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상규 인생의 변곡점 ‘호산나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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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상규 인생의 변곡점 ‘호산나합창단’
  • 권근영
  • 승인 2021.02.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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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28) 상규와 형수 연희의 우정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송림동 골목에서 남숙과 중학생이 된 상규. 뒤에 서부교회가 보인다.

 

일요일 이른 아침, 상규는 부엌과 안방 사이 문지방에 걸터앉아 남숙에게 오백 원을 달라며 떼 쓰고 있었다. 붕어 낚시 가려면 왕복 버스비가 필요했고, 점심으로 라면이라도 하나 사 먹고 와야 했기에 돈이 필요했다. 아끼고 아껴 최소한으로 오백 원을 달라고 하는데, 남숙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남숙이 다니는 길목을 버티고 서서 온몸으로 땡깡 부리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영이 상규에게 말했다.

“야, 그냥 누나하고 교회나 가자.”

도영은 입이 한 됫박 튀어나온 상규를 데리고 송현성결교회에 갔다. 교회에 처음 와 본 상규는 어색해서 몸을 더 빌빌 꼬았다. 차마 유치부 교사 회의에 데리고 갈 수는 없어서, 잠시 고등부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고등부 예배가 시작되려면 1시간이나 남아있었고, 상규는 텅 빈 예배실에서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조금 있자 상규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누군가 상규에게 아는 체를 했다. 송림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졸업하고 3년도 더 지나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갑고 할 말도 많았다. 옆자리에 꼭 붙어 초등학교 때 얘기를 하며 떠들다가 동창은 상규가 노래를 좋아하던 게 생각이 나서 말했다.

“상규야, 성가대 할래?”

유치부 교사 회의를 마치고 고등부실에 온 도영은 깜짝 놀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에 온 상규가 가운을 입고, 성가대원들 사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건 도영만이 아니었다. 고등부 예배 시간에 목사님은 새 신자를 소개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학생들이 두리번거리며 새 신자를 찾았다. 그때 성가대원 사이에서 수줍게 상규가 일어났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새 신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황당해서 꺌꺌 웃었다.

상규는 일요일 아침마다 도영보다 먼저 일어나 송현성결교회에 갔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하는 게 무척이나 좋았다. 어느 날은 교회에 갔는데, 처음 보는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호산나합창단’을 홍보하러 나왔다고 말했다. 호산나합창단은 1957년에 창단한 인천 기독교 고등학생 합창단이었다. 인천에서 성가대를 한다면 누구나 알 정도의 단체였고, 매년 합창대회에도 참가하는 팀이었다. 혹시 관심 있으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말에 상규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오디션이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성가대 친구들은 공부와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까 봐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상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직 호산나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친구 원식과 오디션을 보러 갔다. 원식은 테너를 지원했고, 상규는 베이스를 지원했다. 둘 다 합격이었다.

호산나 합창단은 일주일에 한 번 모였고, 대회를 앞두고는 평일 저녁마다 모여 연습했다. 상규가 다니던 부평고등학교는 야간 자율학습(야자)이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합창단 연습은 야자에 당당하게 빠질 핑계가 되어주었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환하게 불이 켜진 부평고등학교를 뒤로하고, 동인천 YWCA회관으로 향했다. YWCA회관은 메인 연습 장소였다. 간혹 꽃꽂이 같은 시민문화 프로그램과 일정이 겹치면 장소를 조율해, 기독병원 아래 돌체 소극장이나 자유공원 아래 인천제일교회에 가서 연습했다.

