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살이’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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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살이’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 한인경
  • 승인 2017.10.23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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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경의 시네 공간 ⑮] 다시 주목하는 영화 『축제』

<한인경의 시네 공간>은 지난 1년간 독립영화 12편에 대한 연재를 마치고, 2017년 8월부터 ‘다시 주목하는 영화’라는 주제로 영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일상의 피로를 풀어 주는 청량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인문학적으로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밖의 다양한 존재의 진실에 대하여 사유하게 해준다. 영화 속 많은 삶의 양상을 공감할 수 있으며 감독과 배우들의 천착(穿鑿)한 철학적 외침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테마가 되기도 한다. 제한된 물리적 크기의 스크린이지만 우리는 무한대의 자유로운 공간을 만난다. 그 속에서 독특한 재미를 느끼고 힐링하고 비상한다.


“전통 상장례(喪葬禮)를 통해서 생각해보는 삶과 죽음”

『축제』
개 봉 : 1996. 06. 06. 개봉 (107분 /한국)
감 독 : 임권택
출 연 : 안성기, 오정해, 한은진, 안병경, 정경순
등 급 : 12세 관람가

 

출처:영화 『축제』
 

시니어들이 대세인 시대다.
2017년 올해 8월로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가 넘는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20%가 넘는 초고령사회로의 진입도 아주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 시골, 국내외 관광지, 다양한 공연장, 여러 교육 프로그램 등에서 마주치는 백발 희끗희끗한 노년분들이 낯설지 않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동네 어귀의 영구 버스, 문밖에는 謹弔라고 쓴 등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아파트 시대로 이동 되면서 마당과 대문이라는 개념이 희석되긴 했다. 전문 상조회사의 등장, 병원의 장례식장, 핵가족화, 도시화, 복잡한 것을 꺼리는 풍토 등의 시대적 변화는 상장례(이후 장례로 표기함) 문화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소가 집이 아니라 병원의 베드가 되었고 이후 주검이 가는 장소는 병원의 냉동실이 되었다. 장례식장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고 이웃의 누가 죽음을 맞이했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발생한다.

100세 시대, 재앙인가 축복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有限한 삶과 필연적 숙명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어느새 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렸다. 약 20년 전, 임권택 감독은 영화 『축제』를 선보였다. 당시 큰 흥행을 거둔 작품은 아니었지만, 다양화와 간편화란 이중성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새삼 반추하고 싶은 작품이다.

큰 줄거리를 요약해본다.
7남매를 거의 홀로 키우신 87세 노모(한은진 粉)의 사망으로 가족, 친척, 동네 주민들은 정해진 의례에 따라 엄숙하게 장례를 치른다. 준섭의 이복 조카 용순(오정해 粉)의 등장으로 형제간에 분란이 일고, 인간의 이기심도 표출되지만 거상(居喪)이라는 현실을 배경으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킨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일명 ‘영원한 현역’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사생관(死生觀)이 뚜렷하게 나타난 영화다. 그리고 점차 간소화되어가는 요즘의 장례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복잡한 절차의 전통 장례를 보여 주는데 이 과정을 통해 조상숭배, 효와 가족이라는 큰 반경 안에 존재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보여준다.
탈상 기간이 그 옛날의 侍墓살이, 2년, 1년, 백일, 사십구재, 삼우제, 오일장, 삼일장으로 점점 짧아지고 있다. 산업화로 변모해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전통적인 장례의 복잡한 의식은 그대로 지켜내기엔 유족의 입장에서 뭔가 불편하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의례를 치르던 먼 길 떠나는 망자와 마지막 정을 나누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남은 자들의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출처:영화『축제』



먼저 감독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작가 준섭은 노모의 영전에 올린 동화책(“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의 내용을 나레이션을 곁들이면서 죽음과 윤회라는 철학적 사유를 동화적으로 접근한다. 이 한 권은 아들이 어머니 영전에 바치는 못다 부른 사모곡이면서 편안한 저승길을 비는 기도서이기도 하다.

초등학생인 은지는 할머니가 나이가 제일 많으신 집안의 어른임에도 엄마나 아빠보다 키가 작고 또 점점 작아져 가는 이유에 대하여 궁금해한다.

