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메우면 우리 땅 되는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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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메우면 우리 땅 되는 줄 알았어."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10.1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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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나와 소래포구서 50년간 젓갈 팔아온 김관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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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면 소래포구가 더 북적거린다. 김장철을 앞두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까닭이다. 인천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까운 서울이나 수원에서도 많이 온다. 제철 생선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고, 젓갈을 찾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발 디딜 틈이 없고, 평일 오후에도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짭쪼름한 젓갈 냄새가 입맛을 다시게 하는 골목길, 그 한쪽에서 오십년 동안 ‘차씨상회’를 꾸려오고 있는 김관실 할머니(86)를 만나봤다.
 
 
죽겄다고 메워놓으면,
바다에서 물이 들어와 철럭철럭,
메운 데가 다 쓸려가는 거야
 
“장사한 지 사십년이 넘었는데, 뭘, 사십년이 뭐야, 오십년이 다 돼가는데. 옛날 박정희 대통령 1기 나오고 2기 나올 때 여기 공사가 시작됐거든. 대통령 2기 채 나올 때 공사했어. 옛날에 여거이 다 바다랬어, 바다. 땅이 아니고 다 바다랬소. 여기까지 다 바다랑 똑같았지. 바다를 메워서 땅을 만들었지. 그때 우리 소래 시민이 몇 명 안 됐거든. 집도 없었어. 여기 뒤에는 개인땅인데, 거기는 물이 덜 찼어. 거긴 물이 덜 올라가고, 여기는 물이 철럭철럭 넘쳐났어. 갯골에 물만 들어오면,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이 차는 거야.”
 
“그러믄 여기 집을 지을 수가 있어? 집을 못 짓고 뒤에 하꼬방을 짓고 살았어. 하꼬방에 살면서 없이 사는 사람들이 메워보자, 소래 시민이 메워보자, 여기서 살자, 남의 땅에서 살지 말고 메워서 살자 그랬어. 그래서 메우기 시작했는데 몇 명이 안 되니끼니 힘들었어. 요 아래 돌섬이 있었어. 배로 거기에 가서 돌 실어 와 메웠어. 여기 소래 시민이고 장사하는 사람이고 배 부리는 사람이고 일심동력으로 메운 거야. 메우면, 조금이라도 메워야 하니까 죽겄다고 메워놓으면, 바다에 물이 들어오면 철럭철럭, 메운 데가 다 쓸려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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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상회들이 늘어선 골목. 짭쪼름한 젓갈냄새가 사람들 발길을 붙든다.
 
 
“하다하다 안 되니끼니, 박정희 대통령한테 각서를 넣은 거야. 이걸 좀 도와달라구. 여기 메우면 그럭저럭 살 것 같으니, 좀 도와달라구. 사는 사람들 몇 명이 전부 다 진정을 넣은 거야. 진정을 넣으니까 대통령이 내려온 거야. 마누라 살아있을 때 같이 내려온 거야. 땅을 메우면 살 수 있냐 하는 거야. 땅을 메우면 살 수 있고, 이 갯터에 배가 왔다갔다 하니까 여기서 고기 잡아다 먹구, 장사해 먹구 배불리 먹고 할 수 있다고 했지. 좀 도와달라고 하니끼니 진짜 해놓으면 살 수가 있느냐 했어. 진짜 살 수가 있다구. 대통령이 올라가서 여기 사람 사서 하라구, 여기 인구가 몇 명이 안 되니까 사람 사서 하라구 돈 400만원 보내준 거야. 그 돈으로 사람 사구, 배로도 사람 사구, 육로로도 사람 사구 이렇게 메우구, 돌 실어다 메우고 흙 퍼다 메우고 공구리 양회 치니까 되더라구. 물이 들어와도 쓸려나가지 않더라구. 그렇게 그럭저럭 한 거이 몇 번 한 거야. 한 번에 못하구. 몇 번 매립해서 이만큼 한 거야. 큰 공사 한 거지, 뭐.”
 
