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한 대로 모두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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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한 대로 모두 이루소서~
  • 김주희
  • 승인 2011.03.1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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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숭의2,4동(22)
취재: 김주희 기자


물이 많아 여의실이라 하기도 했고, 여우가 많아 여우실이라고도 했다던 숭의동 일대를
수봉공원 인천문화회관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했다.

지나는 사람 없이 조용하던 동네가 일순간 왁자지껄 시끄럽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교문 밖으로 몰려나오더니 문방구며 분식집이 순식간에 번잡하다.

저보다 키 큰 여자아이에 쫓겨 다니던 남자아이가 금세 덜미를 잡혀 넘어지고, 제 입에 하나씩 먹을거리를 문 아이들이 별일 아니라는 듯 그 옆을 스쳐 지난다.

계집아이 두셋이 잘못하면 부서질까 '달고나'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리고, 사내아이는 등 뒤에서 솜사탕을 한 움큼 입에 물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예전과 다르다 한다면 정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가 더 많이 늘고, 아이들을 모아 태워갈 학원 봉고차가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더해졌을 뿐이다.


학교가 끝나자 아이들이 숭의초등학교 앞에서 '달고나'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한 채
주변을 빙빙 맴돌고 있다. 어린시절 누구나 경험했던 일이리라.

 인천시에 따르면 숭의동은 구한말까지 인천부 다소면의 장사래말이라 했던 곳이다.

길고 구불구불 이어진 개천이 있어 붙은 이름인데, 1903년 장천리(長川里)로 바뀌었다. 1906년 이 장천리가 다시 여의리, 장천리, 독각리로 나뉜 뒤에 1914년 부천군에 편입돼 합쳐지면서 장천리와 여의리에서 한 자씩 따와 '장의리'가 됐다. 1936년 다시 인천부에 편입됐다.

지금의 숭의동이란 동명은 1946년 1월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당시 광복을 경축하면서 '옛 신령들을 숭상해 뜻을 이루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지명 어디에서도 지역의 정체성을 알 만한 게 하나도 없다. 그런 지명이 어데 한둘이겠는가.

어찌됐든 길 따라 발걸음을 옮겨야 하니 출발점을 잡아야 했다. 일단 남구를 책임지고 있는 남구청사로 향했다. 여기서 수봉공원까지 길을 잡아가기로 했다.

숭의2동 독정이로 95번 길에 있는 남구청사는 경인교대가 1990년 7월 계양구 계산동으로 이전하기까지 40여 년간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경인교대나 남구청사 모두 600년 가까이 지켜왔던 인천의 한 명가(名家)와 인연이 꽤 깊다.

예전 지금의 숭의2동 일대를 여의실(如意室)이라고 했다.

지역 토박이들에게는 오히려 '여우실'로 더 익숙한 이곳에서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진 경주 김씨 균의 손자 종이 문중의 터를 닦았다. 그의 부친은 계림군의 맏아들 희경공(僖敬公) 맹성이다.

조선 개국 공신 계림군은 공신책록과 함께 사패지(賜牌地)로 여의실과 물우산(勿右山·현 남동소방서 일대) 등지를 내려 받았고, 이런 이유로 김종이 여의실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물우산과 현 동막 일대 등지에는 종중의 선영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구역정리사업에 따라 시흥시 미산동으로 이전하게 됐다.

조선조 중기까지 희경공의 후예들은 중앙 정계에 꾸준히 진출했다. 번성기에는 여의실에서 장사래에 이르기까지 동성촌락이 형성돼 130여 가구나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가세가 기울어 조선후기에는 사족의 면모를 지키며 선영과 선대의 토지를 지키며 살았다고 전해온다.

그러다 1883년 인천항 개항으로 이들 문중은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맞았다. 가산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육에 힘을 쏟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분야에서 지역사회에 기여한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특히 초대 인천시 교육위원을 지낸 김경하, 인천상공회의소 부회장이던 중하, 11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은하, 지역 언론인이자 향토사가로 활동한 상하 등 4형제의 이름이 높다.

이 중 셋째 은하씨는 남구를 기반으로 국회에 진출해 6선을 지낸 인천지역 최다선 국회의원이다. 박정희 정권시절 야당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독재정권을 맞아 치열한 삶을 살았다.

둘째인 중하씨는 대한연공업(주)을 경영하며 주안의 중앙도자기회사 등 우리나라 비철금속을 이끌어온 기업인이다.

교육위원을 지낸 맏형 경하씨는 음양으로 숭의초등학교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6·25 한국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경기도립개성사범학교를 인천으로 유치하기 위해서 한동안 밭으로 쓰던 선영의 땅을 무상으로 내놓기까지 했다.


인천지역 명문가의 종가터에는 지금 남구청사가 들어서 있다.
앞서 이 자리에는 인천교대(현 경인교대)가 있었다. 청사 외관은 여전히 교육기관 그 자체다.

개성사범학교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개교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9월1일 피난지인 부산시 괴정동에 3개의 천막을 치고 춘천사범학교와 함께 연합사범학교를 열었다.

그러다가 1952년 4월에 인천신흥초등학교 현관을 빌려 학생을 모집한 뒤 곧바로 숭의초등학교로 이전하게 됐다.

