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환경, 그리고 생태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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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환경, 그리고 생태철학
  • 박병상
  • 승인 2011.05.20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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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 칼럼] 박병상 /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많은 사람들이 환경이 전에 없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언제 좋았다는 거지? 지구온난화와 오존층 파괴를 몰랐고 물과 공기가 맑았다는 1960년대? 자동차가 드물고 에어컨도 몰랐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라면 몇이나 순순히 응할까. 환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구는 시방 죽었나? 아니, 죽어가기라도 하나? 지구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겐가. 잔뜩 겁을 주던 어떤 환경운동가는 고작 집안의 전구를 바꾸란다.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라 하고, 어떤 이는 제철 제고장의 유기농으로 채식을 하란다. 위기의 지구를 살리는 일, 그 정도면 충분한가.

가만히 보면, 발전된 나라일수록 환경도 좋은 것 같다. 미국만 해도 잘 사는 지역이 그렇지 못한 지역보다 나무도 많고 거리가 깨끗한 게, 분명히 환경이 좋아 보인다. 아프리카나 남아시아를 생각해 보라.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해 반나절을 걸어야 하는 지역 국가의 경우 자국민에 내줄 먹을거리도 모자라고 의약품이 부족해 평균수명이 짧다. 자동차나 공장이 없는 만큼 공기는 깨끗해 보이지만 우리나라 시민들은 그런 나라에 가서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자동차와 공장이 넘치는 유럽의 공기도 깨끗하다. 그렇다면 환경을 외칠 게 아니라 우리도 발전을 위해 경제부터 성장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부자나라의 시민들도 먹고살 만하니 환경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거의 다가갔다 해도 아직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우리는 그저 꾹 참고 경제를 어느 정도 성장시킨 뒤, 벌어들인 돈으로 환경을 보호하면 안 될까. 뭐 그렇다고 공장굴뚝에서 시커먼 연기를 마냥 내뿜자는 건 아니다. 비 내리는 날 폐수를 콸콸 내보내자는 것도 아니다. 자본에 여유가 있다면 지금처럼 사람이 개발한 기술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니 활용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자동차를 타고 고기를 먹는 행동을 반환경의 표본인 양 몰지 않길 바란다. 경제 성장을 위한다면 어차피 공장을 돌려야 하고, 특별한 식당에서 바이어도 만나야 한다. 지구온난화가 걱정이라지만, 화석연료와 고기는 어느 정도 양해해야 한다. 지구는 자정능력이 뛰어나다 하니까.

환경이 좋아 보이는 국가에는 환경단체뿐 아니라 환경관련 학과가 대학에 있고 정부에 전담 부서도 있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환경단체나 어떤 지식인들은 환경이 점점 악화된다고 땅이 꺼져라 걱정한다. 제비가 드물어졌고 고래들이 멸종위기라 한다. 갯벌과 숲과 강이 망가져 생물다양성이 그제 위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물론 사라지는 것보다 공존하는 게 낫지만 그렇다고 호랑이나 늑대와 한 동네에서 살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자연이 망가지는 건 아쉽지만 발전을 위해 어느 정도는 참아야 한다. 생태계를 일부 개발한다고 아주 멸종하는 건 아닐 테고, 전보다 잘 먹고, 입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런가?

내년 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니 올 가을이면 온 나라가 총선 분위기에 휩싸일 텐데, 많은 선량 후보들이 거리에 뿌릴 명함마다 무슨 환경단체 임원이나 회원임을 과시할 게 틀림없다. 아무래도 환경에 관심이 있는 후보가 그렇지 않은 후보보다 유권자의 지지를 더 받을 테니까. 한데 한때 공해를 추방하자던 어떤 사람들이 지금은 단순한 환경운동이 아니라 생태운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태운동은 생태계 보전운동인가. 더욱 선명해진 환경운동인가. 선량 후보들의 명함에 생태운동가라는 직함이 더 인쇄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환경운동가들이 말하는 ‘환경’은 무엇이고 ‘생태’는 무엇인가.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대학의 환경관련 학과와 환경부는 대체로 수질, 대기, 폐기물, 소음과 진동, 그리고 영향평가에 대부분의 역량을 쏟는다. 이미 벌어진 환경오염을 해결하겠다는 기술의 분야로, 경직성을 제외한 환경부 예산의 95퍼센트가 그 분야에 집중되고, 인력의 거의 대부분이 그런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대학도 같은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데 진력할 수밖에. 전국 4년제 종합대학마다 개설된 환경관련 학과에서 배출하는 인재가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30년 이상 그 방면의 인재를 배출했으니 지금 우리 사회는 한 세대 전보다 환경이 나아져야 당연한데, 그리 확신하기 어렵다. 강물이 맑아졌다고 하나 옛날처럼 투명한 건 아니다. 대기도 폐기물도 소음과 진동도 마찬가지다. 영향평가는 투명한가.

