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 인천복지 뿌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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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인천복지 뿌리 찾기
  • 박기을
  • 승인 2013.10.17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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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영길 '일현' 이사장
사진 141.jpg
 
<인천in - 인천복지리뷰 협약기사>
 
글 = 박기을/인천문인협회
 
 
아버지!
어찌 보면 무척 평범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무척 낮 설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랬기에 가슴 속에는 담아두지만 꺼내지 못 한 채 웅얼거리다 마는 이들이 한때는 무척 많았고 현재도 제법 많다.
사회복지법인 일현 이사장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인천보육원을 찾았을 때, 자동차 길안내 도우미가 안내 해 준 곳은 평범한 주차장이었다.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인천보육원이라는 간판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주차장 주변의 가게에 가서 물어 보고 인천보육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참으로 신기했던 것은 여느 복지단체들의 건물에서처럼 간판도 없었고 정문이나 담이 없었다.
사무실에 들러 인사를 하고 건물을 둘러보며 느낀 것은 보육원 하면 흔히 느껴지는 약간의 그늘을 느낄 수 없었다. 원생들이 처음 보는 기자에게도 밝게 인사를 하였고 방을 둘러보면서도 아이들 특유의 장난 끼와 밝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건물 층간마다 붙여진 게시판에도 사진이나 글 내용이 타 기관의 사진들처럼 경직되어있지 않고 신세대들 특유의 끼와 재치가 넘쳐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어두운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원생들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활기로 가득 차게 된 연유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존함 일현
김영길 이사장은 6.25 전쟁 때 부모님을 여의셨다. 그래도 7남매였기에 그리고 당신은 막내였기에 나름대로 사회생활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9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암암리에 표면화 된 것이 복지법인 이름인 ‘일현’이다. 일현이란 말에는 여러 해석을 붙이고 있다.
우선 한문에서의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의 일신우일신(日新又)의 일(日)에 지혜로워진다는 뜻의 현(賢)을 붙여서 일현(日賢)이 되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일현의 일(日)을 ‘해’로 보고 현을 나타날 현(現)을 적용해서 ‘해가 나타나다‘로 해석 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에서 기인하기도 하는데 성경말씀 창세기에서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한 후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 받고 이곳을 떠날 때에 해가 돋았다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따왔다고도 한다.
물론 위의 두 해석은 사회복지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나 김영길 이사장의 신앙을 밑바탕으로 복지사업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 된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김영길 이사장께서 정작 담고 싶었던 일현의 의미는 6.25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존함이라는 점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없거나 아버지를 부를 수 없는 아이들에게 하나의 사업으로서의 보육원이 아니라 담도 없고 간판도 없고 정문도 없는 일반 가정집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 않았을까?
 
아버지 같은 형님께 배운 청렴 정신
김영길 이사장이 복지사업에 뛰어들고 오늘날과 같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게 된 데는 7남매 중 셋째 형님인 성촌 재단 김영주 이사장에게 배운 희생과 봉사정신 그리고 청렴결백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었다. 직함은 몇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사장이지만 두 형제분께선 예나 지금이나 집을 마련하지 못하셨고 차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차를 갖게 되면 차에 들어가는 기름과 유지비가 아까웠고, 그 돈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금도 대중교통을 이용 하면서 세 정거장 정도의 거리는 도보로 다니신다.
1958년 8월 재단법인 ‘평화원’에서 서무 일을 시작으로 1965년에는 ‘성촌의 집’ 원장으로 전쟁 고아들을 돌보던 김영주 원장의 모습을 지켜본 김열길 이사장은 형님의 소개로 1968년 어느 보육원에 생활지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오전에는 원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텃밭에서 일을 하며 지냈다. 당시만 해도 식량이 넉넉지 못해 원생 및 자신에게 조차 점심을 제공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김영길 이사장은 당시의 원장님으로부터 좋은 점을 배우고자 하였다. 우선 형님이신 김영주 원장과 같이 청렴하였으며 돈을 쓸 때와 안 쓸 때를 잘 구분하여 쓸 부분만 쓰는 점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웠다. 하지만 당시 원장님의 경우 아이들을 잘 보듬어 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웠다. 이러한 부분을 보아왔기 때문에 현재의 인천보육원 식구들의 얼굴에 구김이 없는 것 아닐까.
당시 총무로 일하던 원장 사위가 그만 두게 되면서 김영길 이사장은 총무로 일하게 되었다.
 
