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더미에서 찾아낸 귀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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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더미에서 찾아낸 귀한 책들"
  • 강영희 시민기자
  • 승인 2013.11.05 12:1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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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서점 40년, 그녀의 책과 책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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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정리/사진_강 (마을사진관 다행/ 우각로신보 편집자)

 
 
눈이 가는 걸 고르라
 
책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떤 책을 골라야 할이지 묻자 “눈이 가는 걸 고르라” 하셨다. 외판을 할 때 봤을 때 친근한 것, 마음이 가는 책을 고르게 되더라는 것, 그렇게 몇 번 눈이 가고, 손이 가던 책을 사면 당장은 쓸모가 없더라도 결국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이 되더라는 말씀이셨다. 그런 책들이 쌓여 나만의 교과서가 되고, 내 일이 되고, 나의 눈이 되더라는 말씀, 그리고 10대에 작은 것들이 30대 40대를 움직이게 되더라는 말씀이 이어졌다.
 
나의 질문은 일요일 늦은 밤, 책읽기를 미션으로 하는 TV프로그램에서 아벨서점 곽선생님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간 적지 않은 말씀을 들어왔지만 책 고르는 법에 대한 말씀은 거기서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TV라니... 그렇게 아벨은 많은 책방이 사라진 지금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상징이 되었고, 40여년 수많은 인천 사람들, 그리고 적지 않은 외지 사람들에게조차 인연의 끈이 닿아있는 공간이 되었다.

 
아벨서점 (2).JPG  아벨서점 (3).JPG

 
고물업 14종 <헌책방>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두고 간 물건들, 남북전쟁을 지나 미군들이, 전쟁의 잔여물들이 남은 것이 고물상에 모이게 되고, 그 고물들 속에서 금을 찾아 귀금속 장사를 하고, 책을 찾아 책장사를 하게 되니 책은 너무 귀했다고 한다.
 
공산품이 귀하디귀한 시절이었기에 그 속에서 책은 또 그렇게 더없이 구하기 힘들었고, 70-80년대까지 잠을 깨면 눈곱도 떼지 않고 자전거를 몰아 고물상으로 가서 수많은 종이부대 속에서 쓸 만한 책을 골라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인천 뿐 아니라 서울 청계천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수많은 고물들 속에서 찾아낸 책들이 얼마나 귀했겠는가 하신다. 그래서 아직도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고 하시니 우리 할머니들, 나이든 어머니들과 다를 게 없었다.
 
 
2013-07-16  아벨서점, 그녀와 그녀의 자전거-1.jpg

 
마치 그러려고 태어난 듯이
 
2013년 11월 4일 아벨서점이 문을 연지 40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철길 건널목을 오가며 학교를 다니던 소녀가 다시 책 외판을 하며 배다리를 다니던 스물 넷 아가씨는 24세 되던 해 1974년 11월 4일 창영복지관 인근에서 ‘고물업 14종-헌책방’ 등록하고 <아벨서점>을 시작하게 되셨다. 마치 그러려고 태어난 듯이...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를는지 모른다.

 
2013-10-21  창영복지관 인근 풍경.jpg
우각로 언덕배기 창영복지관 건너편에서 처음 문을 연다

 
거기서 1년여 장사를 하던 차에 주인이 집을 파는 바람에 갑자기 가게를 비워줘야 해서 당신 작은 방에 책을 쌓아놓고 2개월 여 쉬고서 지성문구사(현 개코막걸리 옆 문구사, 당시에는 가게가 세 칸이었음)자리에 한 칸을 얻어 다시 시작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외래어 사용이 금지되어 당신의 예명이었던 ‘정은’을 넣어 정은서점으로 두 번째로 책방을 열어 3년 반 가량 운영을 하셨다고 한다.
 
2013-10-22 지성문구사 가운데 칸에 정은서점이 있었다-1.jpg
'정은서점'으로 지성문구사 가운뎃 칸에서 두번재 책방을 열게 된다
 
그렇게 5년 반 신앙생활 같은 책장사를 하면서 혹독한 어린 날들에 대한 응어리를 풀어내게 되더라 하셨다. 그리고 학교도 제대로 다녀보지 못한 자신이 하기에 책장사가 어렵다는 것, 그리고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6학년까지 키우지 못한 아이를 데려와 작게 일하며 주제넘게 일하지 않고 살아가기로 하고 29세 되던 해 책방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온갖 일-배달, 공장일, 야채와 과일 파는 일, 집 짓는 일에 식모생활까지 2년여를 보내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식모하던 집에서 <백범일지(1949)>를 보고 다시 책방으로 돌아오게 된다. 무엇인가 모르더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로, 어렵다고 해서 물러설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 나가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부족함을 느껴 그만두었던 책방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아이를 크게 키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다시 책방을 하기로 하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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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양조장 대문 옆 공간에 다시 책방을 연다
양조장집 앞 세번째 아벨서점 자리-1.jpg
정면은 넓지만 폭이 좁은 탓에 넘치는 책을 담기위해 학생사 자리로 이사하게 된다
 
 
 
31세에 다시 책방을 하기로 하고 가게 터를 찾던 차에 인천양조장 어르신이 보증금도 없이 3만원에 대문 옆 공간을 내어주셔서 다시 세 번째 자리를 잡고 2년 반을 일하셨다고 한다. 최정순 어르신은 집 한 귀퉁이를 내어놓고 신기한 듯 종종 들러 대화를 나누다보니 적지 않은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고 하신다. 하지만 그 공간은 좁아서 곧 책이 채워졌고, 책을 둘 곳을 찾아 지금의 학생사 자리(당시에 이곳도 세 칸이었다고 한다.) 끄트머리에 자리로 옮기시고, 83년 70여 평의 명진스포츠 자리로 이전, 집 문제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95년까지 12년을 일하게 되신다.

