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산 아래 펼쳐진, 뜨거웠던 민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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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산 아래 펼쳐진, 뜨거웠던 민족교육
  • 김주희
  • 승인 2011.02.1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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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동구 송림3·5동(20)

취재: 김주희 기자



송림교회에서 바라본 부처산 일대. 나무가 없이 높은 아파트가 주변을 둘렀고
정상에는 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니 지금은 산이 아니다.

1990년 9월11일 낮 12시40분쯤 동구 송림5동 박문여고와 선인중 사이 야산 축대가 무너졌다. 9일부터 사흘 동안 쏟아진 비로 축대가 무너지면서 무려 100여 톤에 달하는 흙더미가 순식간에 축대 아래 가옥 12채를 덮쳤다.

이 사고로 21가구 69명이 살던 동네에서 주민 절반이 매몰돼 숨졌다. 변을 당한 주민들은 대부분 공사장 인부나 시장 노점상 등 영세민이었다. 사흘간 비가 내려 일을 나가지 못해 집에 있다 참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였다. 선인재단이 학교 운동장을 만들며 절개한 땅에 축대를 쌓으면서 배수구를 설치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부터 흙이 자꾸 쏟아져 불안에 떨던 주민들이 안전대책을 요구했으나, 아무도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축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고 나서야 선인재단은 부랴부랴 학교 주변 축대에 배수구를 만들었고, 행정당국은 안전진단에 나섰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선인재단은 시립화했고 축대가 무너진 자리에는 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아랫동네도 재개발 사업으로 최근 고층아파트가 섰다. 아픈 기억은 잊혀졌다.


아파트 사이로 재개발을 기다리는 샛골(송림3동) 전경.

부처산에 올랐다. 한때 산 모양새를 갖췄던 시절, 부처산에는 일본절이 있었다. 산자락에 수많은 미인가 묘지가 있었고, 과수원과 배추밭도 있었다고 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궁현동이란 옛 지명의 유래가 된 활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이들도 박문여고 터쯤에 과녁을 놓고 선인중학교 터 정도에서 활시위를 당겼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언제 적이라고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석불 88개가 있었다"고 해서 야트막한 이 산을 사람들은 부처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토박이들은 부채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발음하기 좋아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 부처산에서 일제강점기인 1943년 9월경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학생들의 작은 울림이 있었다. 인천시사에 따르면 학생들은 부처산에서 학교 측의 차별에 저항하며 우국충정을 다짐하는 집회를 열었다. 졸업앨범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한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앨범대를 국방헌금으로 바치라고 강요하자, 그동안 쌓인 울분이 겹쳐 벌인 일이다.

당시 학생들은 송림동의 한 조선인이 경영하던 사진관에서 앨범을 제작하기에 이르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불심검문에서 갖고 있던 사진과 조선독립을 바라는 편지가 발각돼 투옥됐다.

이후 부처산에서 함께 집회를 한 조선인 학생들이 줄줄이 철창에 갇혔다. 모진 고문과 추위, 영양실조 등으로 감옥에 있던 젊은 학생들이 잇따라 죽었다. 해방과 함께 풀려난 학생들도 수년간 병치레를 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인천상업학교 역사에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된 일이다.


이제는 산이라 할 수 없는 부처산 정상에 있는 재능대학.
무선학교에서 출발해 재능대학과 대헌공고, 재능중 등이 있는 큰 학교법인으로 발전했다.

사연 많은 이 부처산에 1959년 8월15일 인천무선학교가 들어섰다.

전쟁 직후인 1954년 6월21일 재단법인 인숭학원을 세운 노진철(1921~1992)씨가 남구 학익동 허허벌판의 단층 허름한 교사를 짓고 무선학교를 열었다.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의 노진철은 1941년 중국에서 통신공학을 전공한 무선전문가였다.

인천무선학교는 무선통신과 전기 2개 과로 출발했다. 이후 무선학교는 현 위치인 부처산으로 이전했다. 그 자리에는 일본절이 있었다.

1967년 법인 명칭을 학교법인 대헌학원으로, 교명은 대헌공업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노진철은 1970년 말 현 재능대학의 전신인 대헌공업전문대학을 세웠다. 앞서 1964년에는 대헌중학교를 설립했다.

대헌학원은 재능교육이 인수해 1998년6월17일 학교법인 재능학원으로 바뀌었다. 대헌공전은 재능대학으로, 대헌중은 재능중(2010년 9월) 각각 교명이 변경됐다.

