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조기가 사라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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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조기가 사라진 이유는?
  • 김용구 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4.07.2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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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2
 
 







 
<조기역사관에서 본 가래칠기 해변(좌)과 조기역사관(우)>

연평도는 인천에서 서북방 122㎞에 위치한 섬이다.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2개의 유인도와 4개의 무인도가 있으며 북방한계선(NLL)에서 3.4㎞거리에 있다. 지난 1999년 제1 연평해전과 2002년 제2연평해전, 그리고 2010년 11월에는 북한의 포격이 있었던 아픔의 섬이다.

연평도는 전남 영광군 법성포와 전북 부안군 위도 부근의 칠산어장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조기 생산지이었다. 조기 어종으로 참조기, 보구치, 부세 등이 있다. 회색을 띤 황금색 몸빛 참조기는 겨울에 제주도 서남방 등지에서 월동한 뒤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경에 전북 위도 부근에 이르고,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사이에 산란을 위해 연평도 부근에 이른다. 한때는 참조기의 50%가 연평도에서 잡혔다고 한다.
 
조흥준(79) 어르신에 의하면 “어른들의 말씀에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 부식용으로 조기를 염장했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원되어 조기말리기에 동원되어 부역을 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이 되었어요. 그때는 조기가 엄청나게 잡혔습니다. 어구 어망이 면사여서 조기가 많이 잡히면 어망이 터졌어요. 조기를 주우면 그날 하루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어요.

해방 후 전국 어선들이 다 모여들기 때문에 항구에 배가 이중 삼중으로 되었죠. 배가 천여척이 모여들고 그리고 술집들이 따라 들어왔어요. 그래서 파시가 형성 되었는데 어른들이 제2의 서울이라고 했어요. 거리에 사람들이 꽉 차서 애들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60년대에도 여기가 다방이 7개-8개인가 있었어요. 그 당시 연평도엔 맥주홀이 있었어요.

제는 1964년에 연평도에 있는 어업조합에 입사했어요. 그 당시 4월부터 서해어로지도본부가 설치되어 4월부터 6월 조기잡이를 하는데 임시적으로 근무했습니다. 조기철이 끝나는 6월 말경이면 어로지도 본부가 철수했습니다“.


연평도에서 조기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어로한계선의 설정과 남하
 
조기어획량이 1948년 44,490톤, 1949년 59,054톤으로 증가하다가 6.25전쟁 중 1951년 21,372톤 휴전 이후 1954년 18,861톤, 1955년 16,541톤으로 크게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6.25이후 조기어장이 NLL선 위에 위치하고 있어 지금의 NLL(Northern Limit Line) 근처에서 어선들이 조기를 많이 잡으니까 북에서 막 포로 쏘고 우리 어선을 많이 납치해갔어요”(조흥준).

1957년 연평근해 조기어장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자료: 국립수산과학원)
 
지도 ①에서 보면 갈도, 장재도, 대수압도, 소수압도 사이에 약800척의 배가 조업을 하고 있고, 지도 ③,④ 지역 등산곳 아래 현재 NLL선 부근 130척, 왼쪽으로 약 50척의 배가 조기잡이 조업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하고 충돌을 불가피 하다.
 
북한이 조기잡이 우리어선 공격과 납치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자료: 옹진군지, 1989)

 
날짜 일지
1955년 5월 10일 조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단에게 기관총 집중사격
1958년 4월 29일 다복호는 심한 풍랑을 만나 운항 중 북한의 경비정에 납치
1959년 7월 30일 대창호외 선박 6척이 납치됨
1964년 3월 20일 제 1. 2 보성호 납치됨
1967년 5월 27·28일 대영호가 북함정의 좌초, 조업을 하던 100여 척의 선박 위협사격
1966년 6월 17일 대성호 순복호 금융호 세창호, 축복호 등 5척 납치
 
“그래서 북한이 조기잡이 우리어선에 대해 공격과 납치가 잦아지자 정부에서는 어로 저지선을 2회에 걸쳐 남하했어요. 그러자 연평도에서 조기가 잡히질 않았어요”(조흥준).
 
1964년 6월 어로저지선을 처음 설정하고 1967년, 1969년 어로저지선을 남쪽으로 이동하자, 인천(당시 경기도)의 조기어획량이 1964년 16,772톤, 1969년 6,181톤, 1974년 4,140톤으로 크게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1970년 해군 방송선이 납북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자료: 수산청, 수산통계연보, 통계청

“어로 저지선이 남하된 후 연평도에서 조기가 잡히지 않자, 1968년 어로지도 본부도 철수하였고 어선 소유자는 전부 덕적도로 갔어요. 대체산업으로 김을 시작했어요. 저도 수협직원을 그만두고 김양식을 했어요. 당시 연평도 김은 상당히 맛이 좋아 일본으로 수출을 한 예도 있어요”(조흥준).
 