인천시사에 따르면 당시 전황으로는 개성이 수복되기 어려운 데다, 현 전선에서 휴전될 가능성이 짙어 개성사범학교는 인천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초등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사범학교의 설립 목적을 따져도 인천이 개성보다 지리적 이점 등이 좋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52년 6월28일 개성사범학교는 교명을 국립인천사범학교로 바꾸어 인천에 정착했다.

이듬해 인천시가 숭의동 203번지 현 남구청사 부지를 내놓아 6개 교실을 준공하게 되는데, 이 부지가 경주 김씨 경하씨가 무상으로 희사한 땅이다.

1957년 인천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가 개교했다. 이후 1962년 들어 인천사범학교는 2년제 초급대학인 인천교육대학으로 승격됐다가, 20년 후인 1982년 4년제 대학이 됐다.

인천교대는 계양구로 이전을 결정하고 1986년 6월 계양구 계산동에서 신캠퍼스 기공식을 치렀다. 공사는 4년 만에 마무리됐고, 인천교대는 숭의동 시대를 마감하게 됐다.

어린 시절 숭의동에 살았던 시인 김윤식씨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병설중학교 동쪽 끝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고 김은하 의원 문중 사당이 돌출한 흙 언덕에 이색적인 풍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범학교의 남쪽은 대부분 밭이어서 하교하는 길에 무를 뽑아 먹거나 마른 농사용 인분 구덩이에서 두꺼비를 잡곤 하던 추억도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경주 김씨 문중과 인연이 깊은 인천교대는 숭의동을 떠난 뒤 2003년 경기도까지 학교의 관할을 넓혀 경인교육대학으로 교명이 또 바꾸었다.

그런데 최근에 통폐합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국립화하는 인천대와 통합 얘기가 솔솔 나오더니, 얼마 전부터 서울대 사범대와 합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대학 신입생이 주는 것은 물론, 이들이 가르치게 될 학생수도 줄어드는 추세라 학교 존폐 여부까지 논의되는 것이다. 대학 당국은 물론 학생, 동문회 사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인천교대 터에 자리한 인천시청소년회관 전경.

경인교대가 떠난 자리는 남구청사가 들어서게 됐다. 1991년 4월11일이다.

그리고 2004년 9월14일 구청사 본관동 옆 종합민원실 앞 화단에 조그만 표지석이 선다.

'인천 여우실 경주 김씨 종가터'를 알리는 표지석이었다.

김윤식 시인의 기억에서처럼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 곳은 경주 김씨 종가와 사당이 있던 곳이다. 그 자리에 1996년 남구청 종합민원실이 들어섰다.

당시 희경공파 자손들은 이 건물을 시지정문화재로 등록할까도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건축물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고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크지 않아 포기한 것이다. 재산세 부담이 컸던 터라 헐기로 했는데, 마침 청사 증축을 추진하던 남구가 이 부지를 매입했다.

종합민원실 앞 표지석은 바로 이런 경주 김씨 여의실 문중의 흔적을 남기려고 세운 것이다.

그런데 표지석의 제목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여의실로 통상 알려진 지명을 '여우실'이라 한 것이다.

사실 앞서 지적했듯 숭의동 토박이들에게는 여의실보다는 여우실이 더 익숙하다.

이 지명의 유래도 좀처럼 확정하기 어렵다.

여의실을 발음하기 편하게 여우실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는가하면, 수봉산(현 수봉공원)자락에 사찰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여의실로 불렀다는 설까지 있다.

혹은 여울이 있는 골짜기 정도로 풀어 물이 많아 '여울'을 이룬 마을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토박이들 말을 빌리면 수봉산 자락에서 흐르던 맑은 내가 있어, 여의실 지명이 '물'과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물이 풍성하니 논농사가 잘 됐다고 했다.

현 남구청사 일대 주택가는 예전에 미나리 밭이나 논, 독쟁이로를 따라 용현시장으로 가는 오르막길은 과수원 등이 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현 남구청사 앞에 배나무 밭이 많았다고 하는데, 동네 꼬마들도 시대를 알았던지 일본인 과수원에서만 서리질을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남구 종합민원실 앞 화단에 이 자리가 여우실 경주 김씨 종가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자표기 '如意'가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짐'을 뜻하듯, 경주 김씨 희경공파 후손들이 이 터에 보금자리를 잡을 때 '부귀복락'을 빌며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여의실에 자리한 남구가 2002년 청사 이전을 세워 추진했다. 각 동이 청사 유치전에 뛰어들어 갈등이 일었다. 고민 끝에 지난해 3월 현 청사를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했다. 1652억 원에 달하는 사업비 부담이 컸다. 잘한 결정이다 싶고, 앞으로 죽 '여의'란 뜻대로 되길 기원한다.

본디 내친 걸음은 공원화한 주인선을 따라 숭의4동을 가로질러 수봉공원까지였다. 하나 여의실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푸는 바람에 할 이야기를 이번 주에 다 담을 수 없게 됐다.

다음 주에 입영열차가 출발했던 남부역과 군사목적으로 개설된 주인선, 장년층의 기억에 남아있는 와룡소주, 그리고 수봉산 등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계속)


남구 숭의동을 가로질러 난 주인선은 철로를 걷어내고 공원으로 조성됐다.
미군의 군용화물열차가 다니던 길은 이제 주민들의 산책로이자 아이들의 등하굣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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