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탄듯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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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탄듯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는 곳!"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3.21 0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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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구 최초의 공립박물관, 소래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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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곳에서 볼 수 있게 하자. 산업화 도시화로 옛날 모습이 사라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예전 모습을 보여주자. 전시 테마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소래갯벌, 수인선, 소래염전, 소래포구. 디오라마로 실감나게 전시했고, 터치스크린으로 체험도 할 수 있다.” 김춘식 학예연구사는 박물관이 세워진 취지를 설명하면서 “특히 아이들은 열차 센서를 작동해서 움직이게 하는 걸 좋아하고, 어른들은 1층에 실제 제작된 열차를 보고 즐거워한다”고 전했다. 남동구 아암대로(논현동)에 있는 소래역사관은 지난해 수인선 재개통을 하루 앞두고 문을 연 남동구 최초의 공립박물관이다.

2층 전시실부터 둘러보았다. 전시실 왼쪽에 있는 ‘소래역’ 간이역에 들어서면 왼쪽에 푯값이 써 있다. 인천항이 25원이다. 그 옆으로 연기를 내뿜는 기차 사진이 붙어 있고, 그 옆으로는 바늘이 멈춘 커다란 궤종시계가 놓여 있다. 관람객들은 이제부터 바늘을 돌려 과거로 들어간다. 나무의자에는 보따리를 손에 움켜쥔 할머니가 버선발로 앉아 있다. 한쪽발은 의자에 올려놓고 기차를 기다린다.

소래는 광활하게 펼쳐진 서쪽바다와 갯벌을 배경으로 1933년 소래염전이 들어선 이후 소금을 수송하기 위한 소래역과 소래포구가 형성되며 발전한 항구도시다. 지금은 소금창고도 협궤열차도 모두 옛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꽃게와 새우가 가득 실린 배들이 포구에 닿을 때 항구의 어시장은 여전히 활기차다. 소래’라는 말은 설이 여러 개다.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그렇다고도 하고, ‘가늘다, 좁다. 뾰족하다’는 등의 뜻을 갖는 우리말 형용사 ‘솔다’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소래포구 주변에 소래산 오봉산 등 작은 산들이 퍼져있는 만큼 산봉우리의 뾰족함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당나라 소정방이 나당 연합군의 일원으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중국 산둥반도의 래주(萊州)를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소래산에 도착했는데, 소정방의 ‘소(蘇)’와 래주의 ‘래(萊)’를 합해 ‘소래’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 ‘솔’을 이름에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주변냇가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내[松川]’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높은 곳이나 맨꼭대기를 뜻하는 말로 ‘수리’에서 발음이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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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8월 6일 달리기 시작한 협궤열차는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안산 원곡고개에서는 힘이 달려 손님이 함께 밀었다거나, 트럭과 부딪쳐서 기차가 쓰러졌다거나 ‘꼬마열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도 많았다. 송도역 주변에는 반짝시장도 섰다. 젓갈이나 채소를 가지고 나온 아낙들이 송도역 가까이에 모아놓고 팔고 샀다. 서민의 발 역할을 충실히 하던 꼬마열차는 그 이후 국도가 생겨나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시작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내 58년 만인 1995년 12월 31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다 지난해 6월 30일 수인선이 재개통되면서 그 시절 협궤열차의 추억과 소래 사람들이 꿈을 되찾아주게 되었다.
 
소래철교는 남동구 논현동 소래포구와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을 잇는다. 폭 1.2m, 길이 126.5m다. 궤도는 표준열차의 반인 762㎜다. 증기기관차와 디젤동차로 운행했으며, 증기기관차가 시속 18㎞로 4시간 주행, 디젤동차가 2시간 20분 만에 주파하여 증기기관차는 화물용으로, 디젤동차는 여객용으로 사용했다. 객차 길이는 14.7m였다. 수인선은 1937년 개통 이후 경기 내륙지방으로 미곡, 소금, 해산물 등을 공급하는 통로 역할을 담당하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도로교통의 발전으로 이용객과 화물이 현저히 줄어들어 경제성이 크게 낮아졌고, 결국 1995년 사라졌다.

역사관 1층에는 소래염전의 역사와 소금이 전시되어 있다. 소래염전은 1930년경 공사를 시작해 1934년 첫 소금을 생산한 이후 1993년에 폐염전이 되었다. 일찍이 주안, 소래, 남동 등 염전 지대에서 천일염이 성행하여 한국 최초로 천일제염을 개척한 선구지이면서 한때 한국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다. 또한 소래 갯벌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이용해 소금을 생산했는데, 이 소금은 소래포구를 통해 수인선 협궤열차를 통해 배로 인천항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보내졌다. 소래 염전의 소금은 생필품만이 아니라 일제의 전쟁을 위한 화약제조용 군수품으로도 쓰였다. 1970년대 전국 최대 천일염 생산지였다가, 2009년에는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바뀌었다.

‘소금’하면 ‘전매제도’도 빼놓을 수 없다. 고려 1288년에 처음으로 염전에서 세금을 거두었고, 1309년에는 도염원을 설치해 ‘전매제도’를 실시했다. ‘전매제도’는 국가가 재정 수익을 얻기 위해 특정 물품에 대한 판매와 생산의 권리를 독점하는 제도다. 조선 초기에는 각 지방관의 감독하에 자유로이 소금을 만들었으나, 이후 염업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전매국에서 소금을 주관하여 경제수탈을 목적으로 우리나라 염전을 개발하고 소금을 착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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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은 ‘소금밀대’를 직접 밀어볼 수 있다. 염전에 가둬져 햇빛을 쬐고 바람을 쐰 바닷물에는 소금막이 생긴다. 이 소금막을 거둬들이는 도구를 ‘소금밀대’라고 한다. 채취한 소금의 간수를 빼기 위해 저장하는 곳은 ‘소금창고’다. 보통 간수가 잘 빠지도록 바닥을 나무로 만든다. 전시실에는 소금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어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천일염, 암염, 정제염, 재제염, 가공염이 전시돼 있다. 염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수차’도 있다. ‘수차’는 원래 논에 물을 대는 도구였으나 염전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물을 대는 입수방식은 위로 올리는 급상과 아래로 내리는 급하가 있다. 염전 단계별로 경사가 없을 때에는 급상을 위해서는 수차에 모터가 필요하다. 수차는 장대, 문집, 발판, 날개, 삽으로 이루어진다.

끝으로, 수인선 협궤열차에 오를 수 있다. 비록 실물 복원이 아닌 일부를 생략하거나 70% 축소된 열차다. 객실이 워낙 좁아 앉아있는 사람들이 무릎이 닿을 정도인지 경험할 수 있다. 꽃게나 새우를 사기 위해 소래포구를 찾을 일이 있다면, ‘소래역사관’에도 들러볼 일이다.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몇 십 년을 단박에 거슬러 올라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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