재능학원을 쭉 둘러 난 재능로를 따라 가면 새로 진 고층아파트 단지가 길게 뻗어 있다. 특히 송림1녹지를 지나 옛 선인학원 축대를 등지고 선 송림주공아파트가 나오는데, 이 자리가 1990년 큰 비로 축대가 무너져 30여명이 매몰돼 숨진 자리다.

당시 축대 붕괴 사고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위해 세운 임대아파트다. 하지만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봐도 당시 사고를 되새길 만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시 피해를 모면했던 아랫동네도 고층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엄청난 인재를 너무 쉽게 잊고 지내는 듯해 씁쓸할 뿐이다.


박문여중 교정에 성모마리아상이 서 있다.

 재능로를 계속 따르면 송림주공아파트와 송림2녹지와 맞닿은 곳, 예전에 '부처골'이라고 불렀던 곳에 박문여중고교가 나온다.

이 학교는 인천교구 천주교 재단으로 노틀담수녀회가 운영한다. 학교 이름은 논어 '박학어문'(博學於文)에서 온 것으로, 학문을 널리 배워 도에 이르는 인재를 배출하고자 하는 교육철학을 담고 있다.

박문여중·고는 "나라가 잘 되려면 여자가 배워야 한다"던 석계 장석우(1870~1941) 선생이 설립했다.

처음에는 부평 옛 경찰학교 부지에 있었다. 1940년 5월18일 현 송림초등학교에서 '인천소화고등여학교'로 개교한 뒤 그해 12월 부평에 부지를 사 학교를 세웠는데, 석계는 준공식을 3주 앞두고 숨을 거뒀다.

근대 여성 교육에 대한 열정을 품었던 석계는 1870년 2월 강화에서 태어났다.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 어린 나이에 동네 유지에게 20원을 빌려 인천으로 와, 여러 차례 실패의 쓴맛을 본 끝에 1990년대 들어 포목점 '서흥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인천 상업계의 중추적 인물로 떠오른 그는 일본 상인세력에 맞서기 위해서 정치국, 정영화, 최승우 등과 함께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를 창립해 활동하기도 했다.

석계는 쌓은 부로 부평 등지에 많은 땅을 사들였지만, 그저 돈 많은 땅 부자에 그치지 않았다. 3남 광순의 권유로 소화고등여학교를 세웠다는 설도 있는데, 석계는 훨씬 이전부터 영화학교(현 영화초등학교) 교육위원으로 참여해 재정을 지원했고 1940년에는 부평보통학교(현 부평초등학교)에 부지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산중·고등학교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할 때도 관여했다고 인천시사가 전하듯, 석계는 번 돈을 육영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예전에 샛골이라 불렀던 송림3동.
부자가 많이 살았다던 이 곳 역시 개발조합이 설립돼 있다.

설립 당시 이 학교의 재단 이사장은 나가이란 일본인이었다. 이사진에도 석계와 그의 삼남 광순, 그리고 아베와 사토오 등 일본인 2명이 포함됐다. 초대 교장 또한 일본인 다카마쓰였다.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을 획책하던 일제의 억압에, 근대 여성 교육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석계의 고육지책이었을 터. 일제의 압력으로 학생 수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을 6대4로 해야 했고, 학교 위치도 부평조병창 인근으로 잡아야 했다. 무엇보다 '소화'(昭和)란 일본 천황의 연호를 학교명에 써야 했으니 당시 석계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게다.

1944년 3월 첫 졸업생 104명을 배출한 소화고등여학교는, 이듬해 4월 일본 육군이 야전병원으로 쓰기 위해서 교사를 징발해 항동 9번지 조선식량영단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해 8월15일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재단 이사장이었던 석계의 삼남 광순이 학교를 천주교 서울교구 재단에 기증했다. 이때 교명이 박문여자중학교로 바뀌었다.

이후 이어진 미군정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박문여중은 8번이나 이사를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부평의 학교를 경기도 경찰국이 사용해 1956년 8월30일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게 됐다.

현 박문여고 본관 건물에는 석계 장석우 선생의 흉상이 서 있다. 석계의 열정이 '건강하고 명랑한 여성, 슬기롭고 지혜로운 여성,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여성'이 박문여중고의 교육이념이다.


1947년 동산중학교 신축공사 현장에서 최승우 이사장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동산중학교)

석계뿐만 아니다. 인천의 민족 자본가들은 인재 양성에 큰 힘을 들였다.

박문여중·고 인근, 동산로를 끼고 넓게 자리한 동산중·고교 역시 민족 자본가들의 열정에 지역 유지들의 힘이 더해져 맺은 결실이다.

