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언론공백기와 인천 지역사회
상태바
15년 언론공백기와 인천 지역사회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10.07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중일보 창간69주년 특집] 3(완)

1973년 9월 1일 수원에서 경기도 통합신문으로 발간된 <경기신문> 창간호.

1973년 9월 1일 경기도 언론 강제 통폐합의 주역으로 가장 주목할 인물이 바로 <연합신문>의 사장에서 통합신문으로 <경기신문>의 사장으로 취임한 홍대건이다. 홍대건은 김종필이 공화당 사전 조직 때 그 밑에서 실무 일을 했던 인물로 수원의 이병희 전 의원과도 잘 아는 사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앙정보부 등 권력기관을 등에 업고 수원의 실세인 이병희 국회의원과 협력하면서 경기언론의 통폐합을 지휘했다. 창간이 이미 몇 달 전부터 예고되었지만, 창간 당시 <경기신문>은 윤전기 조립도 완전히 끝나지 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편집팀은 서울 <조선일보> 뒤편 여관에 머물며 제작 1주간을 <조선일보>에서 인쇄했다고 하니, 유신정권이 강제했던 시설기준에도 미흡했던 <경기신문>이 경기언론을 대표하는 유일신문으로 선정되었던 저간의 배경에는 뭔가 권력의 탈법적 행위가 자로잡고 있었을 터이다. 이점 거듭 밝혀야 할 묻혀 있는 과거사이다.
 
홍대건 경기신문 초대 발행인

<경기신문>은 발행인 겸 사장 홍대건, 편집국장 조창환, 논설위원 김형희, 이창식, 편집부국장 오광철(吳光哲), 엄무국장 임상규, 공무국장 홍청(洪淸)으로 진용을 갖춰 출범했다. 홍대건 사장은 1973년 9월 1일 발간된 <경기신문> 창간호에 ?창간사?와는 별도로 ?독자에게 드리는 인사문?을 게재해 <경기신문>의 지향을 자세히 밝혔다.
 
이제 본인은 존경하옵는 350만 경기도민과 항상 존의를 베풀어주신 강호제현의 지도편달이 반드시 계실 것을 확신하면서 경기신문이 펴나갈 행동목표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밝혀두고자 합니다.
첫째 경기신문은 유신시대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오늘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유신과업이 최고봉에 설 것을 다짐합니다.
둘째 경기신문은 보장받은 언론의 한계 내에서 불의와 대항하는 정론의 개진과 정필(正筆)의 구사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나 그 궁극의 목표는 국가이익과 지역사회 이익에 두고 발전적 사회건설에 보탬이 되는 강직·건전·정확한 여론을 형성해 나갈 것입니다.
 
<경기신문>의 행동목표로 첫째, ‘유신과업의 최고봉에 설 것“과 둘째, 국가와 지역사회의 이익에 목표를 두고 발전적 사회건설에 보탬이 되는 강직, 건전, 정확한 여론 형성’을 지적하고 있다. <경기신문>은 또한 ?의식하고 행동하는 신문?이라는 장문의 창간사를 실었다.
 
경기신문은 무엇을 어떻게 지역사회와 국가민족에게 봉사하며 헌신할 것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경기신문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것은 경기신문이 지향하는 부동의 목표인 동시에 바꿀 수 없는 신념이다.

‘一道一社’의 호조건 속에서 국가와 민족, 지역사회를 위해 충성하겠다는 신문사의 논조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1974년부터 거세가 일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언론민주화 투쟁과 <동아일보>의 광고해약사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도일사에 입각한 언론은 정론직필에 나설 수 없는 억압된 환경이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도 경기도청이 있는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니, 인천지역으로서는 참으로 낯선 신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원시 교동 136번지에 본사사옥을 갖춘 <경기신문>이 해를 거듭할수록 지면을 늘리며 발전해갔다. 반면에 두 개의 신문사를 강제 폐간당한 인천은 경기신문 인천국(仁川局)이 운영되다가 1977년 중구 항동4가 16번지 전 인천전매청 건물에 별도 사옥을 마련하고 인천분실을 두어 본사 완전 직영제로 운영했다.
 

수원의 경기신문사 현판식 

<경기신문>과 홍대건 사장은 유신정권 내내 순항했다. 그러나 1980년 5·17계엄과 5·18강제 진압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게 경영권을 내놓게 된다. 1973년 9월부터 당시까지 경영 전권을 쥐고 있던 발행인 겸 사장 홍대건도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보안사에 끌려가 신문사 포기각서를 쓰고 물러나면서 경영권 일체를 정부에 헌납했다고 한다. 새로운 경영진은 16억 원으로 <경기신문>의 모든 재산과 권리를 인수받아 1980년 11월 1일을 기해 임원진을 개편했다. 새로 구성된 법인은 <경기신문>을 범지역적 신문으로 육성하기 위해 수원 이외의 주주를 끌어들였는데, 최종 주주지분은 인천이 64%, 수원 및 기타지역이 36%였다.