 
그때 동차가 다녔거든
다라이에 생선 담아서, 동차 타고 수원까지 가서 팔았어
매립되기 전에 큰 고생했지
 
“매립하는 대로 살았지. 매립하는 대로 바다 가까이 나가서 살면서, 매립하면서 살구, 이거 몇 년을 한 건지 몰라. 매립해서 살구, 매립해서 살구. 이젠 발전이 많이 된 거지. 옛날에 대보면. 고기 잡아다 팔구. 배 부리지 못하는 사람은 고기 잡아다 우리한테 넘겨주면 넘겨가지고 팔아서 살구. 팔다 못 팔면, 수원까지 가서 팔았어. 그때 동차가 다녔거든. 인천 송도에서 수원까지 나가는 동차가 있었어. 그 차 타고 나가서 수원 나가서 다라이에 가져나가서 팔아가지고 오구 그랬어. 그렇게 살았어. 큰 고생했지, 매립되기 전에는.”
 
“그땐 갖다 팔고, 매립이 되니까 차차차 사람이 모여들었잖아. 수원까지 나가지 않고 여기서 팔구, 받아다 여기서 팔구 이 자리에서 팔구. 고기 잡아오는 사람, 다 먹나? 팔지. 우리한테 넘기지. 우리는 받아서 팔구, 배 부리는 사람 배 부리고, 배 부리는 사람 저희들 살구, 우리한테 넘겨서 살구. 매립되기 전에 그렇게 살다가 많이 개발됐지, 이거. 여기를 누가 바다라고 해? 싹 밀어서 바다라고 안 하지.”
 
 
우리가 메우면 우리 땅이다,
우리 땅이 되는 줄 알았어
근데 여기저기서 땅세를 내라는 거야
지금도 죽갔다고 장사해서 땅세 내고,세금 내
 
“이거이, 바다랬어. 땅이 아니랬어. 소래 시민들이 메우면 우리 땅이 되는 줄 알았어, 메우면. 우리가 메웠으니까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지. 근데 여기저기서 관리하는 사람이 나타나 땅세를 내라는 거야. 땅세도 많이 내구 살아, 여기서. 우리 세금 많이 내고 살아. 우리가 메우면 우리 땅이다, 우리 땅인 줄 알아서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어. 그랬는데, 땅세도 많이 내고 살아요. 땅이라고 해서 우리가 죽갔다고 메운 땅이야, 이걸. 메운 땅인데, 그걸 가지고 우리가 땅세 내고 이렇게 해서 공무원들 월급 타고, 뭐. 우리가 잘못 한 거 하나도 없지. 바다 메워가지고 땅세 내고 그리고 장사 죽갔다고 하고 땅세 내고, 세금 내구…. 옛날엔 바다랬어요. 땅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여기 매립한 땅인지 다 알아. 우리가 얘기를 안 해도, 대한민국에서 바다 메워서 땅 만든지 다 알아요. 옛날부터 여기 바다됐던 걸 모르는 사람 어딨어. 그렇게 살았어. 산 생각 하면, 옛날 산 생각하면 고상 많이 했지, 그럼.”
 
 
육이오 때 평양에서 내려왔어
단벌신사로 내려와 고생 많이 했지
5,60년 살았으니 여기래 이중고향이지
 
“고향은, 이북이야. 육이오 되면서 나왔어. 여기래 이중고향이지, 뭐. 이제 50년 60년 사는 동네니까 이중고향이지. 한 20살 때 이북에서 내려왔어. 결혼은 여기 나와서 했지. 그때 할아버지 나이가 스물댓 됐지. 장사는 결혼하자마자 했지. 우리 영감 고향도 평안북도야. 나는 평양이구. 내 이름이 김관실이야. 옛날에 우리 집안에서 오빠들 이름 따라 돌림자로 하느라고 ‘관’자로 돌렸지. 김관실. ‘매실 관’자. 우리 영감은 돌아간 지 이십 년 넘었어. 우리 영감이 차씨였어. 애들이 어리니까 혼자 하다가, 이젠 애들이 크니까 같이 장사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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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과 하루종일 바쁜 김관실 할머니. 전화로 주문을 받고 있다.
 
