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 뉴욕 초대작가, 水墨으로 귀착한 불같은 열정
상태바
26세 뉴욕 초대작가, 水墨으로 귀착한 불같은 열정
  • 김윤식
  • 승인 2023.11.06 06: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중제고 사람들]
(10) 화가 장선백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인천in이 이달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고 장선백 화백

 

고 장선백(張善栢, 1931∼2009) 화백은 인천중학교 6년제 5회 출신이라고 해야 맞지만, 졸업장에는 인천고등학교 졸업생으로 적혀 있다. 그 이유는 광복 후 주둔한 미군에 의해 일본식 중학 편제인 6년제, 4월 학기제에서 미국식인 9월 입학, 6-3-3-4 학제로 개편되면서 졸업을 불과 4개월여 남겨 두고 신생 인천고등학교에 편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은 6·25전쟁 중, 특히 인천에서만 예외적으로 벌어진 3년제 중고등학교 설치 시책 때문에 장 화백과 같은 인천중학교 6년제 5회 학생들은 낯선 학교의 졸업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좀 더 자세히 풀어 이야기하자면, 인천중학교 6년제 5회 기수들은 1946년 4월에 인천중학교에 입학해 6학년 졸업을 4개월 정도 남긴 1951년 11월, 교육 당국의 지침에 의해 뜻밖에 인천고등학교에 편입하게 되고, 이듬해 1952년 3월에 졸업을 했다는 사연이다. 그러니까 이들 6년제 5회 기수들은 ‘6년제 인천중학교 재학 마지막 6학년 해인 1951년 8월까지 학업을 수료하고 여름 방학에 이어 11월부터 4개월 정도 ‘신설 인천고등학교’에 적(籍)을 두면서 생각지도 않게 그 학교 제1회(일제강점기 중의 회수 제외) 졸업생’이 된 것이다.

실제 2018년 인천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발간한 『인천고 인물사』에는 장선백 화백을 ‘인천고 51회’ 인물로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은 『인천고 인물사』에 기록된 내용의 일부인데, 이 기록대로라면 인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자발적으로 인천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처럼 요즘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는 1934년 10월 3일 충남 당진에서 아버지 장윤국과 어머니 한통적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인천으로 이사해 인천송림국민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전쟁 중인 1952년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인중제고 동문 미술동호회 첫 회장 맡아

여기서 이렇게 학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제 5년 8개월을 길영희 교장의 인천중학교에서 공부한 이들 기수들을 불과 4개월여 편입해 있던 인천고의 졸업생이라고 해야 하나, 인천중학교 동문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의문과 논란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당시 많은 수의 6년제 5회 기수들이 교육 당국의 논리에 맞지 않는 해괴한 처사에 심리적 갈등을 겪었다는 증언들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천고 인물사』에는 이런 식으로 몇몇 인천중학교 6년제 5회 졸업생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장선백 화백을 비롯한 인천중학교 6년제 5회 기수들은 항상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를 자신들의 모교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6년제 5회 동문들 중에는 인중·제고총동문회 회장으로서 학교 발전과 동창 교우에 앞장선 분이 계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문들이 동창회 제반 행사에 솔선 참여하여 물심양면으로 역할해 온 엄연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은 장선백 화백의 경우에도 꼭 들어맞는다. 곧 창설 초기 장 화백이 주도했던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 동문 미술동호회’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 미술동호회는 알려진 대로 1987년에 창설된다. 그리고 여기서 장선백 화백이 창설 첫 회장을 맡는다. 4개월여 적을 두었던 학교가 아니라, 6년 가까이 재학했던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동문 미술동호회의 첫 회장을 맡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서울·인천서 동문 미술전」이란 제호로 그 첫 미술전 소식을 알린 1987년 11월 11일 자 조선일보 기사를 소개한다.

인천중과 제물포고를 나와 미술 분야에서 활동 중인 인사들로 구성된 ‘인중·제고 미술동호회(회장 張善栢·동덕여대 교수)’가 동문 간의 우의를 다지는 뜻으로 서울과 인천에서 동문 미술전을 연다.

서울에서는 13일부터 21일까지 신교동 청화랑, 인천에서는 23일부터 29일까지 가톨릭회관 지하 몽마르뜨 화랑. 현역 화가인 李奎鮮(이화여대) 李蕃(덕성여대) 韓豊烈(경희대) 趙平彙(목원대) 등의 작품 외에, 인중과 제고에서 교사를 지낸 趙炳華(예술원 회원) 林明鎭(전 덴마크 대사) 등의 작품도 전시된다. 동문 출신 아마추어 미술인들도 참여할 수 있다.

