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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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 이영주
  • 승인 2013.03.1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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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이영주 /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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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주년 세계여성의날이 지나갔다. 말 그대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특별한 기념일이 아닌 것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세계여성의날은 105년 전 미국 뉴욕의 방직공장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외치며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섰던 사건을 계기로 여성의 경제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만방에 천명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그런 의미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적어도 내 기억 안에서만 보자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세계여성의날을 ‘제대로’ 기념했던 적은 없었다. 그 유래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었던 만큼 세계여성의날은 대한민국에서 근로자의 날이란 이름으로 왜곡되었던 노동절만큼이나 금기시 되는 기념일이었다. 아니, 노동절이 제 이름을 찾은 뒤로도 한참을 세계여성의날은 ‘재야에 묻혀 있는 기념일’이었고 1997년 국민의정부가 출범하고 여성부가 만들어진 뒤에야 비로소 정부 공식 후원행사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매년 세계여성의날은 여성 스스로 여성임을 자축하고 그 시기 여성들의 요구를 공표하는 축제의 장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나 여전히 세계여성의날이 있게 한 ‘여성노동’은 축제의 주요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드문 일이긴 하나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하며 여성들에게 권리를 상징하는 장미꽃을 선물하는 소위 ‘깨어 있는’ 남성들의 퍼포먼스마저도 기꺼움보다는, 남성노동자의 60%도 채 되지 않는 임금을 받는 열악한 여성노동의 현실을 기만하고 여성인 것을 행복해하라는 일종의 강요처럼 느껴져 삐딱한 마음마저 생기곤 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높아졌다는 환호 뒤에는 결혼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대다수가 열악한 비숙련 비정규 사업장으로 내몰리고 있고, 주로 여성이 도맡고 있는 골프장 캐디나 학습지 교사와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노동기본권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그저 여성임을 축하한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은 흘러 생물학적 여성을 넘어 ‘여성대통령’을 공식적인 슬로건으로 내걸고 나서 당선된 박근혜정부가 출범했고, 세계여성의날은 105주년을 맞았다. 새 정부의 새로운 인물에게 장관직을 넘겨주고 떠나는 김금래 전 여성가족부 장관은 “여성대통령시대를 맞아 우리의 가치와 입장이 더 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전망했지만, 세계여성의날 105주년을 맞는 내 눈에는 어떤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다.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는 분명 이전보다 늘었지만, 여성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와 평가는 여전히 요원하다. 가사와 육아는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 여성들은 오히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이중고를 지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 못한 상태다. 소수의 여성이 각종 고시의 상위권과 대기업 임직원이 되는 것에 하이라이트가 맞춰지는 사이 절대다수의 여성은 절대빈곤으로 삶의 질이 하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출산 고령화가 사회문제라고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여성들이 마음놓고 출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원인에 대해서는 별 다른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현 정부 이전부터 있었던 문제였다. 문제는 ‘여성대통령’이라는 뻔지르르한 수사 앞에서 여전히 열악한 여성노동의 현실이 가려지고, 마치 없는 문제인 양 여겨진다는 것이다.
 
지난 6일 인천여성가족재단이 출범했고 나는 출범식이 열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인천여성가족재단은 인천 여성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지원을 제공하는 안정적인 재단의 출범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도이고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축하받아 마땅한 그 자리에서 여성인 나는 기쁨과 기대보다는 불쾌함을 떠안아야 했다.
 
인천여성가족재단의 출범을 축하하는 공연이 끝난 후 인천시장과 인천시의회 의장의 축사가 있었다. 인천시장은 축사 치고는 꽤 긴 연설의 2/3를 인천시의 출산장려정책 홍보에 할애했다. 그것도 여성들이 마음 놓고 출산할 수 없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보험상품의 혜택을 설명하듯 인천시가 타 시도에 비해 아이를 낳으면 보조금을 얼마나 더 주는지를 홍보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아이를 낳아 독립할 수 있는 성인으로 키우는 비용이 1억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시대에 출산장려금 몇 푼 높이는 것이 출산장려정책의 전부인 양 이야기하는 것도 기가 막혔지만, 일과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여성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근시안적인 발언이 시장의 축사의 전부라니 어이가 없었다. 여성의 삶에 대해 출산 말고는 할 말이 없는가? 여성은 곧 자궁인 것인가? 거기에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가족해체를 막아달란다. 아이 많이 낳고 가족을 지켜라? 이것이 정말 인천시장이 인천의 여성들에게 전하는 축하의 메시지란 말인가?
 
인천시장 축사에 이은 인천시의회 의장은 “여성들이 모인 행사에 오니 다른 행사와 달리 분위기가 화사해서 좋다”고 축사의 시작을 열었다. 물론 칭찬이라고 한 말인 건 알겠다. 그러나 이런 인사치레는 “여성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꽃 같은 역할”이나 하라는 매우 고루한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비롯한 것 아닌가. 그 뒤 이어진 말은 점입가경이었다. 대통령도 여성이고 인천시에서도 부평구청장도 여성인 시대이니 이제 더 이상 평등을 요구하기보다는 여성이 실력을 키워서 지역에 공헌을 하란다. 거기다 덧붙이는 말이 자신의 집에서도 가정의 의사결정은 아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거란다.
 
인천시를 대표한다는 두 분의 축사(?)를 들으며 도대체 인천시장과 인천시의회 의장은 인천에 왜 여성가족재단을 만들려고 했는지, 그 바탕이 되는 인천의 여성의 현실에 대해 생각은 하고 있긴 한 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여성이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 여성가족부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스펙을 자랑한다. 인천에도 여성 단체장이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이 집중 조명을 받는 동안 절대다수의 여성들은 아이를 키우며 경제부양까지 책임지느라 가랑이가 찢어진다. 결혼과 육아로 단절된 경력은 여성들에게 아주 당연한 듯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만을 제공한다. 그런 일자리에서는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조차 무시된다. (지금 서울 혜화동성당 종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한 달째 벌이고 있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은 노동자임을 인정해 달라며 1900일이 넘게 싸우고 있다. 기네스에 오를 장기간 투쟁 사업장이다.) 점점 늘고 있는 비혼여성과 한부모여성은 소위 ‘정상가족’ 중심의 사회복지 시스템 아래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세계여성의날을 축하하려면, 정말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면, 이런 여성들의 삶부터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은가. 이런 여자들은, 나는, 지금의 여성대통령과 인천시장을 비롯한 정치인들에게 여자가 아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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