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살부터 미수(米壽)까지... 인천 미술 바닥부터 다지다
상태바
열살부터 미수(米壽)까지... 인천 미술 바닥부터 다지다
  • 이경모
  • 승인 2023.07.04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9) 이철명 화백 - 인천 미술의 뿌리, 산 증인이 되다(상)
/ 이경모 미술평론가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차례로 연재한다. 아홉번째 순서는 이철명 화백(전 경기예총 회장)이다. 이경모 미술평론가 만났다.

 

인천 미술의 산 증인 이철명 화백 @유광식

 

이철명 화백을 빼놓고 인천미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퍼즐조각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인천에 정착한 이철명 화백은 일제 강점기말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잠시 평양과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을 빼고 평생 인천과 인천미술을 지켜왔다. 그의 발자취는 바로 인천미술의 역사와 함께 한다. 젊은 시절부터 후학을 양성하고 향토자료 수집에 몰입하는 한편 지역 선배 미술인들의 화적(畫籍)을 정리해온 이철명 화백이야말로 ‘인천미술의 산증인이자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철명 화백은 30대 나이부터 경기미협 지부장, 인천미협 지회장, 경기예총 회장 등을 지내며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활동을 지원하고 중앙화단과의 교량 역할을 도맡았다. 이와함께 중국, 대만 미술과의 교류를 통하여 한국에서 선도적으로 해외교류의 물꼬를 튼 장본인이기도하다. 미수(米壽)의 나이에 여전히 작업실을 지키며 그림에 빠져있는 이철명 화백의 허름한 동인천 작업실을 찾았다.

 

이철명 화백과 인터뷰하는 이경모 미술평론가
이철명 화백과 인터뷰하는 이경모 미술평론가. 5월 11일 동구 화평동 이철명 화백의 작은 화실에서 인터뷰했다.

 

이경모 ;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1998년도 지역신문에 ‘새롭게 본 인천미술인’이라는 기획기사를 위해 선생님을 인터뷰했는데, 벌써 25년이 흘렀네요. 그동안 인천 미술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작업에 열중하고 계신 것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출생 연도가 1935년도죠?

이철명 ; 1935년 9월 19일, 그러니 한국 나이로 올해가 89세네요. 이제 올 가을 되면 만으로 따지면 9월달에 88세가 되죠. 따지고 보면 저도 인천으로 이주해온 사람이죠. 그런데 저는 인천에서 오래 살았어요. 아기 때서부터. 제가 태생은 본래가 서울이예요, 노량진. 할아버지가 노량진 행길가에 아주 잘 지은 기와집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다가 제가 두 살 때인가, 서울에서 우리 아버지가 스타사이다 공장 공장장으로 발령을 받으셔서 서울에서 인천으로 왔어요. 그래서 이후 완전히 인천 사람이 된 거예요.

 

이경모 ; 인천에서의 유년시절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이철명 ; 미협에서 발간한 인천미술사를 보니까는 당신이 쓴 걸로 되어 있는데, 오류가 많아요. 서울에 있는 조용익 선생이라든지 윤중식 선생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북한에서 피난 왔는데 6.25 이후에요. 근데 저는 일제시대에 숭의국민학교 다녔어요. 숭의동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저는 인천 사람이라고 말해요. 아버님이 일본에서 공부를 했어요. 여기 스타사이다 공장이 새로 생길 적에 공장장으로 추천받아 가지고 인천으로 오시게 된 거예요. 그때 서울 노량진에 좋은 집 놔두고서 인천으로 이사 온 거지요.

