쓸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특히 미루나무 등 엄청 큰 나무들이 많습니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왔을 때도, 그곳은 일본이 조병창으로 쓰던 곳입니다. 똑같은 용도로 미군이 쓴 거죠. 예전에 무기를 만들던 터였는데, 대지가 잘 다져져 있으니까 토건사업이 잘 돼 있으니까 미군이 그대로 들어온 겁니다. 이것이 부평의 역사이고, 인천의 역사입니다.”
 
 
-<음악도시, 부평> 책자는 에전에 밴드 활동을 하신 분들의 목소리까지 들어 있군요. 대중문화의 뿌리라는 근거를 역사적으로 밝히신 건데, 앞으로도 또다른 자료집을 낼 계획이 있으신가요.

“사실 시간이나 예산이 넉넉지 않았습니다. 20~30명 정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미, 한명숙, 이봉조… 등 미군부대를 거쳐간 분이 많습니다. 대중음악 1세대들은 다 거쳐갔고, 그 분들의 영향을 받고 지금 많은 가수가 활동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지금 젊은 가수들이 활동하고 있는 한류, 대중음악의 뿌리는 미군부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평만은 아니지만, 가장 영향력이 컸다고 봅니다. 송탄이나 동두천은 보병부대였고, 그에 비해 부평은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곳이어서 규모가 더 컸습니다.”
 
 
-부평에 미군부대가 있었고,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환경이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평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나요.

“저는 9살 때 포천에서 부평으로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쿡(요리사)이었거든요. 그때부터 살던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백마장 쪽 경남아파트 자리는 비행장 자리였거든요.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워낙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많다보니 모르는 분도 많을 겁니다.”

“당시에 삼릉, 신촌은 정말 화려한 동네였습니다. 지금은 미군부대가 철수하고 가장 낙후된 마을이 됐습니다만, 미군부대가 있을 때는 양색시들이 많이 세들어 살던 곳입니다. 양색시들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을 들고 나와 팔았고, 그래서 경제가 돌았습니다. 밤이 되면 삼릉, 신촌 쪽이 아주 화려했습니다. 낮에는 그냥 마을이고, 밤에는 사람들로 복잡했습니다.”

“미군부대가 하나씩 떠나면서 점점 동네가 죽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가장 무서웠던 말이 '감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미군부대가 철수할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자리를 걱정하면서 말씀하셨거든요. 어렸을 때는 뜻도 모르면서 그 소리가 참 무서웠습니다. 어쨌든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클럽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장사가 안 되니까, 일부 사람들은 이태원으로 올라갔습니다. 물론 그때도 이태원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규모가 크진 않았죠. 이때 부평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면서 규모가 더 커지고 활성화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부평이라는 데는 참 재미있는 도시입니다. 파고들어가면 할 말이 무궁무진합니다. 시간이나 예산이 허락하면 언젠가 다시 조사해야겠습니다.”
 
 
-부평구청 부근에서 '락캠프'라는 클럽을 운영하시는데, 잘 되나요. 자리가 좀 외진 듯도 합니다. 또 현재, 인천에는 밴드 클럽이 몇 개 정도 있나요.

“현재는 저희뿐입니다. 밴드라는 클럽 자체가 운영이 잘 안 됩니다. 1997년도에 락캠프를 부평3거리 쪽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부평구청 쪽에서 하고 있습니다. 저희 말고도 두세 군데 더 있었지만 운영이 안 되니까 2~3년 하다가 없어졌습니다. 일반 음식점과 달리 소수의 마니아층만 보고 장사를 해야 하니까, 운영에 한계가 있습니다.”

“저희는 20대부터 5,60대까지 손님 층이 다양합니다. 젊은 인디밴드가 온다고 광고가 나가면 20대 손님들이 오고, 나이가 좀 있는 밴드가 온다고 하면 나이 드신 분들이 찾아옵니다. 굳이 연령층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주 공연하는 걸 인터넷에 올리고, SNS를 통해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한 번 오신 분들은 색다른 경험이고 재미있으니까 아는 사람들과 또 찾아옵니다.”

“사실, 시작할 때는 그래도 마니아들이 오지 않겠느냐, 인천에 있는 유일한 라이브클럽인데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그렇지 않습디다.(웃음) 음주문화 자체가 진탕 술 먹는 유흥 쪽으로 가니까, 문화가 생활 속에 배어 있는 게 아니니까 그게 안 되더군요. 홍대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밴드들이 공연하면서 토대를 마련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춤을 추는 클럽이 잘 됩니다. 그쪽이 활성화하니까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올리고, 밴드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경영 상태는 여전하고, 밴드 클럽과 달리 춤추는 클럽은 잘 됩니다. 홍대 쪽 밴드는 아마 1000여개 정도 될 겁니다. 물론 다 홍대 밴드라고 할 수 없는 게,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공연할 때만 그쪽으로 가니까요. 저희 락캠프에서 공연하는 사람들도 홍대 쪽에 가서 공연합니다.”
 
 
-밴드 활동도 생활문화라고 봅니다. 밴드 클럽에 가서 술 한 잔, 차 한 잔으로 색다른 문화를 체험할 수 있으니까요. 술만 마시고, 술로 끝장나는 음주문화가 좀 바뀌어야겠지요.  