인중제고 동문미전 기사 1987. 11. 11. 조선일보
인중제고 동문미전 기사 1987. 11. 11. 조선일보

 

이밖에도 이 첫 전시회에는 이열모, 강창균, 김인환 등 총 28명의 동문과 축하 찬조 화가들이 작품을 걸었다.

장 화백은 인천 남동구 만수동 출신으로(앞의 『인천고 인물사』 인용문 중의 충남 당진 출신이라는 기록은 원 고향이고 그는 만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도 1931년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한국인 서민들이 다니던 송림초등학교를 나온 뒤, 인천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졸업 직전 잠시 인천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해 졸업한다.

6·25 전쟁통에 부산까지 가서 대학에 갈 수 없었던 장 화백은 길영희 교장의 주선으로 일단 신흥초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특채되어 근무하다가 이듬해 1953년에 들어서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다. 인천중학교 동문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것은 장선백 화백이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이 전후 장 화백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드러난 약력은 역시 기왕에 말이 난 『인천고 인물사』의 기록을 빌려 적는다.

그는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952년부터 53년까지 2년간 인천신흥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때는 고등학교 졸업자도 초등학교 임시교사로 일할 수 있었는데 동기동창으로 절친이기도 한 金泳達 시인도 그와 같이 고등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임시교사로 근무한 바 있다.

그리고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 1957년 졸업했다. 그는 대학을 다니는 중에도 모교인 인천중학교 강사로 근무하는가 하면 졸업 후에는 1966년까지 제물포고등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서울대 미대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1966년 인천을 떠나 서울 계성여자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가 1972년 영남대 미술대 교수로 자리를 잡아 8년간 근무했다, 이후 1979년 미국 뉴욕으로 떠나 4년간 미술 수업을 받고 1983년 귀국, 동덕여대로 자리를 옮겨 동덕미술관장 및 예술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리고 1994년 9월부터 1996년까지 2년간 동덕여대 미술대학장, 1996년 9월부터 2000년 2월까지는 미술대학이 예술대학으로 바뀐 후 예술대학장을 지냈다.

이 기록에서 “1952년부터 53년까지 2년간 인천신흥국민학교 교사로 근무” 운운은 부정확하게 보인다. 장 화백이 1953년에 서울 미대에 입학했다면, 신흥초등학교 교사 근무 기간은 고작 ‘1년 남짓’ 정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대 입학생으로 國展 출품 세 작품 모두 입선

장선백 화백의 미술 실력은 유년시절부터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선친으로부터 “너 깡통을 차려거든 미술대학에 가라.”는 호통을 들었으나 끝내 부산의 서울미대에 입학한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던 1953년 11월, 제2회 국전(國展)에 <해바라기> <국화> 등 수채화 작품 2점과 유화 <봉원사> 1점을 출품하여 세 작품 모두 입선한다. 이 입선으로 말미암아 ‘3학년생부터 국전 출품 가능’하다는 서울미대 규칙을 어겼다 하여 자퇴하라는 야단까지 들었으나, 결국은 그림 재주가 교수들의 눈에 띄어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게 된다.

 

1991년 3월 1일 故길영희 선생 기념사업회 추모제 때 동기들과 함께한 장선백 화백(왼쪽 두 번째)

 

이후 1960년까지 국전에 출품해 동양화, 서양화 두 부문에서 12점이나 입선한다. 다만 1959년 개최된 제8회 국전에서 특선과 입선을 동시에 차지한다. 특선작은 서양화로 오늘날 흔히 차이나타운이라 일컫는 북성동 중국인 거리 풍경을 그린 「청관」제호(題號)의 작품이 차지했다. 입선작은 인천 항구 풍경을 그린 「제물포」였다. 자기가 성장하고, 또 몸담아 살았던 ‘인천’이 주제였던 것이다.

공교로운 것은 당시 인천에 연고를 두고 활동하던 화가로서 장 화백보다 10년 가까이 연상이었던 임직순, 이달주 두 화백이 이 해에 장 화백과 똑같이 서양화 부문에서 특선에 입상했다는 사실이다. 입상 작가 현주소만 보아서는 당시 인천 작가 세 명이나 한꺼번에 특선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니 다른 지역에서 ‘인천에 대단한 서양화가들이 여러 명 있군.’ 하는 선망(羨望)을 받았을 듯하다.

장 화백이 화가로서 첫 작품 전시회를 가진 것은 1958년이다. 4월 6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던 것이다. 「십자가」 「해바라기」 등 총 27점의 작품을 통해 젊음의 패기와 개성과 예술혼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보여 주목을 받았다.