 

이경모 ; 선생님은 6.25 전에 북한에서 초등학교에 다니셨다고…

이철명 ; 아버지가 스타사이다 공장장인데, 강점기말, 일본 놈들이 피난 가라고 그러니 그 다음 날 동인천역에서 기차 타고 서울로 해서 평양으로 간 거예요. 부모님 고향은 평양이에요. 그래서 무조건 그냥 평양으로 간 거예요. 해방 전해, 국민학교 3학년 때에 평양으로 가게 됐죠. 거기가 문수리라고 비행장 동네예요. 그 동네 부석국민학교에 제가 편입해서 들어갔죠. 한 학년씩 밖에 없으니까 학교가 조그맣고 아담하고 예뻐요. 거기를 다니다가 그 다음 해에 해방을 맞이해요. 해방되니까 비행기에서 삐라 뿌리고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고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는데, 당시 담임선생님이 저 혼자만 데리고 평양 모란봉에 매일 가서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이경모 ; 이미 초등학교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으셨군요.

이철명 ; 담임선생님이 한국 사람인데 그분이 나 하나만 데리고 이렇게 다녔어요. 모란봉에서 제가 그림 그려렸는데, 지금 말하면 남대문 같은 게 모란봉 밑에, 거기 능라도라고 하는데, 거기 대동문이 있어요. 대동문 열고 나가면 대동강 물이 나오고 거기로 들어가면 모란봉, 잘 사는 사람들의 개화지 동네가 펼쳐집니다. 거기가 제일 고급 동네죠.

거기서 그림을 많이 그리다 보니까는 이제 집에서 그림을 좀 그려가지고 오라고 해요. 그래서 종이 파는 지물포에 가서 구들장 종이 큰 거 사다가 넷으로 쪼개니까는 4절지가 나오죠. 거기에다가 크레파스로 그렸죠. 김일성도 그렸어요.

 

이경모 ; 김일성이요?

이철명 ; 해방 즈음 김일성이는 살찌지 않았어요. 제가 서너 장을 그렸어요. 김일성 사진보고 제가 그렸는데 종이가 좀 커요. 김일성이 말랐을 때, 그러니까 누드 같이 얼굴이 뾰족하고 그런 걸 그렸어요. 우리 삼촌이 인쇄소 사장을 했어요. 해방되자마자 내 동생하고 같이 그 인쇄소로 가끔 놀러 가곤 했죠. 우리는 대동강 강 건너에 살았고, 시내 쪽은 도회지 중심인데, 지금 말하면 서울시청 격이지, 시청 앞에 있던 인쇄소에 가서 책도 좀 얻고 도화지 스케치북도 얻고 그랬어요.

 

이경모 ; 그걸로 그림을 많이 그리셨겠어요.

이철명 ; 인쇄소 벽면이 학교와 경계선이었는데, 담을 나무로 치고 밑에는 철조망으로 막아 접근이 어려웠죠. 뭐하는 곳인지 들어가 볼까 하고 철조망 너머를 살피니까 사람들이 많았어요. 들어가 보니까 그게 다 교실이에요. 국민학교 교실. 전시회 중이었는데 어느 그림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해주 사리원 사과들이 잔뜩 놓여 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다시 어느 교실에 갔더니 애들 그림이 쭉 전시가 됐어. 난 전시회하는 줄 몰랐거든요. 담임선생님이 그냥 그린거 내라고 해서 낸 것 뿐인데, 제 그림 세 장인가 전시되어 있어요. 다른 학교 애들 그림이 다 조그맣고 제 그림이 제일 커요. 벽면 한복판에다 제 그림을 그냥 붙여놨어요. 크니까 잘 보여요. 애들 그림만 꽉 차게 그려놓은 것도 처음 보는 거라... 그런데 내 그림이 거기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내 동생 보고 저거 내가 그린 거란다. 봐라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랑하느라고. 그래서 거기 뺑 돌고 바깥에 나가서 보니까, 삼일절에 한복 바지 저고리 하얀 옷에 뭐 피도 묻고... 이런 거 좀 진열하고, 그리고 조그만 박격포가 운동장에 전시되있고... 그런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겨울에 교내전 할 적에 그림 그려서 내라고 했는데, 로스케 소련 군인들이 따발총 들고 있는 거를 그려 내서 연필 한 자루 받았나? 그런 게 기억에 남습니다.

