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세계적인 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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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세계적인 명산
  • 이창희
  • 승인 2013.03.0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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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북한산 여명이 아름답다
북한산 여명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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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은 서울특별시의 성북구 · 종로구 · 은평구 · 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836m). 본래 한산이라 불렸는데 '큰 산'이라는 뜻의 '산'을 한자로 차음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산이란 이름은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보이며, 서울 지방의 옛 이름을 한산 · 북한산 · 북한산성 · 북한성 · 한양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산은 처음에는 산 이름이 아니라 서울의 옛 이름인 한산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는 "양주 지경에 있다. 화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 하였다. 평강현의 분수령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의 진산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 온조가 남쪽으로 나와서,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라고 하여 여러 다른 이름들이 보인다. 부아악은 어머니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부아가 불의 표기이므로 부아→불→화(火)→화(華)로 바뀌어 화산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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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화산 · 화악은 세 봉우리가 연꽃이 핀 것과 비슷하다 하여 연화산의 준말로 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려사』의 삼각산 승가굴의 기록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 따르면 삼각산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일반화된 이름이다. 삼각산은 인수봉 · 백운봉 · 만경봉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어 나란히 있는 모습 때문에 유래되었는데, 근래에까지 삼각산이란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 북한산성이 축성된 내용을 기록한 『북한지』가 출간된 이후 북한산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백운봉과 동쪽 인수봉(811m)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졌다. 동남쪽에 솟은 만경대(801m)는 일명 국망봉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만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다. 만경대 서남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노적더미로 의심하였다는 노적봉(718m)과 진흥왕순수비가 있어 이름 붙여진 비봉(527m)이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당시의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592m), 남장대(715m), 북장대와 행궁, 군창이 있었으며···"라고 전하며, "남장대는 나한봉 동북쪽에 있다."라고 하여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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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만을 따로 그린 지도는 없으나 북한산성을 표현한 지도는 다수 있다. 『북한성도』, 『해동지도』, 『대동여지도』, 『동여도』, 『청구도』, 『청구요람』, 『대동방여전도』, 『팔도지도』, 『여지도』 등에서 북한산성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북한산은 경기도 양주목 지도에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특히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을 꼽으라고 하면 승가사를 꼽는다고 한다. 승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가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로 지칭되었던 승가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그 뒤 1024년(현종 15)에 지광과 성언이 중창하였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의 주지였던 영현이 중수하였으며,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

1422년(세종 4)에 왕이 7종을 통합하여 선교양종을 통합할 때는 선종에 속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를 얻어 일신, 중건하였다. 1941년에 도공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비구니 도명이 중창하여 대웅전과 영산전·약사전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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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이 불사를 계속하여 현재는 산신각·향로각·동정각·범종각·대방·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좁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알맞게 배열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창건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가 수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월이 이절에서 배출되어 팔도도승통의 직책을 맡아 쇠잔하던 불교를 크게 진작하는 등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또한 예로부터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으며, 서북방 100m 지점에는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과 약사전에 모신 약사여래의 영험, 그리고 약수의 효험 등은 이 절을 기도처로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절의 뒤편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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