 
“고생 많이 했지. 단벌신사로 나와서, 육이오 때 나왔으니까 고생 많이 했지. 여기 사람들 다 그래. 피란 나와서 사는 사람 많아. 매립은 우리가 와서 했지. 주민이 한 스무 사람 됐나. 없는 사람끼리 나 같이 이렇게 나온 사람들끼리 살았지.”
 
 
동차는 하루에 서너 번 다녔어
방통이 서너 통 됐지
왜정 때 석탄 나르던 차래
없어졌을 때 많이 서운했지
 
“아, 기차 댕겼지. 수원시장에 가서 팔았어. 역에서 내리면 장사가 되나. 수원역에서 조금 들어가서, 시장에서 팔았지. 다라이 이고 가서 팔았어. 그때 차가 있어야지, 싣고 다니지. 기차는 하루에 주로 나가는 거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되구, 들어오는 거 세 번인가 네 번 됐지. 시간을 딱딱 맞춰서 나가야지. 기차 방통이 아마 서너 통 됐지. 레리(레일) 열차보다는 좁지. 옛날에 왜정 때 석탄 나르던 차래, 그거이 동차가. 동차라고 했어.”
 
“기차 없어진 지가 오래됐지. 한 십년 넘었갔다. 기차가 없어지니 서운했지, 많이 서운했지. 차래 금방, 전철이 금방 난다 금방 난다, 금방 나? 금방 안 나지. 동차 없어지니 많이 서운했어. 동차로 움직여야 됐거든. 수원 나가는 길을. 여기서 바로 위에 올라가면 역전 있는데, 역전에서 타면 수원 나가는 길 있었어. 동차 있을 때는 고생 안 했지.”
 
 
부평쪽 산에 굴이 많아
도라무통을 굴 속에 뒀다가 가져오는 거지
새우젓, 굴젓 여기 젓갈은 뱃사람들이 담가다 줘
 
“가을이라 손님이 많아졌지. 가을이 왔으니까 좀 낫지. 김장 때니까. 아무래도 가을이니까 손님이 들지. 새우젓은 직접 담글 수 없어. 잡아오지 않아? 여기서 잡아오구, 강화서도 들어오구, 그래. 새우젓은 뱃사람들이 담가다 줘. 굴젓도 담가다 줘. 도라무통에다 담가다 주잖아. 부평 굴 속에다 뒀다가 가져와. 굴에서 있다가 내오는 거지. 굴에 다 있으니까. 부평 산에 굴 많아. 몇 개 돼. 거기다 보관해 뒀다가 팔 때 가져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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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동차(협궤열차) 다니던 길(왼쪽)과 현재 수인선이 다니는 철로. 고기잡이 배가 돌아온다.
 
 
“나는 여기 시장보다 조금 뒤쪽에 살아. 아침에 밥 먹고 나오는 거지. 아홉시쯤 되면 나오는 거지. 딸들하고 장사를 같이 해. 이제 집에는 못 있어. 여기 나와서 살아서. 5,60년을 여기 나와서 살던 사람이라 집에는 못 있어. 답답해서 못 있어서. 나와서 도와주구, 참견하구. 나는 당뇨도 있구 그래. 나이가 되니까 병이 생기더라구. 이도 틀니야. 이거 다 심었어. 내 이는 몇 개 안 돼. 다 심었어.”
 
“이 동네는 매립된 지가 사십년이 넘었어. 그때부터 젓갈을 판 거야. 일루 쭉 내려가면 30개 돼. 뒤에가 열한 개 되구.”
 
 
젓갈 맛있는 건 제각각 식성으로 가
어느 게 맛있다고 할 수 없어
나는 안 가리고 다 좋아해
 
“젓갈을 만드니까. 젓갈 맛있는 건 제각각 식성으로 가. 오징어젓 좋다는 사람, 낙지젓 좋다는 사람, 꼴뚜기젓 좋다는 사람… 다 지 식성으로 가. 어느 게 맛있다고 할 수가 없어. 다 식성으로 가니께. 나는 안 가리고 다 좋아해. 새우젓도 조개젓도 무쳐 먹고. 우리 영감은 그냥 다 좋아했어.”
 
