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꽂했던 최고 문장가 권필, 형편없이 방치된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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꽂꽂했던 최고 문장가 권필, 형편없이 방치된 유허비
  • 김시언
  • 승인 2023.05.16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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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이야기] (21) 석주 권필 유허비
석주권선생유허비 - 관리가 안 된 향토유적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꽂꽂한 선비, 석주 권필

조선 중기 뛰어난 문장가인 석주 권필 선생 유허비를 다녀왔다.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892. 주소를 찍고 갔으나 나무와 풀이 가려져 비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고구마를 심던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관리를 안 하는지 모르겠어.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유명한 분이었다는데 저렇게 냅둬도 되는지 몰라” 하면서 걱정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했다.

‘석주권선생유허비’는 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돼 있다. 비석 전면에는 ‘석주권선생유허비’라 쓰여 있고, 뒤에는 권필 선생의 행적이 적혀 있다. 권필 선생이 그를 따르는 유생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낸 곳으로 생전의 흔적을 되새기기 위해 권필의 4대손으로 강화 유수로 부임한 권적이 초당 옛터에 세운 것이다.

《석주집》에 전하는 800여 편의 시 중, 100여 편에는 당시 세상과 큰 괴리를 느끼며 가슴에 품었던 울분과 갈등, 당시 사회와 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력하게 나타나 있다. 세인들은 이러한 시를 서로 베껴가 읽었다고 하니, 권필에게 있어서 시는 백성들의 울분을 대변해 주고 위정자들을 질타하는 수단이 되었다.

석주권선생유허비2_비석을 나무가 가리고 있다.
비석을 나무가 가리고 있다.
석주권선생유허비3_비석도 관리가 안 된 상태다.
비석도 관리가 안 된 상태다.

 

방치된 유허비, 강화군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할아버지 말대로 ‘석주권선생유허비’는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비문을 들어가 볼 수 없게끔 망이 쳐져 있었고, 비석 옆에는 풀이 많이 나 있었다. 게다가 자두나무 두 그루가 심겨져 있어 나무가 자라면 안내문은 물론이고 비문도 가려질 형국이었다.

강화군 문화재과에 연락하니 돌봄사업단에 연락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 일주일 뒤 또다시 찾았더니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무와 풀은 더 무성해져 있었다. 문화재과에 다시 연락했더니 강화군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단다. 향토유적인 데다가 사유지라서 전혀 손쓸 수가 없다고, 개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청소도 할 수 없고 잔디도 깎을 수 없다고 했다. 강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송강 정철의 제자이기도

석주 권필 선생(1569-1612)은 강화에 머물면서 제자를 많이 가르치고 시화를 함께 나누었다. 과거에 뜻이 없어 시와 술을 낙으로 삼고 가난하게 살았다. 문신들의 추천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

권필 선생이 살다 간 선조대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어지러운 정치로 판을 치던 시기였다. 하지만 문학사로 보면 조선 한문학의 절정기여서 ‘목릉성세’라고 불린다. 이 목릉 문단에서 권필 선생은 동악 이안눌과 함께 조선 시의 최고봉으로 꼽혔다. 권필 선생의 호는 석주. 권필 선생은 현실에 바탕을 둔 서정과 호방한 기풍을 시에 녹여냈다. 어느 시대보다 혼란기를 보내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꽂꽂한 선비 정신을 잃지 않았다.

권필 선생은 송강 정철의 제자였다. 조선 문학의 최고봉이고, 한때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송강 정철. 그가 강화에 살다가 굶어죽었다. 송정촌, 지금의 숭뢰리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한 달 남짓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영양실조로 죽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한겨울이었다.

송강 정철은 어쩌다 강화에 왔을까. 임진왜란 때 선조는 유배 중인 송강을 불러 명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명나라를 다녀온 송강은 모함을 당하자 임금에게 사면을 청하고 강화로 은거했다. 이때 송강 정철을 가끔씩 찾아오는 선비가 있었는데, 바로 석주 권필이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벼슬을 멀리하고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다.

유허비가 방치됐다고 걱정하는 마을 할아버지
유허비가 방치됐다고 걱정하는 마을 할아버지

 

‘궁류시’로 목숨을 잃다

권필 선생은 마포 서강 현석촌에서 태어나 초시와 복시에 장원했지만 한 글자를 잘못 써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1592년(선조 25) 24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들어왔고, 다음 해에 서울로 돌아갔다가 26세 때 다시 강화로 왔다. 지금의 송해면 하도리에 정착했고, 이후 벼슬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초당 근처에 소나무와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 초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권필 선생은 42세 때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그 다음 해에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 ‘궁류시’는 광해군의 비 류씨의 동생 등 외척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1612년 김직재의 무옥에 연루된 조수륜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필이 지은 사실이 발각돼 광해군에게 불려가게 되었다. 궁류시의 내용은 이렇다.

“대궐 버들 푸르고 어지러이 꽃 날리니/ 성 가득 벼슬아치는 봄볕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입 모아 태평세월 하례하나 / 뉘 시켜 포의 입에서 바른말 하게 했나(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

‘대궐의 버들’, 곧 궁류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돼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권필을 잡아들일 때 재상 영의적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이 광해군을 여러 차례 만류했다. 이항복은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면서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권필 선생은 매를 맞고 다음날 귀양길에 올랐다. 그리고 따라온 친구들이 사 준 술을 폭음하고 그날밤에 사망했다. 나중에 권필이 죽자 이항복은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하면서 깊이 낙담했다. 결과적으로 권필 선생은 이 시 한 편으로 목숨을 잃었다.

권필 선생은 1623년 인조반정 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1739년(영조15)에 권필의 4세손 권적이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석주 초당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유허비는 선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를 말한다.

권필 선생이 유생들을 가르치던 초당 자리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필자는 강화에 들어와 살면서 몇 년 뒤에야 석주 권필 선생을 알았다. 고려 말기의 문인인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석주 권필 선생은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하도저수지를 가게 되면서 하도리를 알게 됐고, 권필 선생과 그의 행적을 알게 됐다.

강화대로를 지날 때면 종종 석주 권필 선생 유허비를 들른다. 풍광이 아름다운 고려산 중턱에 맑고 깨끗한 마을이 마치 판타지처럼 다가오고, 그 당시 권필 선생과 제자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석주권선생유허비4_유허비 근처에 있는 하도저수지
유허비 근처에 있는 하도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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