이듬해인 1981년 7월 1일,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되자 <경기신문>은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하여 이듬해인 1982년 3월 1일 <경인일보>로 개제한다. 인천과 경기지역을 동시에 수용하겠다는 취지에서 <경인일보>로 개제했을 뿐만 아니라, ’73통폐합의 주도권을 쥐었던 <연합신문>의 전신이었던 <인천신문>의 지령을 승계해서 그해 9월 1일에 창간 9주년이 아닌 창립 22주년을 선포했다. 그러나 <경기신문>이 <경인일보>로 개제하고 <인천신문>을 모태로 선언하면서 인천과 경기의 대변지임을 강조했지만, 직할시로 승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이 없다는 사실은 인천시민의 자긍심에 손상을 입혔다. 중앙지조차 직할시 인천에 신문이 없다는 점을 사설을 통해 통박할 지경이었다.
 
전국지와 지방지의 확연한 성격구분도 없으며, 지방지는 지역발전을 주도하는 본래의 역할을 다하기에 어려운 실정이다. 교통과 통신망의 발달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고 하면서 타 지역에 대한 취재제한을 받고 있다. 전국지는 도청소재지에도 주재기자를 둘 수 없다는 폐쇄적 조처가 일방적으로 강행되고 있다. (···)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의 용지난에 언론통제라는 목적을 덧붙여 1현1지제를 채택했는데, 이런 버려야 할 不善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수도 서울에는 8개 일간지가 전국지로 발간되는데, 인구 350만이 넘는 부산에는 50만의 제주도와 똑같이 일간지는 하나뿐이어서 광고수요 소화에 발을 맞추지 못한다. 1백만이 넘는 직할시이면서도 인천은 신문이 없는 세계유일의 비문화적 도시의 오명을 쓰고 있다.
 

1982년 경인일보 현판식

인천의 지역언론 부재 상황은 이처럼 전국적으로 조롱거리였다. 1973년부터 시작된 인천언론의 부재상황은 1981년 7월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어 ‘一道一社’ 정책이 1988년 언론자유화 조치에 의해 철폐된 이후에 비로소 가능했다. 1973년부터 1988년까지 만 15년간 인천은 지역의 정론과 정보를 다루는 신문이 없어 인천상공회의소가 월2회 발간하다가 순간(旬刊)으로 전환한 <인천상의보>가 그런 역할을 대신했다.

1973년 9월 1일 인천지역 언론이 강제 폐간되고 수원에서 새로 창간된 <경기신문>으로 통폐합된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유신독재의 강압 아래 ‘1도1사’ 언론 통폐합 조치에 따라 많은 기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인천언론의 공백을 목격했던 언론인들도 이미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손해를 본 건 15년간이나 인천의 매체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인천시민들일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15년간 인천 지역언론의 공백이 인천 지역사회에 어떤 후과를 남겼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적 과제도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1988년 언론 자유화 조치와 1995년 지방자치제의 전면실시 이후 인천광역시로 거듭된 인천 지역사회에 유신체제가 남긴 낡은 유산은 없는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연구해야 할 과제가 인천지역사회에 부과되고 있다. 오늘날 인천광역시의 병폐로 지목되는 ‘주인이 없는 도시 인천, 문화의 불모지 인천’이라는 자천타천의 굴레가 혹 그 시대의 후과 때문은 아닌지, 인천 지역사회가 새삼 깊이 연구해봐야 할 것이다.

1973년 언론통폐합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언론자유화정책에 따라 1988년 창간된 <인천신문>의 출현이 그것이다.
 