환경 기술은 말초적이다. 쓰레기 발생을 줄이는 게 아니라 나온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관에 들어오는 물을 정화하는 게 아니라 관 끝에서 배출되는 물을 정화해 내보내면서 배출허용 기준치를 만족시키는데, 동물 실험으로 얻은 기준치는 경향을 나타낼 뿐 사람이나 환경의 안전을 책임지는 건 아니다. 경제 상황에 따른 규제완화로 오르내리는 기준치 이하를 어떤 오염물질이 만족해도 마음 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둘 이상의 오염물질이 환경에서 만나면 독성이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인데, 환경에 노출된 독성물질은 대단히 많다. 또한 그런 상승효과를 사전에 파악하고 규제할 환경기술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환경기술은 개별적이다. 기준치를 지키는 한, 시시비비를 가릴 자격은 누구도 갖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환경에 교육과 투자와 교통도 포함된다. 이른바 일류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학원이 많은 동네가 ‘교육환경’이 좋다고 학부모가 믿고, 서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네의 ‘교통환경’이 좋다고 부동산 업자가 광고한다. 회전하는 돈이 많을 때 ‘투자환경’이 좋다고 투기꾼이 자랑하겠지. 그때 사용하는 환경은 남을 철저히 배제하는 ‘나’, 다시 말해 내가 그 중심에 있다. “나를 위한 환경”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수질, 대기, 소음과 진동, 폐기물, 그리고 영향평가도 비슷하다. 남보다 나, 우리보다 개인을 우선 배려한다. 수돗물이 오염되면 정수기로 해결하고 공기는 정화기로, 폐기물은 매립장과 소각장으로 해결한다.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추우면 보일러 스위치를 높인다.

석유위기를 점치는 이가 점점 늘어난다. 그를 반영하는지 올라간 기름 값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에 대비해 석유 시추와 채굴에 자본을 투자하고 비축량을 늘리는 대책에는 한계가 있다. 온실가스 배출까지 줄어드는 건 더욱 아니다. 미국은 자국의 잉여 농산물로 바이오연료를 개발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굶주려야 하는 지역의 인구는 늘어나기만 한다. 온실가스를 줄이려고 핵에너지를 확대하는 것도 걱정거리다. 연료를 채굴, 정제, 운송, 사용 후 폐기할 때까지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적지 않지만 문제는 사용 후 남는 폐기물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식량생산이 들쭉날쭉하고 질병이 늘어나자 생명공학에 해결책을 내놓지만 생명안전과 윤리의 문제는 심각해지기만 한다.

안정된 생태계는 다양한 생물종이 어우러질 뿐 아니라 한 생물종 안에도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집단을 이룬다. 땅 속과 지표에도 수많은 동식물과 미생물이 분포하고 그 위의 숲에도 크고 작은 나무와 온갖 새들이 다채롭게 서식한다. 고라니라 해서 모두 판에 박은 듯 똑같은 게 아니다. 어떤 녀석은 동작이 재빨라 천적의 공격을 쉽게 피하지만 어떤 녀석은 번식을 서둘러 배우자를 먼저 거느릴지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키가 크거나 작다. 언어에 강한 학생이 반드시 수학문제를 잘 푸는 게 아니다. 농구를 잘하므로 바둑 실력이 빼어난 게 아니듯, 노래 잘 부르는 이가 피겨스케이트 못 탄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안정된 사회에서 모든 개성은 그 개성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에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 개성이 어울리지 않는 조건에서 특별한 개성은 부담을 줄 따름이다. 중국음식점에 왔다면 스테이크를 주문하지 않아야 한다.

인터넷으로 고속전철을 예약하면 편할 텐데 굳이 추석에 승용차를 몰고 고향에 가는 이가 있었다. 혼자 사는 그는 부모가 담아주는 온갖 곡식과 과일을 잔뜩 실어와야 한다고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재배하는 농작물이 녹색혁명으로 단순해지기 이전의 우리 농촌은 가을이면 수확물이 다양했다. 감꽃이 필 때 심는 콩이 있고 질 때 심는 콩이 있다. 그늘에 심는 씨앗과 양지바른 땅에 심는 씨앗이 달랐다. 그래서 홍수나 가뭄으로 개개 농작물의 수확은 변해도 대체로 한해 먹을 농작물은 엇비슷하게 거두었고, 남는 건 시장에서 다른 지역에서 나온 농작물과 바꿀 수 있었다. 산촌은 들녘과 생산되는 농작물이 달랐고, 어촌은 물고기와 농작물을 교환하며 그럭저럭 살 수 있었는데 식구와 자급자족하던 다품종 소량생산에서 돈벌이를 위한 소품종 다량생산으로 바뀐 지금은 아니다. 기업에서 구입한 다수확 품종의 씨앗은 ‘모 아니면 도’다.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대단히 협소한 그 씨앗에 맞춰 경작환경을 바꿔야 했지만 뜻밖의 기상이변은 한해 농사를 망치게 한다. 지금 많은 농촌은 찾아오는 자식에게 내줄 농작물이 없다.

