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오늘도 인천지역 방송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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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오늘도 인천지역 방송 역사의 현장
  • 김주희
  • 승인 2011.05.23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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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학익동(上-27)

취재: 김주희 기자

남구 학익동 한나루로 노적어린이공원 인근에서 바라본 OCI 인천공장.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마을 이름이 학익동(鶴翼洞).

뭇 남성들에게는 속칭 '끽동'으로 더 친숙(?)할지언정, 연경산 아랫마을 학익동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서 깊은 동네다.

조선시대 덕망 있는 학자가 있어 이름난 곳이었고, 예전부터 인재를 키우던 곳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고, 멀리 떠나보내는 이를 마중하던 고개가 또 있었다.

법(法)의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기도 하고, 죄지은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바꾸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의 유일한 지상파 방송국과 인천의 교통을 꿰뚫는 방송국이 자리잡은 것은 물론,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에 방송을 송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남구 학익동 경인방송 사옥과 해안도로 옆에 새롭게 조성한 친수공간.

학익동의 지명 유래에는 논란이 있다.

문학산과 그 줄기인 연경산을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해서 학익동이 됐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진 유래다.

문학산을 학산이라고 하고, 연경산을 학익산이라고 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하나 그 지형이 지명 유래와 같다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오히려 옥골사거리 인근 '조개고개'를 근거로 조개가 많이 난 곳이라 '합골'이라 불렀던 게 '햇골' 또는 '핵굴'로 변했다가 '학산'으로 됐다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해석은 학익의 '학'이 우리말 '둠', 또는 '두름'에서 왔다는 설이다. 이 말은 '주변을 빙 둘러싸다'란 뜻의 '두르다'(두루다)의 명사형으로, 산 같은 것을 가리킬 때 많이 쓰였다.

여기서 '두름'이 새 '두루미'와 발음이 비슷해 산 이름을 '두루미산'이라 잘못 여겨 한자로 '학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날개'가 붙어 '학익동', '학익산'으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학익동의 지명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많아 뭐라 단정 짓기 어렵다. 여하튼 학익동은 1903년 학익리로 됐다가 1946년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했다.

 

OCI가 직원 숙소로 사용하는 옛 극동방송 사옥.(사진=인천사연구소)

올 들어 수인선 공사로 철거 위기에 놓였던 인천세관 창고 문제로 지역에서는 근대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인천항과 역사를 같이한 이 세관창고는 불행하게도 등록문화재가 아니어서 철거될 위기에 고스란히 놓였다.

지역의 언론이나 학계, 향토사계 모두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뒤늦게 나서 '보존하자'는 여론을 형성해 이전복원이란 차선책이 마련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인천세관창고는 6·25 한국전쟁의 포화까지 견디며 한 세기가 다 되도록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왔건만, 제도권 밖에 놓인 탓에 '보호'를 받지 못한 경우다.

사정이 이러하자 인천시가 지역 내 근대건축물을 모두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보존 가치가 있는 건축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제도권 안에서 보호하겠다는 것인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적지 않다.

어찌됐든 지난 4월 중순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던 건축물이 또다시 지역 사회를 뒤숭숭하게 만들 태세다.

학익동 OCI(옛 동양제철화학) 인천공장 부지에는 '극동방송국' 건물이 있다.

시인이자 향토사가인 김윤식씨는 학산문화원이 낸 학산소담이란 책자에서 극동방송국에 대해 이렇게 밝힌다.

"극동방송국은 현재 동양화학(OCI) 사무실 건물이 서 있는 일대 뒤쪽의 야트막한 언덕 끝에 바다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중략) 정문 입구에 'HLKX TO THE SITE THAT IN DARKNESS'라고 새긴 화강암이 붙어 있었고, 선교사나 방송 기술자였을 서양인들과 특이하게 생긴 흰색 차가 자갈길에 뽀얗게 먼지를 뿌리면 달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기억 속 극동방송국 사옥은 분명 "서 있었다"는 과거형이지만, 이 사옥이 여전히 건재하다.

(사)인천사연구소 김상태 이사장은 "수인선을 조사하다 극동방송국이 현재 OCI의 노조사무실과 직원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옛 극동방송의 사택 건물(사진=인천사연구소)

극동방송은 대한민국 방송사상 최초로 해외에 전파를 쏜 방송국이다.

1954년 7월 동맹선교회가 당시 체신부한테서 무선국 설치허가(주파수 1030kc, 호출부호 HMBN)를 받고, 1956년 12월 학익동에 (재)한국복음주의 방송협회를 설립했다.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 등 3개 국어로 방송을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와 몽골, 북한 등지에 '복음'을 전파했다.

사옥은 현 위치에 총 9개 동을 들였고, 방송 송출 안테나는 바닷가에 133m 높이로 세웠다.

