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승전'과 '희생'의 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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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승전'과 '희생'의 양면
  • 강창대 기자
  • 승인 2013.09.20 07: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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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폭격으로 희생되고 거주지에서 쫓겨난 주민들 생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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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3주기(7회) 월미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인천시는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63주년을 맞아 국방부와 함께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 열린 ‘제6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는 송영길 인천시장과 최윤희 해군참모총장, 한국전쟁 참전용사 248명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륙작전 재연 등이 펼쳐졌다. 

인천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견될 정도로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손꼽힌다. 5천분의 1이라는 희박한 성공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까지 내몰린 국군의 불리한 전세가 한 순간에 역전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날 송영길 시장은 기념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이끌었던 맥아더 장군에 대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서 한국을 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칭송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승전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리는 가운데, 다른 관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탐방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당시 미군의 폭격과 함포사격 등으로 희생된 월미도 주민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도 열렸다. 

‘인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이하 평통사)는 작년부터 전문해설가와 함께 평화가 파괴된 현장을 탐방하며 ‘평화도시 인천’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를 넓히자는 취지를 갖고 ‘인천평화발자국’ 탐방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 9월 15일, 6회째를 맞은 인천평화발자국은 ‘레드비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갖고 열렸다. 

레드비치(Red Beach) 즉, 적색해안은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세 개 지점 가운데 하나이고, 현재 대한제분이 들어서 있는 중구 북성동 일대를 일컫는다. 청색해안(Blue Beach)은 남구 용현5동 해안도로 입구이고, 녹색해안(Green Beach)는 중구 월미도 선착장 일대에 해당한다.

이번 행사에서 무엇보다 참가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월미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다. 대개 인천상륙작전은 승리의 역사로만 기억되지만,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월미도 미군폭격으로 인해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에 피해자들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이하 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진상규명 신청인과 참고인들의 진술, 당시 월미도 폭격에 동원된 미군의 보고서, 참전군인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조사가 진행돼 2008년 2월에 그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조사결과, 월미도 폭격은 리차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대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에 의해 1950년 9월 10일에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월미도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서 사전에 반드시 점령해야 할 전략적 위치였다. 따라서, 인민군의 방어시설을 숨겨주는 은폐물을 없애기 위해 이 일대를 초토화하는 게 목표였고, 이에 따라 미군은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해 집중 폭격을 가했다. 

미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이 있던 날,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항공기들은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무차별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 집중폭격으로 섬 동쪽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됐다.

당시 월미산 동쪽 기슭의 인민군 본부와 민간인 거주지(현 월미공원)는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폭격이 시작되자 온 동네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다. 폭격이 시작된 시점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도피하는 주민 가운데에는 속옷만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은 불에 타 죽었다. 폭격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기총사격을 가했다. 주민들은 총격을 피해 갯벌로 달아나 개흙을 묻히고 숨기도 했다. 

증언 및 각종 자료를 통해 볼 때 실종자 및 가족이 타지로 이주해 피해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위원회 조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정용구, 우소시경 등 10명뿐이다.

위원회는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미군들은 월미도 지역에 대한 정보와 항공사진 분석을 통해 민간인 거주 여부 등 월미도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인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폭격지점 선정이나 폭격 과정에서 식별이 가능한 민간인에 대한 희생을 줄이려는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으나 그런 노력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위원회는 진상조사 보고서를 내며 당시 미군의 폭격에 대해 “민간인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했고,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고도에서 주민들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명백히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고 비난했다.

유족과 거주민은 전쟁 이후 월미도가 군사기지로 사용되면서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현재까지도 쫓겨나있는 상태다.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유족과 거주민들의 귀향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제17대 국회의 한광원 의원이 이를 위해 특별법을 발의했으나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최근에는 문병호 의원(제19대 국회)이 다시 특별법을 발의했다. 문 의원은 위령제에 참석해 인명피해에 대한 보상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보상 정책에 맡기더라도, 거주민들의 귀향을 위한 법안을 마련해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전문해설을 맡은 ‘시민과 대안 연구소’의 이희환 연구기획실장은 인천상륙작전 등이 정권의 안보논리만을 따라 평가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인천상륙작전 등을 전사에 기리고 평가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승전만을 부각시키거나 군사력을 과시하는 데 활용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는 북한을 적으로만 규정하고 분단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승리한 전투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양보다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해 힘쓰는 근본적인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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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월미도 항공사진, 월미도 폭격 이전에 미군은 다양한 정보수집을 통해 월미도 민간인 거주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출처 진실과 화해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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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직후 월미도와 인천의 모습. (출처 진실과 화해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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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월미도 폭격에 대한 보고서. 월미도 동쪽 편을 따라 폭격이 이루어졌으며 둑길에 닿는 지점 남쪽지역에 폭격이 제대로 수행됐다는 내용. (출처 진실과 화해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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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대안 연구소’의 이희환 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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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ㄹ 2013-09-20 01:37:40
ㅏㅗ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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