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번성했던 평양, 8폭 병풍 平壤城圖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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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번성했던 평양, 8폭 병풍 平壤城圖로 남다
  • 윤미선 객원기자
  • 승인 2023.10.2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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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속으로]
(4) 보물 제1997호 평양성도(송암박물관)
인천in이 인천시립박물관과 협력하여 본관 및 분관 소장 유물들을 탐사하고 독자·시민들에 소개합니다. 인천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박물관 속 유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떤 유래와 의미를 담고 있는 지 알아보며 지역 역사문화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포스터를 그리던 유년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지금도 북한은 여전히 미지의 공간이다. 가깝고도 먼 평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옛 평양의 모습을 섬세하게 담아낸 보물 제 1997호 평양성도(平壤城圖)를 소개한다.

 

보물 제1997호 평양성도(송암박물관)

 

평양성도는 총 8폭으로 그려낸 조선시대 병풍으로 송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 평양성과 그 주변을 둘러싼 강과 산맥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낸 회화식 지도이다.

평양은 조선 초기부터 중국 사신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외교의 거점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 인구 증가로 한성에 버금가는 번성한 도시였다. 외교와 북방 수호를 위해 국가적 지원이 충분하였기 때문에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평양은 사회·문화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도시라 18~19세기에 그려진 평양성도가 여러 점 남아있다. 현존하는 평양성도가 대부분 19세기에 그려진 것에 비하여 송암미술관의 평양성도는 그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비교적 이른 제작 시기로 조선 후기 연구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회화적 예술성이 뛰어나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대한민국의 보물 제 1997호로 지정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문화재청

 

평양은 ‘평양 8경’이라 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다. 평양성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평양성을 중심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고 그 주변에 강이 흐르고 있다. 그림에서 위쪽에 위치한 보통강과 아래쪽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실제 평양의 모습은 병풍 속 평양성도처럼 가로 방향의 타원형이 아니라 북쪽에는 산이 있고 동쪽과 남쪽에는 대동강, 서쪽에는 보통강이 흐르는 3면이 물로 막혀있는 형태이다.

일반 지도처럼 위를 북쪽으로 잡게 되면 세로로 긴 형태가 되기 때문에 제작 편의상 위를 서쪽으로 설정하여 그린 것이다.

 

대동문(4폭)
대동문(4폭)

 

평양성도를 보며 평양에 방문한다고 가정해보자. 병풍은 오른쪽에서부터 1폭으로 시작해 가장 왼쪽의 그림이 순서상 8폭이다. 8폭 하단에 위치한 영제교를 건너 대동강을 지나 나루터로 이동한다. 여기서 배를 타고 대동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빼곡하게 들어선 가옥을 보면 평양이 꽤 번성한 도시였는지 알 수 있다. 그 안에는 시청 역할을 하는 관아와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머무는 숙소 역할인 객사 등 외교적 역할을 하는 공간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있는 평양성은 북한의 국보 1호로 현재에도 그 원형을 보존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동문과 대동관 중간에 정원 애련당(愛蓮堂)과 군사 훈련 시 지휘를 위한 누대 역할을 했던 장대(樓臺)가 보인다. 애련당과 장대는 18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기 때문에 평양성도의 제작 시기를 그 이전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평양성도는 건물과 봉우리마다 명칭이 기재되어 있고 지리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 있지만 좀처럼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당시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가 아닌 평양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 미상이나 정밀한 그림 솜씨와 관청 위주의 구성, 비단에 고급 안료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왕실에서 필요에 의해 그려진 것이라 추정된다.

 

기자묘(2폭, 왼쪽)와 기자정전(6~8폭, 오른쪽)
기자묘(2폭, 왼쪽)와 기자정전(6~8폭, 오른쪽)

 

평양성도는 실제를 기반으로 그려졌으나 일부 상직적 요소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다. 2폭의 기자묘(箕子墓), 6~8폭의 기자정전이 상징적 요소이다. 2폭의 기자묘를 먼저 살펴보면 산 중턱에 묘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자묘는 말 그대로 기자의 묘인데 기자는 옛 설화 속 주인공으로 은(殷)나라가 멸망한 후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그 기자다. 실제로 기자가 묻혀있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당시 조선에서는 기자를 단군과 함께 숭상했다. 이 때문에 평양을 기성(箕城)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평양성도는 평양기성도라고도 불리운다. 설화를 기반으로 한 기념비의 역할이 컸을 것이고 중국과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사신이 오면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친교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8폭을 살펴보면 건물터처럼 네모나게 묘사된 공간이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이를 기자정전(箕子井田)이라 한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논밭이 기계로 작업한 것처럼 반듯하지 않았으나 제작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농업이 발달한 이상적인 평양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송암미술관은 평양성도 외에도 조선시대 회화, 근대 회화, 민화 등 우리나라 회화의 다양한 전통과 우리 옛 글씨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9월 26일부터 내년 3월 31일까지 '서예를 감상하다' 기획전시를 진행하니 이번 가을 송암미술관 방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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