“씨(氏)가 가지는 새로움에 대함과 자기의 개성에 부닥치는 경지를 추궁하여 이루어진 이번 첫 개인전은 많은 기대가” 된다는, 4월 8일자 조선일보의 “신인 화가”를 격려하는짧막한 평도 확인할 수 있다.

 

졸업년도에 미국 뉴욕 초대전 작가로 선정, 입지 굳혀

그러나 실제 이 전시회보다 1년 전에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아 미국에 진출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1957년 8월 9일 미국 조지아대학 미술학 여교수 프세티가 내한해 한국 미술의 미국 전시를 위해 작품을 직접 심사하는 중에 장 화백의 작품이 두 점이나 선정되었던 것이다.

이 전시회의 주최자가 뉴욕 월드화랑으로 알려졌으나 전시 공식 명칭, 목적 등은 불명하다. 그러나 장 화백의 작품이 당시 한국 화단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선배들 곧, 김기창, 박래현, 장우성, 이응로, 김세중, 도상봉 장욱진, 변종하, 박로수 같은 분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어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게 된다.

특히 한국인 미술 관계자 누구의 조언이나 설명 없이 오직 프세티 교수의 개인적인 실사 방문과 각 미술 단체의 작품 등 총 4백여 점을 심사한 결과 최종적으로 서양화 48점, 동양화 42점, 판화 11점을 선정했는데, 거기에 불과 23세의 청년 화가였던 장 화백의 작품이 뽑혔다는 사실이다.

1953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던 해에 국전 입선 기록을 세운 장 화백은 1957년 졸업하던 해에 또 한 번 미국 뉴욕 초대전 작가로 선정되면서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20대 초반이었지만, 장 동문의 미술 세계가 이방인 미국인 교수의 눈에도 얼마나 그 재능, 기법이 개성적이고 독특하게 비쳤는지 짐작케 한다.

장 화백은 앞에서 언급한 1958년 4월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98년 11월 정년 퇴임 기념전에 이르기까지 평생 19회에 달하는 국내 개인전과 1983년 뉴욕 한국문화원 초청 개인전을 비롯해 총 4차례에 걸친 해외 개인전 등 실로 ‘개인전의 작가’라고 할 만큼 부지런하고 정열적인 화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여기에 대소 초대전, 그룹전 등에도 실로 열성적으로, 빠짐없이 작품을 걸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지면에 그 모든 전시회 명칭과 대표작으로 호명되던 수많은 걸작들을 일일이 다 열거해 적을 수는 없다. 그런 중에도 다만 향리(鄕里) 인천 중구 신포동 옛 은성다방에서 열었던 개인전과, 인천중학교에서 똑같이 인천고등학교를 나오게 된 운명의 동기생 김영달 동문의 시집 『旅程』의 표지를 그린 일, 그리고 자신이 공부하고 후일 교사로 봉직했던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교지 『春秋』의 표지화를 그려, 이 그림을 영원히 후배 동문들에게 남긴 이야기만은 굳이 여기에 밝힌다. 이 같은 사사로운 일들을 통해 장 화백의 또 다른 인간적 면모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지 『春秋』 3호, 4호

 

자선미술전에 앞장서다

그밖에도 화가 장선백의 내면을 알려 주는 행적은 또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장 화백은 틈틈이 개인전을 열어 그 수입금을 교회에 기부하는 자선을 베풀기도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재능기부의 원조 격이라고 할까….

1974년 2월 1일부터 5일까지 매일경제신문사 후원으로 미도파화랑 4층에서 개최된 <聖 라자로마을을 위한 장선백자선미술전>도 그 한 예였다. 이 전시회에서 얻어진 수입금은 전액 성 라자로마을의 한센씨병 환자를 위해 쓰였다.

이 같은 선행이 알려져 전시 첫날에 이미 당시 홍성철 내무장관을 비롯해 선우종원 국회사무총장, 박영일 미도파 사장, 김성진 콘티넨탈관광주식회사 사장 등이 8점을 구입하는 기록을 세웠다.

 

성자라자로마을 돕기 자선 개인전 오프닝  1974. 2. 2. 매일경제신문
성자라자로마을 돕기 자선 개인전 오프닝 1974. 2. 2. 매일경제신문

 

최종적으로는 21점이 판매된 가운데, 당시 유명 연예인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탤런트 장욱제도 구입자로 이름을 올린다. 이 전시회에는 장 화백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작품 「부활」 등 34점이 전시되었던 것도 특기할 만하다. 장 화백은 이듬해인 1975년 3월 성 라자로마을 미감아(未感兒) 돕기 그림 바자회에도 도상봉, 손응성, 김기창, 장우성 화백 등과 함께 작품을 희사했다.