 *어로저지선이란?
어업 및 항해의 안전을 목적으로 동해와 서해의 접적해역(接敵海域)에 정한 어업규제선으로 어로허용선을 의미한다. 1964년 6월 24일 농림부가 농림부령으로 북위 38° 35′ 45″에 어로저지선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설정하였다. 그 뒤 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 해군 56함이 북한해군에 피격, 침몰됨에 따라 같은 해 12월 5일 수산청 훈령으로 어로저지선을 2마일 남쪽 북위 38° 34′ 45″로 조정하였다. 또 1969년 3월 10일 해양경찰대의 건의에 따라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농림부 4부 합동부령으로 동해에서 5마일, 서해에서 5-7마일 다시 남쪽으로 이동시켜 북위 38° 33′ 으로 조정하였다, 그리고 이때 어로한계선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둘째, 어구 및 어획방법의 변화
 
개항 이후 우리나라 어업은 일본에서 전해진 안강망(鮟鱇網) 등 새로운 어구와 동력선(動力船)의 등장으로 조기잡이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안간망 어업
안간망 어업은 조류가 빠른 곳에서 조류에 의해 어구가 밀려가지 않게 고정해 놓고, 고기가 조류의 힘에 의해 어구 속으로 밀려가도록 하여 잡는다. 어구의 형상은 입구가 넓고, 길이가 긴 자루 모양의 그물로 구성되어 마치 아귀처럼 되었다고 하여 안(鮟아귀안)간망 이라 부른다.
 
안강망 어업은 많은 양의 어획고를 올릴 수 있어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에 동력선이 나타난 것은 안강망 어선이 들어온 시기와 비슷한 시기인 1908년경이다.
대표적인 조기어장인 연평도 경우, 1938년에 조기를 잡기 위해 모여든 어선 750척 중에서 동력선이 50여 척이었다(서종원,“조기잡이 어업기술의 변화양상 고찰”, 도서문화 제34집, 2009). 어선 동력화는 우리나라 어선과 어업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기선저인망(機船底引網)과 유자망(流刺網)이 조기잡이에 새롭게 도입 되었다.
 
기선저인망(機船底引網)
 
기선저인망(機船底引網)은 바다 밑에 있는 어류 등을 동력선에 의해서 그물로 포획하는 방법이다.

유자망(流刺網, drift gill net)
 
기다란 띠 모양으로 된 직사각형 그물감의 상단과 하단에 각각 발돌을 부착하여 상하로 전개되도록 한다.
조류를 따라 그물을 흘려보내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리거나 감싸게 하여 사용하는 어망 도구
 
유자망(流刺網)과 기선저인망(機船底引網)이 도입으로 조기의 어획고는 급중하였다. 조기의 남획으로 인하여 조기가 감소하게 되자 어민들은 조기 회유로를 역추적하며 조금씩 남쪽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이후 조기어장이 흑산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해안과 추자도 인근에 형성되어 대부분의 조기잡이 어선이 목포, 여수, 추자도를 근거지로 조업하고 있는 현상은 조기어업의 대형화에 따른 남획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박준모, “어획방법 변천에 따른 조기 어장의 이동에 관한 연구”, 농업사연구, 제11권1호, 2012)
 
“현재는, 안목근처에 조기가 잡힌다고 해요, 미영식당에서는 여기서 잡은 조기로 조기매운탕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조기가 크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봄에 적은 숫자가 올라와서 산란한 새끼들이 그물에 걸리는 게 아닌가 생각돼요. 현재 NLL 근처에 우리 어선들이 들어가지를 못하고 중국 어선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죠”조홍준(79).
 
글을 마치면서

연평도 조기어장은 동해의 명태어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대 어장으로 불리었다. 6.25 이후 조기어장이 지금의 NLL(Northern Limit Line) 근처에서 어선들이 조기를 잡자 북한이 우리어선에 대한 공격과 납치를 하게 되었고, 1968년 1월 23일 동해안에서 미 해군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 되어 큰 축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정부는 어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로한계선을 남하하였다. 이 결과 연평도에서 조기가 잡히지 않고 1968년 어로지도 본부도 철수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안강망과 동력선의 도입, 해방 후 유자망과 기선어업망 등 어획방법이 발전됨에 따라 어획고가 증가하고 조기잡이가 경쟁적으로 진행되면서 조기 어장이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도 및 추자도 근방에서 월동기에도 조업을 하고 있어 조기는 씨가 말라 가는 실정이다. 조기는 동중국해에서 서식하다가 산란기에 우리 연안으로 올라오는 회유성 어종이기 때문에 수산자원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미영식당의 조기매운탕


안목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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