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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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 김영숙
  • 승인 2012.12.1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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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박물관, 석남(石南) 타계 3주기 추모전 ‘李慶成, 그 사람’


인천시립박물관은 2012년 마지막 전시로 석남(石南) 타계 3주기 추모전 ‘李慶成, 그 사람’을 내년 1월 27일까지 2개월 동안 전시한다. 이번 추모전은 2012 인천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의 일환으로 시립박물관과 인천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해 마련됐다. 전시는 모두 ◇1부 그 사람, 이경성 ◇2부 그 사람, 그리움의 궤적 ◇3부 그 사람, 인천에 이르는 두 갈래 길 ◇4부 그 사람, 관장 이경성으로 구성됐다.

 “건물의 낡은 마루를 고치고 페인트칠을 해서 아름답게 수리하였다. 이 건물은 독일 사람이 구한말에 지은 세창양행의 사택인지라 설계도 좋았거니와 외관도 12개의 아치를 가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어디일까. 바로 인천시립박물관 초기 건물을 보고 초대관장 이경성이 한 말이다. 지금은 연수구 옥련동에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중구 송학동 1가 1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박물관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은 다음과 같다. “인천 지역의 향토사와 문화유산을 조사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시민에게 공개하여, 시민들을 위한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 혼란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정서적 공황상태에 있던 인천 시민들에게 휴식과 교육의 장을 제공하여 왔다.”

 1946년 이경성이 주도한 인천시립박물관 전시에는 지역과 맥락을 달리하는 여러 유물이 뒤섞여 있었다. 전시물의 구성 자체가 혼종되어 있었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 인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소장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수집하였다. 첫째, 이 건물 속에 있었던 향토관의 유물들로 선사유적과 개화기의 유물 또는 사진들, 둘째, 국립중앙박물관의 김재원 관장을 졸라서 빌려온 문화재급 작품 19점, 셋째, 국립민속박물관의 송석하 관장을 설득해서 빌려온 60점의 민속품, 넷째, 본국으로 물러가는 일본인에게서 몰수하여 세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들, 다섯째, 장석구라는 골동상에게서 받은 도자기 19점, 여섯째, 지금 박물관 앞뜰에 놓여있는 중국의 커다란 종을 비롯한 철물들.”

 “그림을 왜 그리십니까?”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이경성은 짧게 대답했다고 한다. “외로워서.” 그는 평생을 수많은 미술인과 더불어 활동하고 살았지만 나이들어서는 쓸쓸한 여생을 보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여인과 군상은 외로움을 말해주는 상징들이다. 단발머리 여자는 그리움의 전형으로 다가오고, 빼곡이 들어선 군상들은 바람처럼 떠도는 자신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미술과 나의 인연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그곳에서 우연히 미술과 접하게 되어 나는 당시만 해도 희귀했던 미술사학을 전공하였다. 그 운명적 우연은 내가 만났던 몇몇 사람들과 닿아 있다. 그 사람들은 나와 미술 사이에 인연의 다리를 놓아준 매파와 같은 역할을 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던 고유섭, 와세다대학의 미술사학과 지도교수였던 아이즈 야이치, 내 평생 우인이었던 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평생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유명인들과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이 세 사람만큼 내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나의 미술 인생(경향신문 매거진X,1999.4.19)

 “이경성과 인천은 두 길에서 만났다. 한 길은 고유섭 최순우와의 만남을 통한 ‘한국의 미를 발견’하는 장소로서의 인천이고, 다른 한 길은 ‘근대의 문호(門戶)’라는 신작로에서였다. 이경성은 처음으로 호텔이 들어서고 항구가 건설되며 철도가 놓인 근대적인 인천의 면모에 굉장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유섭과 최순우를 따라 인천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다. 1949년부터 시작된 인천의 고적 조사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두 길은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이 만남의 조건에 대한 탐색이 그의 미술사 서술의 주요 동기 중 하나였을 것인데, 그 만남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경성의 말처럼 ‘근대’와 ‘동양적 후진’의 차이는 명백했고, 그 거리는 너무 멀었다. 한국사에서도 내재적 발전론이 일반화한 것은 1980년대였으니, 미술사에서 두 길의 해후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경성에게도 두 길은 두 길로 남아 있다.”(인천시립박물관 전시 도록에서)

이경성은 서신왕래를 통해 당시 개성 부립박물관장이던 고유섭 선생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선생이 필요로 하는 책을 동경 헌책방에서 찾아 보내드리는 심부름을 한 것을 인연으로 지도를 받은 것이다. 또 한국미 그 자체를 지니고 다니는 전형적인 한국사람이라고 여긴 최순우로부터 한국적인 것을 배우려고 애썼다. 스스로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고 일본적인 사고와 표현으로 살아 그만큼 일본적이라고 생각했고, 해방 이후 그러한 요소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 이후 몰려드는 서구의 흐름과 더구나 대학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한 일 때문에 서구적인 성향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때 최순우를 만나 하나씩 배워나갔다.

‘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라는 생각을 지녔던 이경성은 최초의 미술인 출신 관장의 선례를 마련하고, 학예사 제도를 도입하고, 처음으로 작품 구입 예산을 확보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사진·저서·기고문, ‘사람’ 연작 중 단발머리 여성과 군상, 인천 관련 글 등 200여 점의 자료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시립박물관은 지난 1946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최초 전시를 재현해, 시립박물관 설립정신을 구현할 예정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미술사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경성은 해방 이듬해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장을 역임했다. 말하자면 그는 미술관과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에 독보적인 활동을 펼친 것이다. 그는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로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오다 2009년 미국 뉴저지에서 타계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신은영 학예연구사는 “이 전시를 통해 선생님의 외로움이 좀 위로가 되길 바란다”면서 “선생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색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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