물론 이보다 앞선 1970년 12월에 장 화백은 이미 자신이 다니는 본당인 서울 세검정성당 건립 기금 모금을 위해 동양화 15점, 서양화 28점을 모아 명동 YWCA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어 모금했던 전력도 있다.

한메 장선백 화백은 1989년 10월 세계성체대회기념화전을 열어 「평화」 「십자가의 길 14처」 「부활」 「절두산」 등 천주교 주제의 채색화와 산수화 등 30여 점을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가톨릭미술전에도 매해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장선백 화백의 2007년 작 <부활> 90x90cm

 

불같이 뜨거운 열정,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

선생의 일생은 부단한 자기 성찰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회의 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직선의 길이었으며, 번다한 수식어로 내면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알몸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것이기도 하였다.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역사, 사회적인 관심사에 이르기까지, 또 세태와 시류에 대한 비판에서 삶과 예술의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자신에 대한 한없는 엄격함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견해를 피력하였다. 좌우를 살피지 않고 타협과 절충이라는 말을 뒤로 한 채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판단에 따라 자신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가치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선생의 삶은 때로는 모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운 추상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러한 가치들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어떤 것보다 분명한 설득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선생의 삶은 그렇게 일궈진 것이다. <중략>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구애됨이 없는 분방하고 다양한 작품세계를 펼쳐 보였던 선생의 작업은 결국 수묵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나 형식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선생의 삶과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불같이 뜨거운 열정과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으로 수묵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거침없는 운필과 거침없는 기세로 표출해 낸 「부활」은 선생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명쾌한 화면과 여유로운 여백, 그리고 활달한 운필을 통해 표출해 낸 동해 일출의 장관은 어쩌면 단순한 자연에 대한 예찬이거나 수묵의 심미적 발휘에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선생이 말한 「부활」은 바로 우리 미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확인을 통해 현대라는 시공 속에서 다시 한 번 부활할 것을 염원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달빛'으로 상징되는 왜곡된 가치의 온전한 청산이었다. 결국 "예술에 국경은 없어도 국적은 있다."라는 선생의 말은 바로 당신이 추구하던 예술의 궁극적 지향의 해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1972년 영남대학교에 한국화과를 개설한 것 역시 이러한 신념의 구체적 실천이라 할 것이다. 더불어 동서의 시공을 넘나들며 전통과 현대의 의미에 천착했던 선생의 일생 역시 분명한 좌표의 확인을 통한 근본과 실존의 확인인 셈이다. '달빛'을 대신하는 욱욱한 동해의 붉은 '햇빛'은 바로 선생의 삶과 예술을 통해 육박하고자 하였던 절실한 상징인 셈이다.

인용이 다소 기나, 이 글은 고 장선백 화백 3주기에 맞춰 2012년 4월 18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동덕아트갤러리에서 개최된 <한뫼 장선백 유작전>에 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가 김상철이 쓴 추모문 형식의 글 「달빛 문화를 청산하며」의 부분이다. 장선백 화백의 화가로서의 인간과 예술의 진면목을 읽을 수 있기에 옮긴다.

지상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언제나 새날에 담긴 내용이 낯설고 어제의 틀을 깨고 새 틀을 짜는 오늘이 있을 뿐이다. 어제 같은 오늘이나, 오늘 같은 내일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글은 실제 장 화백이 남긴 자서전 형식의 글 모음집 『달빛 문화 청산』에 실린 글의 내용이다. 이 짧은 글귀는 장 화백의 화가로서의 지론이라 할 것인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나가던 실존적 삶의 태도와 정열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일찍 탈퇴하기는 했으나, 애초 장 화백이 “기성 가치관을 거부하는 반 전통, 반 조형을 내세우고 재래의 소재와 방법에서 벗어나 동양화의 전통적인 관념을 타파하는 여러 기법을 구사”하던 동양화 그룹 묵림회(墨林會) 가입 사실도, 바로 앞에 인용해 보인 내용 그대로 장 화백의 그 같은 작가 의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1960년 미술 선생님으로 만났던 장선백 선배님! 생전에 서양화 작품에도 한메라는 호를 표기하는 독특한 화가, 흰 살결의 환한 눈매의 미남형 용모,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 저음의 부드러운 음성에 따라붙는 명창 등, 호남의 조건을 두루 갖춘 영원한 정열의 화가, 한국 화단에 ‘한메’로서 우뚝한 장선백 화백! 동문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그이의 모든 것이 오늘 그립다.

 

장선백 화백의 1957년 작 〈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