박문여중·고 설립자인 석계와 함께 당시 인천의 10대 부호고 꼽히던 정미업계 3인방 이흥선·유군성씨, 맑은 청주로 부를 축적한 최승우씨 등이 의기투합해 1938년 7월14일 동산중·고교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를 세웠다.

인천상업전수학교에는 이밖에도 유도를 인천에 보급한 유창호씨, 인천부의원을 지낸 김윤복·김종섭씨, 그리고 종교인 김영배씨, 언론인 이동오·최진하씨 등이 관여했다.

원래 유창호씨의 무도관에서 문을 열 때는 인천상업전수학원이었다가, 최승우씨가 현 위치의 부지를 내놓으며 상업전수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흥선씨는 경기도 김포 태생으로 일본인 미두거래소에서 번 돈 1천환을 자본금으로 해 1918년 유동에 세운 정미소를 기반으로 성장해 석유와 곡물업 등으로 큰 부를 쌓았다.

우현 고유섭 선생의 장인으로 당시 문예운동단체인 이우구락부를 후원하고 대중일보 창간을 도운 인물이다. 동명초등학교 전신인 관서학원과도 인연이 닿는다.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관서학원이 갈 곳을 잃자 부평의 부농 박백순이 500원에 이흥선의 정미소 창고를 사 교사로 쓴 것이다.

이흥선씨와 함께 3대 정미업자로 이름을 날린 유군성씨는 강화 태생으로 10여 세 때 인천으로 와 사동(沙洞)에 자리를 잡고 제재소와 정미소를 경영해 갑부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부호이자 자선가로서 꼽히는 인물이다. 고일의 인천석금은 "인천 부호 중에 빈곤층에게 최대의 경의를 받았던 인물"로 그를 기록하고 있다. 쌀을 훔친 선미 여공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 오히려 땔나무와 양식을 보냈다거나, 모친의 생일잔치에 걸인을 불러 배를 채우게 했다는 미담이 전해온다.

화재와 미두 실패로 만년은 궁핍했지만, 사업소 문을 내릴 때도 재산을 자식뿐 아니라 종업원들에게도 골고루 분배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동산중 교정에 이 학교 출신으로 광저우아시안게임 야구 금메달의 주역인
류현진과 송은범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현 동산중·고교의 부지를 내놓은 인물이 최승우씨다. 그는 현 학교법인 동산육영회의 전신인 재단법인 인천실업학원에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941년 당시 41만원에 달하는 재산과 27만평에 달하는 토지 등을 기증했다.

객주업으로 부자가 된 그는 대동양조조합을 세워 조선 약주를 일본 청주처럼 맑게 만들어 병술로 대량 생산해 유명했다. '대동 소주'로도 상당한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흥업주식회사를 차려 금전대부업도 한 것으로 전해온다. 모친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있다고 하지만, 명예욕과 배금주의자란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어찌됐든 그가 기증한 돈과 토지가 지금의 동산중·고교를 있게 한 근간임은 사실이다.

이 학교의 법인 동산육영회는 얼마 전 내부 갈등을 겪기도 했고, 2008년에는 송도 이전설로 언론에 회자되기도 했다.

청룡기 3연패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동산고는 국보급 투수 류현진을 비롯해 신인식, 금광옥, 허운, 장광호, 정민태, 위재영, 송지만, 전준호, 심재운, 정상호, 송은범 등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야구 명문이기도 하다.


1953년경 서림초등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 보충대의 모습을 담은 사진.
막사 뒷편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수도국산이다.(사진=blog.naver.com/kkkk8155)


역시 1953년경 촬영한 서림학교 본관의 옛 모습. (사진=blog.naver.com/kkkk8155)

동산고 인근 서림초등학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한창이던 1939년 4월15일 송림제2심상소학교로 개교했다. 1945년 3월 서림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65년에 서흥초등학교가, 다시 1967년에는 서화초등학교가 분리돼 나갔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동산중학교 부지와 서림초등학교를 징발해 사용했다. 서림초에 있던 미군 보충대는 1950년대 말까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 있던 미군이 미국으로 되돌아가거나, 새로 한국으로 들어올 때 거쳤던 곳이다. 토박이들은 보급 물자가 많이 있어 주변에 살던 아이들이 몰래 담장을 넘어 모포나 군복, 군화 등을 훔쳐 내다 팔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서림초 학생들은 이 부대가 떠나기 전까지 옛 동부경찰서 부지에 있던 간장공장에서 수업을 받는 신세가 됐다.


미군이 떠나고 반세기가 흐른 지금 평화로운 서림초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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