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12월, 바람의 색
바람의 색을 아시나요? 곁을 스쳐감으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바람은 꼭 시간을 닮았습니다. 단어를 바꿔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시간의 색을 아시나요?
이 둘은 지나가며 흔적을 남김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뿐 색은 볼 수 없게 꽁꽁 숨겨져있죠.
오래도록 제가 캔버스에 그리고자 하는 것이 결국 이러한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을 자연이 주는 힌트들을 잘 관찰해 내면에 그려봅니다.
그리고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눈을 뜹니다. 그러면 신기루처럼 그 형상이 사라져버립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아련한 인상을 쫓는 일이 지금까지 제가 해온 일입니다.
‘컬러칼럼’ 마지막 호를 한 해의 끝에 쓰며 ‘바람의 색’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대학교 졸업전시회에 걸었던 2011년도 작품입니다.(그림1) 당시 저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장소의 외관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그 공간을 ‘집’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공간 내부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와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로 바뀌는 공기의 흐름 등...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그려야 하지?’
어느덧 저는 사진이나 기록을 참고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고 공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내면에 떠오르는 공간의 인상을 참고하게 되었습니다. 시각적인 것이 흐려진 그 덩어리의 색감을 먼저 찾고, 화면 위에서 빛을 설정해주며 공간을 그림 위에 구축했습니다.
이전에 없던 나만의 그리기 방식을 만들어가는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고, 저는 그 과정에서 좀 더 깊이 보게 되는 마음의 눈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림의 형식이 구체화 되며 빛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공간감을 만들게 되었고 벽과 같이 가로막혀있던 색과 색의 경계를 점점 더 허물어 갔습니다. (그림2)
2020년 작인 ‘The Forest Light'는 제목을 지을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작품을 완성하고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제목을 추천받았고, 투표를 통해서 제목을 지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에서 숲의 빛을 느끼신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제가 표현하려던 공간의 이미지와도 부합했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만나며,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면을 내가 어설프게라도 표현해내고 있구나 싶어 작업을 이어나가게 했습니다. 저의 작업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화해갔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과정에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안정적으로 어떤 스타일에 안착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아직은 가야 하는 길이 한참 남아있다는 강한 이끌림에 붓을 들고 몸을 움직였습니다.
어떤 형태로 완성될지 모르는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향하는 방향으로 끌어오다 보니 서서히 추구하던 작품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올해 시리즈로 진행한 한 작품인 ’Wave of memory.1' 에는 앞서 말한 ‘바람의 색’이 어렴풋이 담긴 것 같습니다. (그림3)
아무것도 없다 여겨지는 허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햇빛 아래 끊임없이 요동하는 작은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와 관계되어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제게 비밀스러운 세계처럼 여겨져 그 안으로 탐험을 떠나듯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그 내부의 지도를 언젠가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정도로 그려내는 것이 저의 목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하는 예술가가 있음을 마음 한편에서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미래에 저의 이 그림들과 생각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게 될지.
바람이 거세지는 2023년 12월에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지금까지 현대미술 작가이며 그림책 작가인 ‘고진이’의 [컬러칼럼]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