150만 인천시민이 그렇게도 안타까이 소망하고 원하였던 우리의 향토지 인천신문이 15년 만에 드디어 오늘 첫 선을 보인다. 지역신문은 지역주민들에게 있어 지역사회를 보게 하는 눈과 같은 것이다. 지역의 신문을 잃는다는 것은 주민의 그 사회의 장님이 되는 것과 다름 아니다. 73년 지방지 통폐합으로 인천에서 일간신문이 없어진 것은 결국 시민이 눈을 잃은 것과 같다. (···) 인천신문은 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의 일대 전환과 함께 정치, 경제 및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민주화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구시대 언론정책의 청산과 더불어 특히 인천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시대와 지방화 시대의 도래와 때를 같이 하여 창간됨으로써 그 의의가 크며 시민들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위 글은 1988년 7월 15일자로 창간된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창간사의 일절이다. 1987년 6·29선언의 후속조치에 따라 언론 자유화 조치가 발표되자 1973년 강제통폐합에 따라 수원의 <경기신문>(현 <경인일보>) 주주로 참여했던 인천의 주주들은 1987년 10월 14일 경인일보사 임시주주총회 석상에서 인천지역에 새로운 신문을 설립하겠다는 안건을 냈다. 이후 인천지역 법인을 포함해 15인의 주주들이 모여 ?인천신문 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자본금을 모아 <인천신문>을 창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경인일보>의 55% 주주들이 빠져나와 <인천신문>을 창간했던 것이다. 새로 창간한 <인천신문>의 편집국 진용은 1980년 <경기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오광철, 1973년 <경기매일신문> 편집부장과 부국장을 역임한 오종원을 비롯하여 김창수, 이재호, 최용표, 정종웅 등이 <인천신문>의 창간에 참여했다. <인천신문>의 창간 5일 뒤에는 <기호일보>가 창간됐는데, 이 신문은 인천 지역종합일간지가 없던 시절 <경기교육신보>라는 주간지로 지역언론의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언론 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지자 일간지로 전환했던 것이다.

’73지방지 강제 통폐합으로 인해 신문을 잃어버렸던 인천은 1988년 언론 자유화 조치 이후 오히려 지방언론의 과포화 상태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2011년 기준으로 인천에는 무려 23개의 일간신문이 난립하고 있다. 이는 부산의 20개, 대구의 6개, 광주의 28개, 대전의 16개, 울산의 17개와 견줄 때 두 번째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인천에 본사를 둔 일간지는 4(1)개 언론사뿐이고, 인천본사를 운영하는 일간지는 3개, 인천에 주재하는 언론사는 15개에 이른다. 인천본사를 두거나 인천에 주재하는 언론은 경기도에 본사를 둔 언론사가 대부분인 셈이다. 이들 지역 일간신문의 독자현황을 보면 참담하다. 한국ABC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천의 일간신문의 배포수는 43,548부인데, 유료부수는 25,058부이다. 점유율로 따지면 주재기자만 두고 있는 중앙일간지가 90.2%를 차지하는 데 비하여 지역 일간지는 불과 9.8%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한국언론연감 2011>의 자료에 따르면, 신문과 방송, 인터넷매체를 포함한 2010년 인천의 언론산업의 매출액은 전국 광역시도 중에서 최하위이다. 물론 서울이 전체 언론산업의 84.6%로 차지하는 심각한 중앙 집중현상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공영방송이 없는 인천에는 50개의 많은 언론이 적은 매출시장을 놓고 각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론산업 중에서 지역종합일간지가 가장 많은 65.5%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는 전술한 바와 같이 인천에 본사를 둔 일간신문은 불과 4개에 불과하고 나머지 18~19개이 언론사는 경기도와 인천에 속된 말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신문들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천을 독자적 삶의 단위로 여겨 깊이 파고드는 지역언론을 만나기를 쉽지 않다. 지역민들이 관심있게 공유할 만한 의제나 지역 이슈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 채 중앙언론의 의제에 끌려다는 듯한 모습을 지역신문이 오랫동안 보여왔고, 이는 결국 시민들이 지역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지역언론의 위기는 곧 그 지역사회 민주주의의 위기로 연결된다.
 
(단위 : 백만 원)
구분 업체수 지역종합일간 기타전문일간 전국종합주간 지역종합주간 전문주간 공영방송 민영방송 인터넷종합신문 인터넷지역신문 인터넷전문신문 합계 비중
부산 49 65293     605 4867 42626 50003 63 303 1132 164,892 2.0
대구 40 59054     388 3652 39795 34148 212 668 978 138,895 1.7
인천 50 29692 183 36 707 5521 - 5574 898 892 1861 45,364 0.6
광주 52 45553   45 335 4265 27091 27797 317 251 445 106,099 1.3
대전 54 19287 315   - 5103 28026 25152 266 1207 1432 80,788 1.0
울산 27 14221     1507 181 27270 20058 - 1322 351 64,910 0.8
경기 317 81352 332 197 13664 13228 - 39695 3475 5832 4322 163,793 2.0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가? 인천을 독자적인 삶의 단위로 삶는 지역언론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1년 직할시 승격과 1995년 광역시 승격과 함께 전면적으로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음에도 이후에도 인천 지역은 튼튼한 지역언론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유신정권의 인천 지역언론 강제 폐간으로 인한 인천 지역언론의 거세와 지방자치제의 성숙과는 상반되게 인천과 경기도에 양서하고 있는 언론사의 분립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한다. 근본적 연원은 인천이 경기도 내의 최대 도시이면서 수원으로 경기도청으로 이전하면서 발생했던 역차별로부터 기산해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여기에 서울에 인접한 수도권 도시로서 도시의 독자성을 갖추지 못한 인천지역사회의 무능력도 한몫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