할머니는 나이를 아빠, 엄마, 은지에게 나누어 주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그 나이에 담긴 할머니의 지혜도 함께 나눠 주시기 때문에 그만큼씩 어린애처럼 되어 가시는 것이라고.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은 키만 크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처럼 밝은 지혜도 쌓아 가는 일이라고. 할머니가 나이를 다 나눠주면 나이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고.
은지는 그때가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것을 은연중 알게 되며 할머니의 지혜가 은지를 훌륭한 어른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은지는 이러한 부모님의 말씀에 신기해하면서도 한편으로 할머니께 미안해한다. 그래서 할머니의 나이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돌아가신 후에 누구나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고 올바르게 산 사람은 다시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고. 그러니 할머니도 은지가 그렇게 되길 바라시니 은지도 미안해하지 말고 열심히 자라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고.

다음으로 상장례 절차를 속굉(屬紘)-임종(臨終)-고복(皐復)-초혼(招魂)-사자상(使者床)-부고작성 및 발송(訃告作成 및 發送)-수시(收屍)-발상(發喪)-명정(銘旌)-반함(飯含)-염(殮)-입관(入棺)-초경~삼경(三更)-발인제(發靷祭)-천구(遷柩)-노제(路祭)-하관(下棺)-실토(實土)-반혼(返魂)-초우제(初虞祭)까지 남도의 특성에 맞춰 자막까지 넣어가며 자세히 보여준다. 요즘 보기 드문 절차들이 있었지만, 개봉된 지가 20년 전이었던 영화 속에서는 가정의례준칙 때문에 장례 절차가 무척 간소화되었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쏟아낸다.

또한, 임권택 감독은 유교가 왜 현세적인 종교인가를 준섭의 친구들의 입을 통해 설명적으로 보여준다.
살아서 효는 계율이지만 죽어서는 종교적인 개념이 된다고. 유교가 종교가 될 수 있는 이유이며 제사는 종교적 효의 형식이고 장례는 그중 가장 진지한 효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출처:영화『축제』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께 예를 갖춤 속에는 혈연이라는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신문의 부고를 보고서야 할머니의 사망 사실을 알게 된 용순이. 용순은 준섭의 이복 조카다, 용순은 가난 때문이었는지 왜 그리 미워하면서 지냈는지 모르겠다고 회상한다. 시골 초상집에 튀는 용모로 등장한 용순은 가족 간 갈등의 불씨가 된다. 취재차 내려온 준섭의 후배(정용순 粉)의 취재를 통해 회한, 상념, 원망과 그리움을 토로하는 용순과 주변 사람들. 어느새 초우재를 마치면서 단단히 엉켜있던 실타래가 한 줄 한 줄 풀려가듯이 한 가족으로서 동질성을 느끼게 된다. 확장해서 해석해보면 결국 삶이라는 공간은 나와 타자가 서로 얽히고설켜서 어울리며 살아가는 장이라는 것이며 노모의 죽음이 용서와 화해의 장을 만들어 준 것이다.

장자(莊子)가 부인이 죽었을때 곡(哭)을 하지 않고 그릇을 두둘기며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물론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장자는 근본적으로 본래 무(無)에서 시작된 삶이었기에 자연적인 현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적인 개념이다.


죽음을 치르는 의례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이다 보니 다양한 종교가 실재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한 종교의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죽음 의식은 유교식 장례에 민속신앙, 무속, 불교 의식이 자연스럽게 혼합된 모습을 보게 된다. 각각의 종교에서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주면서 죽음을 치르는 큰 줄기로 자리 잡고 있다. 

 

출처:영화『축제』


유교 사상에서 보는 죽음은 혼백(魂魄)의 분리로 본다.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보는 것이다. 죽음으로 이미 흩어진 혼백이지만 영화 속 장면에서도 나오듯이 “저승길 모시고 갈 사자님들 밥이여” 하면서 문밖에 내놓은 사자상(使者床), 저승 가서 내밀 호적초본이라며 정성껏 작성하는 명정(銘旌), 임종을 확인 후 지붕에 올라가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 죽은 이의 입에 곡식을 넣어 주는 반함(飯含), 가족들이 고인과 사연 있는 물건들을 함께 관에 넣는 일 등 죽은 자의 내세를 염려하고 기원하는 사상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시신에 대한 엄숙함과 ‘효’라는 도덕적 당위성, 현세에서 내세로의 연장, 나 아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타 종교와의 혼합성을 볼 수 있다.
불교 사상으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세상 아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본다. 인연(因緣)의 끊임없는 연결과 윤회설은 살아생전 선과 덕을 쌓을 것을 권하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거상(居喪) 중 사십구재(四十九齋)는 내세에 어떤 존재로 태어나는 것일지 결정되는 시점이기라고 믿기에 더욱 엄숙하고 진지하게 기원한다.

