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그릇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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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그릇장
  • 정민나
  • 승인 2020.01.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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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그릇장 - 최병관

 

 

 

아내의 그릇장

 

                                  -  최병관

 

거실 한 켠 자랑스럽게

서 있는 우리 집

그릇 왕궁

 

지체 높으신 왕족만

모시는 곳이라

나보다 키도 크고

아내의 보살핌도 각별하다

 

키 작은 아내가

전하를 우러러 받드는 것은

자신을 더욱 빛내주기 때문이다

 

왕족만을 고집하는

아내 때문에

나는 간혹 목욕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릇 왕궁은 지체가 높아

손님상을 들일 때면

근엄하게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

 

우리 집

손님상은 언제나

왕을 부리는 황상이 되고

 

손님이 가고나면

아내의 그릇장도

함께 닫혀

 

내가 받는 밥상은

항상이 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거실 한 켠에는 그릇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특별한 날에 쓰이는 예쁘고 고급스러운 그릇들만 그 곳에 보관 되었고 평소에 쓰는 일상의 그릇들은 가까운 싱크대 바로 위나 아래에 달린 선반이나 서랍에 넣어 두었다.

 

하지만 새 그릇이 나오면 그 전에 사용하던 멀쩡한 그릇들을 이웃이나 지인들에게 분양하고 새로운 모양의 그릇을 사 모으는 친구도 있다. 옷이나 악세서리처럼 그릇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더러는 빈티지 컬렉터들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야기가 있는 오래된 놋그릇이나 동전, 새우젓 항아리, 우표, 열쇠고리 같은 것을 모으는 친구도 있다.

 

나 역시 낯선 곳에 가면 엽서를 사 모으는 취미가 있다. 누군가에게 사연을 적어 부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곳의 이미지를 모아 오는 것이다. 그 엽서의 이미지를 오래 두고 볼 때마다 내가 경험한 그 곳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예민 보스로 알려진 팝핀 현준이 그의 어머니가 무릎 관절로 애를 먹자 도맡아 하던 살림을 줄이라고 옥상에 간직해 온 오래된 그녀의 물건들을 처분하였다. 살림살이를 줄여 어머니가 좀 더 편안하게 생활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음먹고 실행한 것인데 옛 물건들에 대해 애착이 깊었던 어머니는 내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요즈음 나의 지인은 냉장고를 열 때마다 슬픔에 잠긴다. 그녀의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양파 절임이나 시래기, 무말랭이, 딸기, 포도로 만든 각종 잼들은 사랑의 색깔과 냄새, 문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니 더 깊은 존재감으로 그녀 곁에 머물고 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지만 어떤 사정이나 이유가 없는 물건도 드물다. 물건마다 나름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물건에 담긴 기억과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이 된다. 나의 남편은 35년 전 예물로 받은 시계가 아직도 잘 가고 있다고 오래된 시계를 꺼내 가끔 헝겊으로 정성스럽게 닦는다. 때론 그 시계를 차고 외출하기도 한다. 그 때가 바로 일찍이 돌아가신 장모님을 떠올리는 때이다. 그는 또 젊었을 때 사고로 죽은 형이 남긴 카메라를 오랫동안 간직해 오기도 했다. 어린 조카가 장성하여 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되자 형의 카메라를 꺼내 흔쾌히 건네주었다. 그 때 나는 그의 눈에서 글썽거리는 눈물을 보았다.

 

위의 시 아내의 그릇장에서 아내가 각별하게 보살펴온 그릇들은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가족의 역사와 사연을 오롯이 담고 있는 물건들이다. 그러하니 그 그릇들은 지체 높으신 왕족만큼 그녀에겐 소중한 것이다. 지은이는 그 사실을 알면서 짐짓 모르는 척 그릇장을 지체 높은 그릇 왕궁이라 빈정거린다. 그는 눙치듯이 서운해 하지만 손님상을 들일 때면 그릇 왕궁이 근엄하게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릇장이 곧 아내임을 에둘러 드러낸다. 이 한 대목에서 아내의 취향, 아내의 이미지, 아내의 존재가지를 인정하는 그를 발견한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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