생태계는 얼핏 일방적이다. 늑대가 순록을 잡아먹지 순록이 늑대를 괴롭히지 못하는데, 사실 늑대와 순록은 공생관계다. 워낙에 빠른 순록은 늑대를 본척만척한다. 다만 늑대는 늙거나 다치거나 병든 순록을 솎아낼 뿐이고, 덕분에 순록은 환경 적응력을 유지하게 된다. 수많은 생물종과 다채로운 유전자를 가진 생물체들이 어우러지는 생태계는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평등하게 안정적으로 순환한다. 순환과 다양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생태계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적응과 도태라는 과정으로 서로 도우며 38억년 이상을 존재해왔고 그 덕분에 사람도 세상에 진화돼 나올 수 있었다.

내가 그 중심에 있는 것이 환경이라면 생태는 ‘우리’가 그 중심에 있다. 우리에는 나는 물론이고 내가 있기까지 기여한 부모와 조상이 포함될 것이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 행복과 관련된 이웃, 문화와 전통, 아름다운 경관과 생태계의 다채로운 생명가치들이 모두 우리에 들어간다. 깊어가는 가을, 노을에 물든 광활한 갯벌과 창공에 브이 자를 그리며 끼룩 끼룩 연신 날아오는 기러기 떼를 보며 감격에 겨울 수 있는 행복은 나눌수록 기쁘다. 조상이 그렇게 물려주었듯 후손에게 온전히 넘겨주어야 한다. 당대의 행복은 선조에서 후손에게 이어지듯, ‘우리’에 장소는 물론이고 시대 구별도 없다. 생태에는 그 ‘우리’가 중심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 누구도, 어떤 시대와 문화와 전통과 역사에도, 우열은 없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종이 사라진다면 다른 많은 종이 위기를 맞는다. 따라서 생태계는 많은 종과 개체들이 서로 돕는다. 배려하는 거다. 생태사회도 그렇다. 다양한 의견이 존중될 때 건강하다. 생태계에서 ‘다양성’은 사회에서 ‘개성’이 되고, 생태계에서 ‘순환’은 사회에서 ‘배려’로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한 ‘생태사회’는 “개성이 배려되는 사회”가 된다. 키가 크든 작든, 술을 잘 마시든 그렇지 않든, 종교와 정파, 나이와 학력, 피부색이나 인종, 돈이 많든 적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사회가 생태사회다.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는 제국주의 시대 철학이다. 총과 균과 쇠를 먼저 쥔 자가 그렇지 않는 자를 당연한 듯 지배하며 착취했고,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이 약탈되고 기름진 농토를 빼앗겨 굶주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많은 불행이 잉태되었고 환경은 불안해졌다. 우승열패라는 불안한 사회에서 경쟁은 불가항력이다. 경쟁에 이기는 개성만이 간택되기에 획일적으로 길들어지는 개성에 서열이 정해지고, 그로 인해 위화감과 질시는 반목과 적대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불안을 조장하며 유지되는 우리의 교육환경, 투자환경, 교통환경이 그렇다. 수질, 대기, 소음과 진동, 그리고 영향평가에 그런 측면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개성을 배려하는 사회가 생태사회라면 생태교육과 생태정치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의고사 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학교, 대학입시 결과로 학교를 줄 세우는 교육이 아니라 학생과 학교의 개성을 배려하는 교육이라면 생태교육이다. 지금처럼 당권을 쥔 자가 교조적으로 결정한 당론에 따라 싫든 좋든 멱살 잡고 고함치는 정치가 아니라 지역의 세 살부터 여든 살까지, 당대 유권자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 유권자의 권리를 헤아려 충분히 논의한 뒤, 민주적인 합의로 의사를 결정하는 정치라면 생태정치가 된다. 생태토목과 생태건축은 불가능할까.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지역과 시대에 따른 개성을 존중하는 토목과 건축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라고 해서 경쟁에 의한 신자유주의 물결에 굴복해야 하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일찍이 칼 폴라니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돈으로 평가하지 않는 거래가 일반화되었다고 말했다. 길을 묻거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대가를 바라는 이는 지금도 거의 없다.

개성을 배려하는 개념이 ‘생태’라고 해서 ‘환경’이 나만 위해 남을 희생시킨다는 개념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나 또는 특정한 세력의 이익을 위한 개발로 발생된 오염을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편향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잘 사는 지역의 깨끗한 환경의 대가로 가난한 지역에 희생이 강요되는 현실, 현 세대의 흥청거리는 전기 소비를 위해 후손에게 감당할 수 없는 핵폐기물을 넘기며 청정이라 운운하는 행위는 생태와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공해’와 ‘환경’이라는 용어를 넘어 요즘 ‘생태’라는 용어도 남발되고 오염되고 있지만, 생태철학은 나보다, 남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사상이라는 걸 주목하자.

생태철학은 관 끝을 말초적으로 주목하지 않는다. 자동차의 편의를 놓치기 싫어 전기자동차를 개발하면서 핵발전소를 늘리려는 의지, 석유자원을 펑펑 쓰며 재배한 유전자조작 옥수수를 바이오디젤로 바꿔 굶주리는 지역에 폭동을 유발하는 행태와 달리, 아예 자동차 없는 사회를 도모하는 편을 택한다. 가능한 대로 원천적이고 근본적으로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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