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원주민들의 '한국전쟁 비사(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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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원주민들의 '한국전쟁 비사(秘史)'
  • 이장열
  • 승인 2012.08.0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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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원주민 귀환대책위' 2000일 농성 현장을 찾아
월미도 원주민 귀향 대책위원회 한인덕 회장
취재 : 이장열 기자

"지랄 같은 20세기"라고 일갈했던 어느 노교수의 말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5.16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랑을 한 몸으로 겪었던 세대의 '숨비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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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저문 2012년에도 여전히 인천 월미도에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적 삶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임시가건물에서 2000일 이상 농성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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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7월 20일 '월미도 원주민 귀환대책위원회' 농성장을 찾았다. 2857일차 농성중이다. 853억원짜리 애물단지 월미은하레일이 바투 내다 보이는 월미공원 입구 농성장 안에서 한인덕 회장(69, 월미도 원주민 귀환대책위)이?수년 동안 농성하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기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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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을 바라보는 한 회장은 대전과 서울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직접 찾아가 "시아버지의 터전이었던 월미도 땅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면서?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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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대책위는 국가와 인천시, 미국, 유엔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달 11일 인천지방법원 제13민사부 주재로 변론기일 재판이 이어졌다. 모두 7차례 원고와 피고측 소송 대리인들이 법원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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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측 소송대리인 박성룡 변호사는 2일 "월미도에 거주했다는 공식 증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다. 가옥대장이 있어야 거주권리를 확인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거주확인 국가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월미도 관련 땅에 대해 보상을 법원이 결정할 수 없다."는 취지가 지난달 11일 열린 조정 재판에서 감지된 법원의 입장을 기자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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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대책위에서는 당시 월미도 일원에서 살았던 이들의 제적등본 등 거주를 입증할 만한 관련 자료들을 법원에 제시했다. 법원에서는 거주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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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대한민국 정식 정부가 세워진 뒤 나라가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지 위해 가옥과 땅에 대해 전수 조사를 실시한 바 있었다. 관련 자료가 있을 것으로 보고 탐문을 했지만, 현재 중구청 세무관련 대장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63년이다. 그 이전 기록된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중구청 세무 담당자는 확인해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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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박 변호사도 "조정 재판에서 법원에서 요구하는 가옥대장을 찾기 위해 대전 국가기록원에 직접 찾아가 살펴 보았지만, 1950년 전후 월미도 관련 가옥대장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다"면서 "또 중구청에 혹시나 보관중인 자료들이 있을까 해서 조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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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변호사는 "인천시에 관련 자료가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이해당사자 입장에 있는 인천시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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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1963년 월미도 땅을 귀속재산조치법에 따라 보존 등기한 뒤 2001년에 와서 인천시에 250억을 받고 팔았다. 현재 월미공원이 인천시 소유자이기에 이번 민사소송에서 피고로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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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월미도 주민들은 1차 강제 이주한 때 거주확인 자료는 1939년 인천세무서장이 발행한 조선인부락 현황에서 확인된다. 이 자료도 한 회장이 국가기록원에서 직접 찾은 소중한 자료이다. 이 문서에는 조선인 거주자 명단과 가옥번호, 토지지번, 건물평수 등 항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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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현재 월미공원의 거주자료가 아니다. 1942년 2차 강제이주 뒤?현 월미공원 거주 사람들의 거주관련 공식자료는 아직 발견되거나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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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30일 이승만 정부는 귀속재산처리법을 공고했다. 당시 월미도 원주민들도 토지와 가옥을 본인 재산으로 등기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논의를 했다. 처리 기간은 6월 말까지였다. 그런 사이에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국가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라, 신청을 할 수 없었던 게 21세기를 맞이한 시점에서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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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월미공원 일원에 주둔하면서, 월미도 원주민들은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 소금창고에서 임시거주하면서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군 헌병이 입구에서 총을 들고 서 있는데,?들어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 회장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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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월미도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하자, 1972년 우리나라 해군이 소유지를 강제 징발해 국방부로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 원주민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루어진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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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1년 인천시가 국방부에서 토지를 매입하는 동안에도 인천시는 월미도 원주민들과 한 번도 협의 없이 매매계약을 체결하는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며 한 회장은 분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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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들에게 쫓겨 들어와 살았다가,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으로 기회를 놓치고, 그 뒤에는 미군에 의해 쫓겨나고, 우리 국방부가 한마디도 없이 강제로 토지를 귀속시키더니, 이제는 인천시까지 국방부로부터 조상들의 한이 맺힌 토지를 매매하는 것을 보면서 힘이 빠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한숨 섞인 한 회장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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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에서 우리가 지면 우리 삶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무지랭이들이 당한 억울하고 기막힌 일이죠.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답답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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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장이 기자에게 던진 말. 발걸음이 무거웠다. 당장 1950년 월미도 가옥대장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엄습해 왔다. 소송에서 이기는 유일한 실마리로서 가옥대장이기도 하지만, 20세기가 낳은 문제를 풀?열쇠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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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4일(금) 오전 11시20분 인천지방법원 408호 법정에서 이 소송 변론이 재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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