 

이철명 화백 화실 화구

 

이경모 ; 인천에는 언제 오셨나요?

이철명 ; 그 다음에 인천에 왔는데 할아버지가 또 집을 또 지었어요. 목수라 그래서 기와집에서만 살았어요. 숭의동에서 집이 세 채가 있었어요. 근데 6.25 전쟁이 터지고, 제가 숭의국민학교 3학년 때 7월달에 여기 피난을 오게 됐어요.

 

이경모 ; 학창시절 말씀 좀 해 주세요.

이철명 ; 당시는 그림 그리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동산중학교가 a반 b반이 있었는데, 그림 그리는 애는 a반에서는 나, 그 다음 b반에 한명 있었죠. 그때는 6.25 전쟁 전이고 어려울 때였지요. 학교에서 부잣집 아들이 하나 왔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을 전부 불러가지고 대접하고... 그런 걸 잘해요. 저희 아버지가 스타 사이다 공장장이니까 그래서 선생님이 다 알고 지냈죠.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그림과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이거를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예요.

동산중학교 2학년 때 김상유 선생님이 연세대학교 졸업하고 미술교사로 부임했는데, 미술시간에 빈센트 반 고흐가 삼색으로 그린 풍경을 보여주었어요. 빨강 노랑 파랑으로만 그린 그림을 봤는데, 거기에 코피 터진 인물이 또 나왔어요. 코를 좀 뾰족하게 그리고 피가 좀 뭉치고, 약간 괴기스런 분위기였죠. 그걸 보고선 제가 충격이 컸다고 할까요. 또 중학교 2학년 때 가끔 하인천 연안부두에 미술부 애들을 끌고 가서 부두에서, 그리고 월미도 앞에서 그림 그리기를 했어요. 중학교 3학년 초때 쯤인가, 동산중학교에서 지금 수봉공원 쪽으로 가서 철로 길에서 사생을 한 일도 생각나요.

봄이 되서 김찬희 선생님이 그림을 그려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뭘 그릴까 하니 수봉공원 산이 복숭아처럼 들어간 데가 있고 해서 그 철로 길에 앉아서 풍경화를 그렸죠. 또 하나, 우리 집이 좀 조기가 많았어요. 조기를 5마리, 5마리 엮어서 10마리를 만들어서 벽에다가 걸어놓고 조기를 그렸어요. 조기 그림을 삼원색으로 했어요.

 

이경모 ; 이 작품을 출품하신 거죠?

이철명 ; 네, 동산중학교에서 15점을 냈는데 5점이 입선을 했어요. 그중에 2개가 제 작품이었어요. 하나는 수봉공원, 그리고 하나는 그 삼원색으로 그린 거예요. 그때 김상유 선생님이 “아마 네 그림 중 하나는 입상권에 들을 것 같다”고 해서 기대를 걸었어요.

경복궁미술관 자리에서 전국학생미전을 개최했는데, 아버지가 웬일인지 공장에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저를 데리고 무조건 경복궁으로 간 거예요. 경복궁에 사람들이 많아 밀려 들어갔는데, 제 그림이 조각 작품들이 많이 걸리는 중앙에 걸려 있는 거예요.

 

이경모 ; 부산에서도 학교 다니셨다고...

이철명 ; 제가 인천공고 다니다가 부산으로 피난 갔었거든요. 그 후 다른 애들은 다 일찌감치 인천으로 왔어요. 그런데 저는 부산에도 친척이 있으니까 그 집에서 머무를 수가 있고 해서 좀 늦게 올라왔어요. 그때는 제가 부산 영도에 경복고등학교 편입생으로 있을 때예요. 그 섬 가운데 소나무도 있고 일본 집 있고 해서 거기서 그림 그렸던 생각이 나고요. 수복 후 제가 올라 와가지고 서울 효자동으로 다닐 수가 있었는데, 그걸 못하고 아버지가 공고로 집어넣었어요. 공고로 집어넣는 바람에 제가 서울도 못 가고 동산학교도 못 가고... 우리 형제들 다 공고 나왔어요. 여섯 명이 다.