 
인천보육원 (1).JPG
 
멋진 아버지!
보육원에서 총무로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1980년 10월 13일 김영길 이사장과 평생을 같이 해온 지금의 인천보육원을 만나게 되었다. 인천 보육원은 1952년 전쟁 고아들을 돌보아 주기 위해 현 인하대학교 운동장에 시설을 설립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당시는 고아원으로 불리다가 1954년 경기도지사 시설이 인가되어 인천시 남구 학익동 377번지에 인천보육원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뜻있는 독지가 들이나 종교단체에 의해 보육원이 설립되었으며, 정부에는 지원을 생각 할 수조차 없는 시기였기에 아동들에 대한 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인천 보육원은 1976년 현재의 자리인 인천시 학익동 99-1번지로 이전하였다.
이러한 인천보육원이 김영길 이사장과 만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이종만 목사께서 해외 이민을 가게 되면서였다. 해외에서 더 이상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자 후임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김영길 총무의 청렴성과 정직한 운영력을 보아왔던 당시 인천시 담당교육원으로부터 맡아보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사실 인천보육원의 경영 상태가 그런대로 나쁜 편은 아니어서 여러 곳에서 운영권을 갖고 싶어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차였다. 또한 이종만 원장의 경우도 운영권을 넘기며 어느 정도의 자금을 확보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김영길 총무의 경우 자금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진심어린 두 어 차례의 면담 끝에 이종만 원장은 김영길 총무의 청렴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무상양도를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80년 12월31일 김영길 총무는 인천보육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취임 후 김영길 원장은 과거 외국의 원조와 후원활동에 의존하던 경영 기법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1984년 발족한 인천 후원회이다. 당시는 소수의 인원으로 시작 했지만 현재는 1500여명의 후원회로 발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보육원의 의식주에 대한 지원에서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으며 보육원 운영의 폭이 넓어져 갔다. 프로그램에 의한 지원이란 것은 보육원 아동의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넘어 교육, 건강, 정서적인 면을 고려한 프로그램들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 당시에 인천보육원은 후원회의 지원으로 성인이 되어 퇴소하는 아동에 대해 취업 프로그램 및 결혼 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보니 보육원 아동들에게도 다양한 각도에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재능을 개발 할 기회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여기서 현 삼성생명 여자 농구팀의 박태은 선수와 같은 인재가 탄생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악기를 다루고 싶어하는 아동들에게는 첼로, 바이얼린 등과 같은 악기를 배울 기회를 주어 2명의 원생이 음대에 입학하였다. 그것뿐 만이 아니다. 백일장, 연주회, 캠프, 현장학습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어느새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싹 틔우고 키워가고 있었으며 이러다 보니 보육원이나 고아원이라는 이미지에서 흔히 느껴지는 비행청소년, 가출 등과 같은 이미지가 지역 주민들에게 전혀 없다.
보육원 뒤로는 연경산 산책로가 있고 수많은 지역 주민들이 이 길을 이용하지만 이 시설의 존재조차 모르는 분들이 허다하다.
또한 기자가 숙소를 둘러보며 과거의 보육 시설과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것이 숙소마다 30여 평 공간에 방이 3개였고, 한 방에 두 명씩 생활하고 있었다. 예전 군대처럼 한 방에 수십 명이 우글거리며 떼 지어 생활 하던, 개인은 없고 단체만 존재하던 시절의 기숙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를 부르는 명칭도 기숙사가 아닌 ‘소숙사’였다.
이렇듯 아이들에게 편의시설을 제공해 주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주며 어느 아이든 원장님과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아이들과 원장님과 선생님들과의 벽도 담도 허물어지고 한 식구가 되어버렸다. 기자가 대담을 진행하는 중에도 막내가 찾아와 껌을 얻어가는 모습은 천진스러우면서도 참으로 정겨웠다.
김영길 이사장은 이렇게 친근하게 지내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했다. 1500여명의 후원회에서 지원받는 지원금은 자신에게 한 푼도 허락 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현 복지법인의 10여명 이사진에 자신의 친인척이 전혀 없다는 점이고, 1985년 286컴퓨터를 구입하여 진우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후원금의 자금 출납관계를 철저하게 관리하였던 점이다. 또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아이들에게 1:1 통장을 만들어 후원금과 용돈을 사용하며 적립하게 해준다. 그러다보면 성인이 되어 퇴소하는 아동들의 경우 제법 사회생활 밑천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사회에 나갈 때도 적응하는 기간 정도까지는 관리를 해준다. 자칫 잘못 하다가는 사회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밑천으로 모은 통장을 모두 날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집 한 채 허용하지 않고 자동차 한 대 허락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아이들의 복지만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진심을 알아서일까?
김영길 원장은 그동안 사회나 국가 기관으로부터 무수한 상을 받아왔지만 올해 72세 생일에 가장 큰 상을 받게 된다. 그것은 아이들이 합작해서 만들어준 ‘멋진 아버지상’이었다. 상품으로는 ‘아이들과 밥먹어주기(외식)’‘아이들과 극장가기’ ‘원장님께 안마해주기’ 쿠폰 등이었다.
 