'국제복음방송국'에서 다시 '극동방송국'으로 사명이 바뀌었다. 1962년 중구 북성동 자유공원 인근으로 사옥을 옮겼다가 1967년 현 서울시 마포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른다.

송신 안테나도 1964년경 현 남동구 논현동으로 이전했고, 이후 시흥시로 아예 옮겼다.

극동방송국의 첫 둥지는 1968년부터 OCI에서 노조사무실과 직원 숙소로 쓰고 있다.

그런데 '해외 첫 방송 송출'이란 의미를 지닌 이 극동방송국 건물이 앞으로 있을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될 처지다.

이 건물이 그동안 공장 안에 꼭꼭 숨어있던 터라 지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는 향토사가조차 '있었다'는 과거형으로 기억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2003년 인하대 박물관이 한 재개발계획부지에 대한 지표조사에서도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하대 박물관이 조사 당시에는 극동방송국 가치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고, 알고 있었더라도 근대건축물의 등록문화재 지정 기준인 '50년'을 채우지 못했으니 딱히 어떤 제안도 제시하기 어려웠을 게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이 건축물을 '보전'할 법적 근거가 어디에도 없게 됐다.

이 건물의 존재를 알게 된 남구가 이를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OCI에 전달했지만, 이 역시 재개발 사업을 상당부분 추진한 OCI가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어렵사리 인천세관창고는 차선책으로 지킬 수 있었지만, 극동방송국 건물은 사유재산이라 보전 가능성이 극히 적은 게 현실이다.

경인방송 사옥

OCI와 '방송국'의 인연은 예서 그치지 않는다.

1996년 2월에 인천에서 지역사회 여론에 힘입어 민영방송국을 설립하기 위한 추진 사업단이 발족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주)인천방송이 설립되고, 그해 10월 UHF 채널 21로 인천의 첫 지상파 TV 방송 전파가 송출된다.

이 인천방송에 당시 동양화학이 대주주로 참여한 것이다.

인천방송은 '박찬호'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VJ'란 참신한 개념으로 방송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인천방송은 SBS와 손잡은 다른 민영방송과 달리 100% 자체제작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0년 (주)경인방송으로 사명을 바꾸고, 채널도 VHF 채널 4번을 확보했다. 송출권역도 경기도 남부지역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2003년 6월 iTV iFM(90.7㎒)까지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경인방송은 방송위원회의 재허가 추천 거부로 2004년 12월31일 정파된다.

노·사, 노·노 갈등이나 좁은 방송권역, 서울 전파 월경 논란 등의 요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경인방송이 개국 이후 7년간 '지역화'를 외면하고 '서울지향성'을 보인 게 정파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후 경인방송은 둘로 갈라지게 됐고, 동양화학도 대주주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송위원회의 재허가 추천 거부는 TV 방송 부문에 국한된 것이었다.

경인방송은 TV 정파 후 4개월 만에 영업을 재개했고, 지역사회에서도 뉴iTV시민운동본부를 구성하는 등 경인방송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2006년 6월 라디오인천 써니FM으로 사명을 바꿔 지역 시청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을 펼쳤고, 지난해 법정관리 조기 졸업이란 성과를 내기도 했다.

2008년 8월에는 애초 사명인 경인방송 iTV로 되살렸다. IPTV 진출 등 사업영역을 다양화하고 있다.

정파 이후, 경인방송 노조가 중심이 되고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보태 새로운 지상파TV 설립 운동이 벌어졌다.

노조 조합원들은 퇴직금까지 털어 새 민영방송사를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했고, 시민들도 십시일반 시민주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실이 3년 만에 맺어져 2007년 4월 방송위의 허가를 얻어, 그해 12월28일 OBS 경인TV가 개국했다. 영안모자가 대주주로 있으며, 부천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한동안 지역 케이블 SO와 합의를 이루지 못해 지상파로만 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다. 디지털방송 채널은 8번이다.

방송위 허가 과정에서 인천에 본사를 두기로 약속을 했지만, 아직 본사 이전 계획이 본격화하지는 않고 있다.

TBN인천교통방송 사옥

학익동에는 방송국이 하나 더 있다.

인천의 교통정보를 제공하는 TBN 인천교통방송이 2001년 11월30일 학익동에서 개국했다.

올해로 개국 10년을 맞는 주파수 100.5㎒로 매일 20시간 인천지역과 경기도 일부 지역에 방송을 송출한다.

인천지역의 실시간 교통정보를 제공하는 지역 행사정보와 소식을 전하는 등 지역밀착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교통사고 줄이기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인천교통방송은 "올해 개국 10주년을 맞아 '에너지 절약을 위한 현장 캠페인' '개국 10주년 기념 특집 음악회' 등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으로 인천시민과 함께하는 '공익·교통전문방송'으로 재도약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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