인천제일교회는 1946년에 인천에서 최초로 생긴 장로교회라서 이름이 제일교회였다. 바깥에서 보면 교회가 삼각형 모양이고, 첨탑이 뾰족하게 솟아있었다. 내부는 울림이 좋아서 성가 연습하기에 아주 좋았다. 게다가 합창대회가 열리는 장소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연습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합창대회 날 도영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인천의 많은 합창단원 중에 둥글납작한 베레모를 쓰고 제복을 차려입은 상규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반짝반짝 빛났다. 호산나 합창단이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가난하고 차별받는, 세상에 소외된 사람들을 위로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집에서 막내이자 개구쟁이로, 귀하게 사랑받으며 자란 동생이 어느덧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하는 모습에 도영은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교회에 다니기 전 상규의 유일한 취미생활은 낚시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낙섬이나 동막에 가 망둥어를 낚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주말마다 바닷가에 나갔던 터였다. 가족이 많은 집 안에서는 욕심을 부리고 칭얼댔지만, 밖에 나가면 말수가 적고 혼자 있는걸 좋아했다. 그랬던 상규가 호산나 합창단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일상과 마음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변화의 첫 시작을 상규는 정확히 기억했다. 그것은 바로 게임이었다. 합창 연습을 한다고 모인 자리에서 게임을 했다. 박자 게임, 품바 게임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온갖 게임들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 해보는 상규에게 봐주기란 없었다. 걸리면 무조건 인디언밥(등짝)을 맞아야 했다. 상규는 열을 올리며 집중해서 게임을 했고, 금방 룰(규칙)을 익혔다. 후끈거리는 분위기는 합창 연습까지 이어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원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의견을 내고, 대화하여 조율하고, 섞여 지내는 법을 몸으로 터득하게 되었다. 연습 틈틈이 개인적인 이야기도 오갔다. 스무 살 이후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깊고도 진솔한 마음들을 나누며 상규는 친구들과 꿈을 키워나갔다.

상규에게는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성에 대한 것이었다. 좋아하는 이성에 대해 말한다는 게 여간 쑥스럽고 간지러울 수 없었다. 상규는 이런 고민을 예비 형수인 연희에게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예비 형수에게 속마음을 밝힐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첫 시작은 단순히 형의 협박 때문이었다. 상규의 형 인구는 연희와 장거리 연애를 하며 편지를 주고받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형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적어 예비 형수에게 점수를 얻으려고 했고, 그 요구가 가장 잘 먹혔던 사람은 막내 상규와 상규의 단짝 친구 강민이였다. 둘은 인구의 얇은 편지 봉투를 도톰하게 채워주었고, 면을 세워주었다. 연희는 인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상규에게 전하는 답장도 동봉했다. 예비 형수의 손글씨가 담긴 편지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편안하고 따뜻했다. 실제로 송림동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편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상규는 연희가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졌다. 상규는 그동안 형이 훔쳐볼까 봐 편지에 담지 못한 고민을 연희에게 털어놓았다.

1983년 10월 20일, 상규가 예비 형수인 연희에게 보내는 편지.

연희는 키가 크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덥수룩하게 났고, 목소리는 우렁찬, 고등학생인 시동생 상규가 귀여웠다. 결혼 이후에도 상규는 종종 연희에게 상담 요청을 해왔다. 내용은 주로 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연희는 명확한 해답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냥 답답한 속이 조금이나마 괜찮아질 때까지 끄덕여주고, 때로는 맞장구를 쳐주고, 계속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에는 상규가 집에 도착했는데, 연희가 부엌에서 난처한 모습으로 있었다. 그 옆에는 조개(동죽)가 한 자루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연희는 같은 골목에 사는 지수 엄마랑 같이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에 다녀왔다고 했다. 인천에 시집오고 처음으로 가 본 영종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지수 엄마를 따라 내려 한참을 걸었다. 바닷물이 빠진 갯벌에 들어가 손을 휘저으니 동죽이 손끝에 걸렸다. 호미도 필요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네, 다섯 개씩은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갯벌에서 동죽을 처음 잡아보는 연희는 신이 났다. 챙겨 간 양파망에 동죽을 가득 담았다. 너무 많이 담아서 갯벌에서 끌고 나오는데 고생을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영종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월미도에 내렸고, 월미도에서 버스를 타고 송림로터리까지 와서 수도국산 언덕까지 이 많은 동죽을 이고 온 것이다. 맛을 보려고 조금 삶았는데 모래 때문에 입안이 꺼끌꺼끌해 먹을 수가 없다며, 실망한 얼굴이었다.

상규는 고무대야에 동죽을 쏟아부었다.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는 소금을 넣었다. 그리고 날달걀을 띄웠다. 달걀이 가라앉으니 소금을 더 부었다. 달걀이 엄지손톱만큼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동동 뜨기 시작했다. 상규는 이제 동죽이 개흙을 뱉어낼 거라고 말하며, 바닷물을 같이 담아오는 것도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연희는 해감하는 걸 처음 배우게 되었다. 어렵게 잡아 온 동죽을 버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상규가 말했다.

“형수님 다음에는 같이 가요. 인천에 좋은 데가 많아요. 갯벌에서 조개 잡고, 물 들어올 때 망둥어 낚시하면 재밌어요.”

 

1983년 2월 10일 부평고등학교 상규의 졸업식날, 남숙과 상규 그리고 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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