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 독립운동자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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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 독립운동자금으로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2.28 00: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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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만나는 월미도 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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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3·1절 노래 끝부분에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라는 부분이 있다. 19세기 중반, 우리나라는 정치적 불안과 가뭄이 계속되자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의 추진으로 1902년, 121명의 우리 선조들이 제물포항에서 미국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이민자 수는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약 7,400여명에 이른다. 살기 어려워진 농민과 노동자들은 만주나 일본 등지로 떠났고, 일제에 저항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쟁고아나 미군과의 결혼으로 이민이 이루어지다가, 1962년 해외이민법이 제정된 이후 취업이민이나 농업이민 등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 다양한 길을 떠났다. 그들은 새 터전에서 자식들 교육에도 힘썼고, 힘들게 노동한 대가로 얻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주었다.
 
그 길을 따라, 이민 간 사람들의 생활을 그대로 살려놓은 곳이 있다. 중구 북성동, 월미도 해사고등학교 앞 이민사박물관. 삼일절에 만나는 이민사박물관은 확실히 새롭다. 독립의 여망이 스며있는 우리나라 이민의 역사는 그 깊이가 다르다.
 
이민자 모집은 개항장  제물포를 비롯한 항구도시와 내륙 주요 대도시의 기차역, 시장 등에 모집 광고를 붙이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기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전통적인 유교국가에서 부모와 친척, 조상의 분묘를 버리고 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욱이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일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민사박물관에는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인 ‘고시’가 전시돼 있다. ‘…기후는 온화하야 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월 십오원(일본 금화 삼십원 : 대한돈으로 오십칠원가량)씩이고, 일하는 시간은 매일 십 시간동안이요, 일요일에는 휴식함…’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 일본 나가사키 항을 향해 이틀간의 항해에 올랐다. 이들은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검역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19명이 눈병, 피부병 등으로 탈락해 아예 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102호만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에 86명이 상륙 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협궤열차에 탑승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하였다. 가죽채찍을 든 관리인의 감시를 받으며, ‘방고’라는 신분증을 목에 걸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힘들게 일했다. 진열된 가죽채찍을 보면 왠지 울컥해진다. 나라 잃은 이들이 낯선 땅에서 당했을 수모와 심리적 상실감이 어떠했을까.
혼기를 훌쩍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들은 궁여지책으로 중매쟁이를 통해 신부를 찾기 시작했다. 약 700명 정도의 '사진신부'들이 결혼하기 위해 신랑 될 사람의 사진 한 장만 들고 하와이로 갔다.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15살. 사진신부들은 개척자로서 강인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박물관에는 '사진신부들의 이야기'가 앨범 형식으로 준비돼있어 한 장씩 넘겨볼 수 있다. 이들의 육성증언도 들을 수 있다. 한인들은 하와이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발전하였고, 교회 내 활동을 통해 친목도모와 자녀의 한글교육 민족교육 문화교육 등에 힘썼다. 한글교본도 가져다 아이들 교육에 힘썼고, 더욱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겹게 번 돈을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등 모금 활동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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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는 대규모 불법 노동 이민도 있었다. 한 차례이지만, 1,033명의 한인이 제물포를 출발해 낯선 멕시코로 출발했다. 이들은 에네켄 농장으로 흩어져 4년 동안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국내에서는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사람을 파견해서 실태를 파악해야 한다고 했지만 멕시코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한인들의 생활은 향상되지 못하고, 이들 가운데 288명은 다시 쿠바로 재이민을 가게 되었다. 1945년 이후 쿠바 내정의 변화에 휩싸여 한인 단체들이 와해되면서 세대교체와 함께 정체성 상실도 가속화하였다. 특히 쿠바 혁명 이후 한국과 미국의 한인회 등과 단절되어 전통적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이어가기 힘들게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원주민들과 결혼하면서 뿌리를 잊은 채 동화해 쿠바의 코레아노가 되었다. 이밖에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로도 이민을 갔다.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은 불꽃처럼 번져나가 세계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중국, 러시아, 일본에서 동포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운동을 펴 국내의 3·1독립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이후 미주 한인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외교 및 선전활동의 전개와 독립 자금의 모금.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 지도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대한인동지회를 통해 외교적 노력을 위주로, 안창호는 미주 본토에서 활동하며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민족 교육적 입장에서, 박용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독립단을 통해 군사적 노선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2009 재외동포현황’에 보면 현재 전 세계 170여 개국에 약 680만명의 해외동포가 산다. 이민사박물관에는 각 나라별로 한인들의 이민경로와 발자취, 삶의 흔적들이 나타나 있다. 특히 여성들은 모임을 만들어 어려운 동포를 도와주거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나라의 자주독립을 진심으로 바랐다. 이민사박물관은 교포들이 개관 후 기증한 물품이 많다. 간혹 이민자들이 와서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을 찾는다. 호주 이름만 영어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등등으로 자신을 찾아야 한다.
이민자들은 텃밭에서 채소를 가꿔 한식을 먹고, 우리 문화를 잃지 않기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모임을 만들어 이어가려 애썼다. 이민 1세대는 농장에서 일해 자녀교육과 독립자금을 대고, 이민2세대는 스포츠클럽이나 사교클럽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박은미 학예사는 “이민사박물관은 현재 인천에 있는 박물관 가운데 사람이 가장 많이 찾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 앞으로는 아시아 쪽으로 이민 간 사람들의 생활의 흔적을 찾아 전시할 것이다. 이민사박물관에 오면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해 설명을 들을 수 있다”라면서 “따지고 보면, 이민사 이야기는 1백여년전에 일어난 현재에서 무척 가까운 역사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이민사는 인천과 관련이 깊다. 인천국제공항이 인천에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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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정 2013-02-28 11:40:01
이번 휴일에 찾아봐야 겠네요

유경석 2013-02-28 08:54:38
매번 느끼는 건데 기사에 오탈자가 꼭 있네요. 중국 북성동 -> 중구 북성동.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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