그런데 제가 공고 2학년 때 모자 쓰고 동산학교를 한번 갔었어요. 김상유 선생님 한 번 좀 뵈야겠다 하고서는 복도를 걸어갔는데, 그 선생님이 강의하다가 말고 저를 발견했어요. 나오더니 “너 만나려고 교실 교실마다 찾아봤다. 너 없더라 그런데 이제서야 나타났냐.” 애들 보고 자습하라고 하시고는 저를 끌고 대포집으로 가요. 그때 그말 잊혀지지 않아. 왜 동산학교로 오지 않고, 왜 공고로 갔냐고.

 

경기도미술전람회_1981_리플릿(인사말)
1981년 이철명 화백의 예총 경기도지부장 때 시행된 경기도미술전람회 리플릿(인사말)

 

 

이경모 ; 김상유 선생님 얘기 좀 더 해 주세요.

이철명 ; 제가 미술협회 관계 일을 열심히 할 땐데, 1967년도에 김상유 선생님을 경기도에서 주는 도문화상을 추천했어요. 문화상을 타게 하자 해가지고 제가 밀고 나간 거예요. 제가 총무니까 예총 이사회에서 통과시키면 그 다음에 수원에서 미술 문화상 통과, 발표하는 날 제가 집으로 찾아 갔어요.

“선생님이 일본에 가서 에스파전인가 하는 국제전에 참가하느라 구두 값 양복 값 빚지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돈 나오면 그거 다 갚으세요. 오늘 신문에 발표 나옵니다.” 하고 돌아왔죠. 그때 쫓아 나오면서 가지 말라고 하며, 여기 포장마차 집에서 한잔 사려 하시는 것을 제가 마다했어요. 나는 그 중학교 2학년 때 그 인상이 굉장히 훤하거든.

 

이경모 ; 그 뒤로도 김상유 선생님은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셨죠?

이철명 ; 작고할 때가 2002년 2월 박명자가 있는 갤러리 현대에서 전람회 하고선 그게 끝이에요. 목판 원본이 거기에 다 있어요. 거기 목판이 많아요. 내가 그 후에 못 갔는데 최정숙 화가 남편이 치과의사 아니에요. 그래서 한 번 만나서 의논 좀 했으면 하는 것이, 현대화랑 박명자한테 최정숙이가 홍대 나왔으니까 거기 가서 잘 얘기하면은 목판화를 좀 싸게 좀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김상유 선생 유작전을 한번 했으면 좋겠다 했어요. 그때는 박명자한테 가서 유작전하자고 하면 프린트 및 전시비용을 비싸게 부를 거 같아서 실행하기가 힘들었고...

김상유 선생 부인은 지금 하와이에서 사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 큰 딸이 하와이에 살아요. 큰 딸한테 간 줄 알고 있어요. 둘째 딸은 독일에서 사는 걸로 알고 있고. 큰 딸이 박사예요. 그래서 그 큰 딸이 부인하고 같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부인이 직접 박명자한테 얘기하면 쉽게 할 수 있지 않나, 우리가 가면 색안경 끼고 볼까 봐 좀 말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유작 원판을 탐내는 줄 생각한단 말이죠. 그래서 아직 못하고 있는 거죠.

 

이경모 ; 또 어디에 작품이 있을 까요?

이철명 ; 제가 그 김상유 선생 판화를 두 점을 가지고 있어요. 어디 두었는 지 찾아봐야 하는데 아직 못 찾았어요. 근데 그거는 내가 팔지 않고 미술관 생기면 그냥 기증하려고 해요.