 
2013-10-22  학생사 세칸의 끄트머리에 네번째 자리를 잡으셨다.JPG
당시 학생사도 세칸이었는데 그중 끄트머리 칸에으로 이사하시게 된다.
 
그리고 주인집의 농간에 명진스포츠에 있던 가게를 떠나 28평 지금의 아벨서점 자리로 옮기게 되니 그 넓은 공간에 있던 책을 곳곳에 옮겨 담느라 고생이 많으셨고, 지금까지 책 창고 때문에 애를 먹으신다 하신다. 마을 곳곳의 작은 공간들을 더러는 구입하고, 더러는 세를 놓아 책을 넣어두게 된다. 있는 사람들이 덕이 있을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 너무 안타깝고, 가엽다고 하신다.

 
2013-10-22  명진스포츠자리에서 12년을 운영하셨다-1.jpg
다시 늘어난 책을 부둥껴안고 옮긴 곳이 70여평 이 자리여였다. 문제가 많았지만 넉넉한 넓이가 아쉬웠던 탓에 12년을 지내시게 된다.

 
2013-09-25  아벨서점 전경.jpg

명진스포즈 70평 자리에서 28평 지금의 서점으로 결국 자리를 옮기게 되고, 넓은 곳에 있던 책은 이집 옥상으로 옮기게 되는데 어느 일요일 터진개 이종복 선생이 학생들 40여명과 함께 7시간을 옮기고 나니 2/3가 옮겨졌다고 한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겠다는 말씀을 전했더니 장관이었지 하시며 식사대접도 못한게 아직도 맘에 걸리신다고 하신다.
 
 
책을 만지며 책을 보며 살아오다 보니 그간 수십 수만 권의 책들 속에 발견한 옛 책들을 모아 아벨전시관을 만들어 담으셨는데 새 것만 우대하고, 옛 것을 천대하는 시대를 만나면서 헌책방이, 옛 책들이 역사며 문화라라는 것을, 귀히 보고, 소중히 보존하고 가꿔야 하는 마음들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옛것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고, 단지 ‘헌 것’이 아닌 '가치있는' 우리 삶에 ‘문화의 일면’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전시관을 만들기로 하셨다고 한다. 더러는 멋내느라, 잘난 체 하느라 하는 눈들도 있지만 헌책방을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알리고자 흔들리지 않고 진행하셨다고 한다.

 
첫번째 아벨전시관이 있던  공간.JPG
유한상사 2층 자리에 전시관을 담으셨다. 당시 입구는 지금 빔 2층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2006년 아벨전시관을 이전키로 하시고, 조적-벽돌을 쌓고, 고치는데 당신 어머님께서 암에 걸리셔서 3개월을 보냈고, 다시 돌아와 다듬으려고 하니 재생사업을 한다고 보상을 해주겠다며 나가라는 상황을 만나시고, 돈 몇 푼으로 모든 가치를 보상할 수 있다는 태도에 격분하여 2007년 그 맹렬한 동구관통 산업도로 반대, 동인천 재생사업 반대 운동을 하시게 된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나무를 켜고, 벽돌을 다듬고, 책장을 만들고, 전시관을 찾아가시고 그해 11월 시낭송회를 시작하시게 된 것.

 
    
2013-10-22 두번째 아벨전시관.JPG
가을 빛이 감도는 아벨전시관은 예술 사진 영화등의 사진을 중심으로 비치하고 2층에 전시관과 시낭송회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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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관을 만지며 많은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했다. 새 벽돌과 나무로 가리려고 하다가 그대로 살려둔 벽은 당신의 옛 책들과 잘 어울려 살고 있다.
 
 
 
 
 
 
 
 
그로부터도 다시 만 6년의 시간이 흘러 11월 4일이면 아벨서점이 40년이 되고 시낭송회도 70회가 되는 짧지 않은 시간을 회고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영향으로 책을 접한 당신이 결국 책 외판에 책 장사 40년까지 살아온 시간, 2007년 <기억과 새로움의 풍경>이라는 영상을 만들던 시간으로부터 다시 두 번째 인터뷰를 했다.
 