“이제 반찬을 만들지 않고, 만든 걸 사가요. 이것 저것 쪼금씩 쪼끔씩 사가. 반찬 있으면 밥 먹지, 반찬 없으면 밥 못 먹잖아. 그러니까 반찬을 조금씩 사가지.”
 
“회도 잘 먹는가 보데. 저기 앉아서 먹으니. 내가 회 장사가 아니라 얼마나 팔리는지 그건 모르지. 내가 회 생계를 모르지.”
 
 
여기 소래포구 물건은 싸고 좋잖아
나쁘면 사람들이 또 오겠어
장사꾼은 물건 좋게끔 팔아야 돼
 
“매립하면서 바뀐 거지. 바다였을 때는 사람이 댕겼어? 매립하면서 사람이 당기면서 사람이 오기 시작한 거지. 옛날엔 매립하고선 많이 왔지. 다른 데보다 싸고, 물건 좋구. 물건을 도라무통에서 꺼내 팔구. 시장같지는 않잖아. 여기 꺼 가져가면 1년을 먹어도 냉장고에 넣고 먹으면 변질이 안 돼. 좋잖아. 좋으니끼니 오지, 나쁘면 오나? 좋은 물건 팔아야지. 텔레비전에 나오면 뭐 좋다 어떻다 하는데, 우리가 물건을 좋은 걸 팔아야 계속 팔아먹지. 물건을 좋게끔 파니까 와서 먹고서 또 와서 사구, 또 사는 거지. 우선 나쁘게 팔면 사람이 안 사요. 장사꾼은 계속 장사하려면 먹구 살잖아. 좋은 물건 팔아야 사람이 계속 오는 거지. 사람을 끌려면 좋은 물건을 팔면 되는 거야. 한 번 먹으면 좋으면 계속 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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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수인선 뒤로 아파트숲이 보인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세워진 논현지구는 예전에 과수원과 축사가 있었고,드문드문 촌집이 있었다.
 
 
“여기는 6젓이 가장 좋은데, 5젓, 추젓도 좋아. 6젓이 제일 무쳐먹기는 좋고, 김장 때까지는 5젓, 추젓이 좋아. 자기 추젓 좋다고 가져가는 사람, 5젓 좋다고 가져가는 사람, 6젓 좋다고 가져가는 사람, 자기가 먹어보고 좋은 걸 가져가는 거야. 우리가 좋다 나쁘다 할 필요도 없고 자기가 먹어보고 좋은 걸 잘 찾아가. 5젓 좋게 먹은 사람, 6젓 좋게 먹은 사람, 추젓 좋게 먹은 사람… 손님이 먹어보고 사가는 거야.”
 
 
 
예전에는 촌집, 시골집이 달랑 하나씩 있었지
이제는 전부 아파트 동네지
옛날에 대면 다 서운하지
 
 
“아파트가 많아졌지. 예전에는 촌집, 시골집이 달랑 하나씩 있었지. 지금은 그거 다 없애구 아파트 지었지. 전부 아파트 동네지, 이제. 촌집은 없어. 그 사람들 다 집보상 받아갖구 아파트 들어가서 살구 있지, 뭐. 촌집 살던 사람들 다 보상이 나왔잖아. 옛날에 대면 다 서운하지, 뭐.”
 
 
 
할머니는 장사는 편안한 게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몸을 움직여야 가게가 돌아가고, 그래야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아오신 할머니, 할머니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가게에 나올 생각이다. 예전에 장사를 같이 하던 분들은 이제 거의 안 계시다. 나이가 있어서 몸이 불편하거나, 장사를 접으신 까닭이다. 김 할머니는 연세에 비해 귀도 밝고 말씀도 잘 하신다. 모쪼록 오랫동안 정정한 모습으로 뵙길 바라며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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