다른 거는 모르겠지만 김상유 선생님 수제자가 저밖에 없어요. 제가 돈 바라고 내며는 그거 평생 내가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아요. 김상유 선생이 아주 슬프게 작고했거든요. 그 사람이 왜 자기를 땅에다 묻지 말고 동강에다 뿌려다오, 왜 그 말을 했을까? 평론가 김인환이 식구들한테, 딸한테 얘기 듣고서 나에게 전달하길래 ‘뭐 할 수 없지’ 했어요. 그래서 인환이 하고 둘이서 동강에 다 뿌렸죠.

그런데 제가 그거를 만약에 팔아먹게 되면 말이 안되죠. 내가 아무리 없다 하더라도 그렇지. 김상유 선생을 제가 평소에 잘 모시지도 못했는데 술도 잘 사지도 못했는데 그걸 팔아 먹으면 안되죠. 그런데 이후 40년 넘었는데 아직 그것을 다시 본 일이 없어요. 이제 찾아가지고 액자에 잘 껴가지고 한번 보여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좀 철학적인 그림이에요.

 

한중 수채화 대표 작가전_도록(표지)
이철명 화백이 주도한 한중 수채화 대표 작가전_도록(표지)

 

이경모 ; 또 다른 선생님들 있잖아요. 이경성이라든가 김찬희, 황추, 김학수, 우문국, 박영성, 안영 이런 분들 얘기도 해주세요.

이철명 ; 동산중학교 1학년 때 미술선생님이 김찬희 선생이에요. 키가 조그만 사람 김영문 선생하고 그분하고 비슷해요. 그런데 보통 고집이 센 게 아니에요. 그 분이 2학년 때 제가 한번 미술시간에 그려 보니까 와서는 너 어느 학교에서 왔냐고 물으시더라구요. 숭의국민학교에서 왔습니다.

그 후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여상에 가서 피아노 앞에서 토요일마다 여학생 미술부 애들 앉혀놓고 크로키를 1년 반 2년 가까이 그렸어요. 김찬희 선생하고 저하고 토요일만 미술부 학생들 앉혀놓고 그걸 그렸어요.

거기에 박응창 원로 선생이 있었어요. 나중에 인천사범학교 미술교수로 갔어요. 이분이 일본서 미술 공부를 했어요. 김찬희 선생도 일본서 미술 공부했죠. 김영건 선생도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어요. 박응창 선생, 김찬희 선생, 김상유 선생, 김영건 선생 다 유명하신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 김찬희 선생이 동산학교 계시다 월미여중 미술 선생으로 갔어요. 그 사람의 고집은 아주 세요. 그리고 강하고 아주 술을 그렇게 좋아해요.

 

이경모 ; 김찬희 선생님 얘기 좀 더 해주세요.

이철명 ; 당시 월미여중, 남인천여중, 인천여상, 기독병원 앞으로 해서 율목동 골목길로 쭉 와요. 그 다음에 평양옥 앞으로 이렇게 가요. 평양옥 앞으로 해서 숭의동로터리 쪽까지 있는데 그쪽으로 가는 길목에 다리가 있었어요. 조그만 다리, 그 다리하고 걸린 하꼬방이 김찬희 선생 집이었죠. 그런데 내가 그걸 몰랐었거든요. 하루는 그 집 앞에서 앉아서 캔버스, 한 15호 정도 되는 것에다 유화를 그려봤어요. 난 김찬희 선생 집인 줄 모르고 그려가지고 그 유화 그림을 갖다 보여줬어요. 김찬희 선생이 깜짝 놀랐죠. 나는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거기 술집에 그렇게 커튼이 쳐져 있으니까요. 그게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그럴 거예요.

이 양반이 자기네 집을 밤 늦게 들어가요. 그러니까는 좀 어둡고 컴컴해져가지고 8시 9시 돼야 술 한 잔 먹고선 어슬렁 어슬렁 거기 하꼬방집에, 학교 선생님인데 거기서 살았어요. 부인이 술장사하고 있는데, 나는 그건 줄 모르고 집 모양이 하도 재미있어서 그렸는데. 이거 왜 그렸냐고 말이야 라고 야단을 치대요. 이거 자기네 집을 조사하러 그린 것 같은 인상을 줬는지. 이거는 안돼 하고서는. 근데 잘했다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랬던 경험도 있어요.