예로부터 문지방에 앉으면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은 “재수 없게 왜 거기 앉느냐?”이다. 또 ‘바가지 긁는다.’ ‘바가지 썼다.’ ‘바가지 깨지 마라’ 등 바가지에 빗댄 다소 부정적인 표현들이 여럿이다. 영화『축제』에서도 바가지 깨는 장면이 나온다. 발상(發喪) 장면이다. 관이 빈소를 나오면서 문지방에 엎어 놓은 바가지를 관으로 깨트린다. 이는 망자의 혼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주술적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바가지와 문지방이 그렇게 연결이 되다니 흥미롭다. 또 한 가지, 남자 상주가 오른팔을 넣지 않은 채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이 나온다. 좌단우단(左袒右袒)이라 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오른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왼팔을 입지 않는다. 이는 죄인이라는 의미와 부모를 잃은 애끊는 슬픔의 표현도 갖고 있다. 이 역시 임권택 감독이 말한 ‘장례는 가장 엄숙한 효도의 형식’으로 효를 행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출처:영화『축제』
 

삶과 죽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과 죽음, 특히 고통에 대하여 철학적, 사실적으로 잘 표현된 소설이다. 이반 일리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받아들이진 못한다. 악화해 가는 증상들, 동정받고 싶었고 보살핌과 위안, 사랑받고 싶었다. 이반 일리치는 마침내 죽는 순간에 아내와 아들의 눈물을 진심으로 느끼고 마지막 날들까지 망치고 있었던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가식에서 비로소 탈출하게 된다. 그 순간 ‘빛을 보았다.’라고 표현하고 있고, 하고 싶었던 말은 ‘용서해줘’였다. 즉 삶의 끝 지점에서 비로소 자신의 본 모습을 찾게 되었고 그 원인이 되어 준 것은 가족의 사랑이다. 영화 『축제』에서도 가족간의 갈등 해소와 관계 회복으로 막을 내린다. 역시 삶이라는 추상적인 공간에는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어우러진 관계라는 실존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도 삶의 일부이고 과정이다. 사후세계 관련 글들이 있긴 하지만 죽음 후 세계를 누가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을까? 죽어보지 않은 내가 죽음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죽음이기에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참’인 명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제자 자로(子路)의 죽음에 대한 질문에 공자(孔子)는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즉 ‘내가 삶에 대하여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답했다. 이 말은 몇 가지 의미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충실한 삶이었을 때 비로소 죽음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도 이해된다.

생명의 과정에는 벅찬 순간들이 존재한다. 병아리도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새벽을 알리는 힘찬 울음소리를 내는 닭이 될 수 있다. 한 마리 나비도 고치를 스스로 벗어야 훨훨 날아 꽃향기를 맡는다. 인간은 탯줄을 끊고 나와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죽음은 삶이라는 인생 여정에서 겪어야만 하는 어쩌면 가장 엄숙한 통과 절차며 장례는 인생의 마지막 의례이다. 죽음, 피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 은지의 생각처럼 신비롭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 그 잠재성, 사멸성(死滅性)과 필연성까지 보태져서 유한한 삶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장례는 현생의 마지막 의례이면서 가장 큰 규모의 의례이기도 하다. 영화『축제』속의 동화처럼 할머니의 지혜가 살아 숨 쉬는 삶, 그래서 이별, 애도의 절차로서만이 아닌 새 생명의 희망을 알려 주는 의례로서 재조명해본다. 공자가 말하는 충실한 삶, 이반 일리치의 삶 전체를 뒤집는 마지막 순간에의 깨달음까지 현생에서 ‘올바른 살이’였을 때 죽음은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한인경/시인·인천in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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