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인, 그러나 기다려야 할 만남
상태바
필연적인, 그러나 기다려야 할 만남
  • 최일화
  • 승인 2017.12.22 07: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시단]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은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감상노트>
 
이 시는 1991년 출간된 황지우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에서 발췌했다. 시를 처음 읽으면 화자인 <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뿐 구체적으로 기다리는 <너>가 누구인지 얼른 잡히지 않는다. 다시 읽고 또 읽으며 시를 음미할수록 이 시에 나오는 <너>의 실체가 어렴풋하게 떠오르게 된다. 그 실체는 하나가 아니다. 읽는 이에 따라서 다양한 <너>는 존재한다. 


























<나>는 언젠가 오기로 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기로 했고 필연적으로 오고야 말 것이기에 <너>를 기다리는 것이다. <너>는 애인일 수도 있고 통일일 수도 있고 민주주의일 수도 있다. 아니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일 수도 있다. 오기로 되어 있고 반드시 와야 할 <너>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아직 <너>는 오지 않은 상황. 모든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슴이 쿵쿵거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일 것만 같고, 기다리다가 지친 <나>는 이윽고 <너>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나>에게서 <너>에게 이르는 길은 거리상으로 멀고 시간상으로도 멀다. 아주 먼 거리, 오랜 세월을 <너>는 <나>에게 오고 있고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발자국소리에 가슴을 쿵쿵거리며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상황에서 시는 끝난다. 만나지 못하고 여전히 기다리는 상황에서 시가 끝난 것이다. 시 속의 기다림은 분명히 세속적인 기다림은 아니다.
 
개인적인 사랑도 숭고할 수 있지만 이 시에서 말하는 <너>와 <나>는 두 개인 간의 사랑으로만 파악하기엔 시의 흐름이 아주 유장하다. 긴 시간과 먼 공간의 설정, 이런 시공의 설정으로 보건데 개인적 사랑보다는 한 역사가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민족의 처한 상황이 좀 더 개선된 단계로 나아가는 때를 기다린다고 보는 게 옳다.
 
이루어지지 않은 민주주의가 진척된 민주주의를 기다리는 일일 수 있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를, 분단된 조국이 통일된 조국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물질만능으로만 치닫고 있는 부도덕한 사회가 인권이 우선하는 인간중심사회를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시에서 만남이 성사되지 않은 것처럼 그 모든 역시적 시대적 과제들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