김찬희 선생과의 관계, 내가 좀 사람이 부족해서 잘 대접을 못했어요. 김상유 선생님한테도 부끄럽고,,, 그리고 김영건 선생님도 그래요. 내가 대접을 잘 못했어요. 이경성 교수나 문인 가운데 김양수라고 유명해요. 특히 한상억씨라든지

김찬희 선생과 김영건 선생하고 그 다음에... 뭐 이경성 교수는 상당히 점잖았어요. 김찬희 선생이 이경성 교수가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을 자주 들락날락 거렸는데 제가 하루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데 그림 그려가지고 한번 갖다 보여드려 봤어요. 그림 하나 그려가지고 오라고 했던것 같아요. 그때 거 갖다 보였더니 뭐 좀 먹고 가라고 하더군요. 근데 그거를 중고등학생들 약간 명, 인천사범학교, 인천공고, 동인천중학교 애들이 여기 그림 그려서 내고 했는데 저를 특선을 줬어요.

 

이경모 ; 아 인천 학생미술실기대회같은 거네요?

이철명; 그때는 사생대회가 그렇게 별로 많지 않았어요. 있긴 있었는데 우리한테는 해당이 잘 안 되고 했는데 그래도 특선 줘서 상 타고, 이규선이는 가작 주고... 용기가 나더군요. 그래서 지금 공고, 인천고 미술부 애들이 미대 좀 많이 간 거는 사실 저 때문에 좀 영향이 있다고 봐야 돼요. 왜냐면은 내가 다 데리고 다니면서 사생시키고, 안 간 데 없어요. 안양이 골짜기로 들어가면 유원지죠. 안양유원지, 수영장도 있고 거기도 데리고 가서 그림 그렸어요. 거기서 깡패들 만나가지고... 노량진에 있는 고등학교가 조양 깡패라고 그래요. 조양중·고등학교 거기 애들한테 걸렸어요. 그림 펼쳐놓고 사생하다가 깡패들이 와가지고서는 훼방 놓는 바람에 그림을 못 그리는 일도 있었죠. 그땐 흔한 일이었죠. 그런데도 강화를 안 갔나, 연안부두는 참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냐. 그때 공고 선생들은요, 4시간 오전 수업 하고 나면은 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공부하러 가거든. 그러니까 오전은 다 강사로 채운 거예요.

그래서 공고는 오후에 응원 연습을 해요. 운동장에서 축구시합 아니면 육상경기대회 아니면 야구대회 이런 게 자주 있었으니까 그냥 응원 연습 시켜요. 이때 미술부 나오라고 하면은 좋아서 나와요. 응원연습 안 하니까. 두 시간 동안 태양 볕에서 짝꿍 짝짝꿍 그거 싫어하거든요. 미술부 나오라 하면 30명 모여요. 그럼 그 학생들 나보고 데리고 나가라고 한단 말이죠. 그래서 수봉공원 지나서 숭의국민학교 지나서 청관 쪽으로 가고, 뭐 나가 그리고 한 거예요. 미술부 애들이 안영이든 누구든 다 남은 거예요.

 

이경모 ; 안영 선생님도 공고 출신이에요?

이철명 ; 동인천중학교 1학년이었죠. 우리는 공고 3학년. 안영은 중학교는 동인천중학교, 고등학교는 인천고등학교를 갔는데 데리고 다녔죠. 안영은 홍대, 김시춘이는 서울미대 나왔는데 그들이 그림을 열심히 했어요. 또 애들이 좀 덩치도 크고 하니까 눈에 띄어요. 인고에서 미술부장도 하고. 그때 미술 선생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후에 황용엽이 인고에 부임했었죠, 김종휘하고. 그래서 좀 가깝게 지냈죠.

 

하편에 이어집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