“처음에는 클럽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식품위생법에 저촉돼 합법화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방송에서도 클럽에서 공연하는 게 나오면서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몰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 단속하던 것을, 지역상권에 도움이 되겠다 하면서 일시적으로 봐줬습니다. 당시에는 클럽공연이 불법이었습니다. 홍대 쪽에 6~7개, 인천에 저희 하나… 그래서 합법화하기 위해 서명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1999년도엔가 최희준 선생님이 국회의원일 때 문광위 소속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서명 받을 걸 갖다드려서, 그 분이 국회에서 합법화 시켜달라고 한 겁니다. 그 분이 미8군 출신이다 보니 이쪽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밴드는 생활문화입니다. 차 한 잔, 술 한 잔을 마시면서 밴드 공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식품위생법에 저희는 일반음식점 허가로, 2인 이상은 공연하면 안 된다, 한 명은 된다는 묘한 규범이 있어서 단속이 나오면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분이 삭제됐고, 클럽에서 밴드가 공연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부터 15년 전입니다. 그러면서 미사리 쪽이 살아났습니다. 라이브 클럽에서 법을 마련하고, 정작 돈을 번 사람들은 미사리 사람들이죠.(웃음) 저희는 1997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찾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아니고,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겁니다. 게다가 저 같은 사람은 공연할 장소가 필요하니까 공간이 꼭 필요합니다.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밴드에 관심이 있거나 애정 있는 분들이 클럽을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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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밴드연합에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행사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행사를 어떻게 하시는지, 계획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인천밴드연합은 해마다 고정 행사로, 여름에 썸머락페스티벌을 인천의 각 해수욕장, 바닷가에서 합니다. 전에는 영흥도 십리포해수욕장, 을왕리, 월미도에서 공연했습니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는 해마다 강화 동막해수욕장에서 합니다. 올해는 8월 2일에 합니다. 또 연말에는 ‘사랑의 락페스티벌’이라고 해서 어려운 청소년돕기 자선공연을 합니다. 해마다 200~300만원의 수익금을 초등학교 쪽을 지원합니다.”
 
 
-젊은 사람들을 빼고는 일반적으로 밴드 클럽에 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운영하고 계신 '락캠프'에 오는 손님들은 대개 나이가 어느 정도인가요.

‘80평 정도 되는데, 앉아서 공연을 보기도 하고 스탠딩 공연할 때는 250명가량 들어갈 수 있습니다. 메뉴는 일반 카페랑 똑같고 가격도 똑같습니다. 비싸지 않죠. 간단한 요깃거리나 안주가 있고, 클럽들은 팬들이 많지 않아 비싸지 않습니다. 상설공연은 입장료가 없고, 기획공연은 입장료가 있습니다. 금, 토요일은 상설공연으로 입장료가 없습니다.“

“7호선 부평구청역 3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있습니다. 접근성은 엄청 좋은데 밤이 되면 관공서 직원들이 다 퇴근해서 조용합니다. 주차할 데도 많죠.(웃음) 근처에 굴포먹거리타운이 있어서 재래상권 활성화를 위한 공연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5월 한 달 동안 굴포먹거리타운 옆 공원에서 했고, 올해는 9월에 매주 금요일마다 야외에서 공연할 예정입니다.”
 
 
-인천에서 락 문화가 잘 정착됐으면 좋겠습니다. 음악도시이면서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뿌리 부분에 해당하는 부평 지역에서 그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말씀대로 2년 후에 미군부대가 떠나면, 그 자리가 대형공연장이 되면 또 다른 문화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인천 문화에 있어서 가장 문화의 어떤 중심은 대중음악에 키를 가져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펜타포드 락 페스티벌, 올해 8회인 것 같은데 시에서 예산 지원을 10억 할 정도면 대규모입니다. 결국은 락페스티벌을 통해서 지역 인프라도 활성화시켜야 하잖겠습니까. 그래야 지역에 뿌리가 있어야 잘 되고, 실력있는 뮤지션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 락 음악의 뿌리를 부평 쪽에서 찾아갔으면 합니다. 역사적 근거가 있으니까, 그러한 대중문화를 잘 살려서 지금의 홍대 쪽처럼 대한민국 최대의 상권을 만들고 외국인이 찾는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인천의 랜드마크가 된 데는 아직 없습니다. 부평 에스캄이 떠난 자리에 무언가를 집어넣을 수 있는 공간이 넓으니까요. 시와 부평구가 잘 협조해서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런 게 문화정책적으로 뭔가 나와야죠. 부평 문화를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문화의 키를 풍물로 맞춰져 있는 것도 같은데, 풍물은 풍물대로 가면서 문화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원래 뿌리를 갖고 있는 문화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한쪽만 보면 가로막힘이 됩니다. 워낙 부평은 빽빽하고, 빈 땅이 없습니다. 결국 무형의 자산, 결국 문화 발전으로 가야 합니다. 키를 잘 찾고, 뭘 잡아야 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 에스캄 자리가 대규모 공연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와서 공연하면 정말 멋진 공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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