보육원 아버지에서 모두의 아버지로
김영길 이사장의 사랑은 보육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육원 복지가 성공하려면 지역복지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오지랖이다. 지역 아동과 가족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상담 · 치료 · 교육 · 문화 · 사례관리 등의 전문적인 복지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아동복지기관으로 보육원 바로 옆에 함께 하고 있는 ‘푸른마을아동복지종합센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주변의 어린이 중 심리나 언어 등의 장애 어린이들을 맡아서 미술, 언어, 심리 치료를 해주며 또 주변의 맞벌이 부부들을 위해 어린이들에게 공부도 시켜주고 도서관 역할도 해준다. 그러다보니 지역 주민들로부터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 하며, 맞벌이 신혼부부나 가정주부들에겐 친정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남구 주안 5동에 있는 ‘미추홀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어린이부터 부부간의 문제, 가정에서 모시고 계시는 65세 이상의 노인문제까지 종합적으로 다룸으로써 지역 주민의 사회복지 욕구에 부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안과 연수동에서 운영하고 있는 ‘미추홀어린이집’과 ‘느티나무어린이집’에는 일반 어린이집에서 꺼려하는 영아(6개월부터 3세이하)들을 영아전담반을 두어 관리해주기도 한다. 영아들에게는 유기농 식품과 영양제까지 줌으로 해서 어린이들의 발육 상태와 건강이 매우 좋다고 한다.
또한 김열길 이사장의 사랑은 국내인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이주해 온 다문화 가족들에게까지도 미친다. 남구 주안 5동에 있는 ‘남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그것이다. 사실 다문화 가족의 경우 타국에 와서 정착하려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다. 이를 위해 국어교육, 가족교육, 다문화사회 이해교육, 상담, 결혼 이민자 통역 번역 서비스, 자녀 언어 발달 및 이중 언어 지원 사업, 취업 창업 지원, 다문화 강사 뱅크, 자조 모임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 부분을 모두 관리해 주려다보니 인력도 부족하고 운영에 어려움이 따른다고 한다.
 
노인보다는 어르신으로 남고 싶어...
김영길 이사장은 고희를 넘긴 고령에도 뒷산에 올라 헬스를 할 정도로 건강하다. 체력이 뒷받침되다보니 지금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1500여 후원 회원들과 늘 대화하며 이들에게 참여의 동기를 부여해 준다. 이들과 운동도 같이 하고 아이들과 캠핑도 같이 가고 사회 복지회 후배들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김영길 이사장은 사회복지가 잘되려면 아동복지 시설에 아동들이 들어오기 전에 저 소득층 가정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줘야 한다고 한다. 한때는 90여명 되다가 이제 70여명으로 되어있는 원생들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적정한 원생 수는 20~30여명이다.
어느덧 육신의 나이가 많아져 물러날 때가 되어 가지만 자신은 그렇다고 넉 놓고 지내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먹으면 노인으로 지내다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느냐 아니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하나라도 사회복지를 위해 이바지하느냐 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두 번째 방법으로 사는 것이 ‘어르신’으로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어르신으로 지낼 것을 다짐하며 후배들에게 자기 분야에서 미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신다.
“아동복지가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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