이 날은 작은 사장님(김경숙)이 쉬시는 날이라 좀 걱정이 됐는데 기꺼이 서점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2007년, 성급하게 서투르게 들이밀었던 인터뷰가 당신 생애의 시간을 훑어본 것이라면 이번 인터뷰는 책방이라는 공간의 변화를 중심으로 배다리 헌책방의 역사를 훑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2년의 세상 경험을 끝에 31살, 다시 책방을 시작할 때는 남은 생을 여기 걸기로 하셨다고 한다. 당신 10대 시절 버스 안내원을 하면서 같은 또래들이 조금은 더 나은 생활을, 귀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쓸데없이” 들었을 때부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했다고 한다. 자신이 받은 것을 세상에 돌려줄 방법을 책에서 찾았기에 책방이 되어왔다는 당신의 삶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배다리 헌책방의 쇠락
 
인고, 중앙, 광성학교가 건널목(지금의 육교) 저편에 있고, 남구로 들어오는 입구였던 배다리는 건널목 인근에서 시작해 우각로까지 헌책집이 가득했고, 지금의 헌책방들이 있는 자리에는 책방이 없었다고 한다. 74년 전철이 개통되고, 육교가 생기면서 책방들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는데 더러는 학교 앞으로 옮겨 살길을 찾았고, 동인천역이 가까운 배다리 삼거리 쪽으로 책방들이 자리잡아가기는 했지만 80년에 들어서면 20여개, 90년대가 되면서 10여개의 책방만이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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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책방 사람들은 많이 앓았다는 말을 하신다. 그리고 2013년 배다리에는 6개의 책방이 있다. 삼성서림, 한미서점, 대창서림, 집현전, 아벨서점 그리고 2009년에 문을 연 나비날다 책방. 몇 백 년이 된 헌책집이 있다는 일본이나 영국이 문득 떠오른 건 왜인지 ... 헌책잔치가 정말 잔치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길게 늘어서 있는 헌책방들이 있는 부산 보수동이 좀 부러워지기도 하고 ..
 
인터뷰가 끝나고 아벨선생님이 부산 보수동 책방잔치에 초대를 받으셔서 다녀오셨다고 했다. 원래 적지 않은 헌책방이 있었는데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으로 오히려 책방 숫자가 늘어났다고 했다. 정비도 잘 되어있고, 부러우셨다고 한다.
 
2015년 세계 책의 도시로 인천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캠페인(헌책방 거리에 만이 오라고 전단지 돌리고 홍보하는)을 한다고 들었다. 어쩌구 저쩌구 홍보나 겉치레에 엄청난 돈을 쓸게 아니라 기존의 책방이 지속가능하도록 지원하고, 후원하고 새로운 책방이 생기도록 하는 노력은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

 
2013-10-22 이경림 시인의 낭독을 통한 시 강의.jpg    2013-10-12  16-40-08427.JPG    2013-10-12  15-57-30414.JPG
 
 
책방은 문화다
 
 
대여점이 생기고, 인터넷 서점이 생기면서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책방도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 중에도 책방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 책방을 찾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고 하신다. “아벨은 살아있어야 해요. 없어지면 .... 갈 곳이 없어요.” 아벨을 찾는 이들에 말이란다.
 
‘갈 곳이 없다’ ..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시대, 그래서 당신도 외판을 하면서 배다리 책방을 찾게 되었다고 하셨다. 여전히 그 외로움들이 책을 찾고, 책방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도움이 될 줄 수 있는 일이 책방이라는 생각에 시작하셨다 한다. 책방은 그렇게 그 외로움과 외로움의 친구들이 모이는 곳, 그렇게 한 시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마 그 싹은 책이 아니었을까? 문학을, 철학서를 보게 되면서 생각이란 걸 하게 되었고, 그것이 삶이 되었고, 책이 되었고, 책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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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의 대화속에서 자연스럽게 ... 오래된 것과 새 것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나이든이와 청년과 어린이가 또 그렇게 어울려 살아가는 것 .. 그래서 함께 흐르는 것 ..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 무엇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져간다. 책이, 건물이, 집이, 마을이 그렇게 스스로의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지 누군가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배워가는 거다. 그것이 책과 책방과의 40년을 통해 당신이 우리들에게 건네는 지혜였다.
 
책도 적어지고, 헌책방 뿐 아니라 책방 자체도 적어지는 첨단의 시대, 책방을 찾는 사람들도 귀하고, 그 책방을 살아내는 이들도 귀해졌다. 손에 들고 다니는 인터넷이 생기면서 책 자체가 사라질꺼라는 우려와 두려움도 있다. 책방을 하면서 먹고 살기란 참 곤란한 시대가 된 것. 먹고 살기를 모색하면서 책방은 정보의 바다에서 문화 공간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이 시대에 헌책방은 우리들 앞에, 아니 내 앞에 어떻게 서 있는지 문득 자문하게 된다.
 
   
* 2013년 10월 17일 오후 1시, 아벨서점 인터뷰 진행, 녹취, 정리 사진촬영. 곽현숙 선생님의 최종 검수를 받아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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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국 2013-11-09 00:12:55
인고의 세월을 보내신 사장님 존경합니다.
힘 내시고 건강하십시요.

안정호 2013-11-06 10:17:13
정말 행복한 공간이었습니다.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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