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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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 이재은 기자
  • 승인 2014.12.01 0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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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기자의 인천문화 관람기] 3-영화 <거인>과 소설 <나가사키>

17세 영재는 고아가 아니다.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동생도 있다. 하지만 혼자다. 엄마는 몸이 아파 자식을 돌볼 수 없고, 아빠는 자신과 동생을 이용해 종교시설에서 지원금이나 받아먹으려고 한다. 동생은 철없고 눈물 많은 중학생. 잔혹한 현실이다. 지긋지긋한 집을 벗어나 제 발로 그룹홈에 들어가지만 ‘제 집’ 아닌 공간이 편할 리 없다. 영재는 눈치 빠른 아이, 신부가 꿈인 착하고 성실한 아이로 자신을 가꾼다. 이유는 단 하나, ‘홈리스’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다.
 

영화 ‘거인’을 만든 김태용 감독은(‘만추’의 김태용 감독이 아니다) 한 인터뷰에서 “나도 중고등학교 때 그룹홈에서 자랐다”고 고백했다. 영화 속 영재처럼 부모가 자신을 책임질 수 없다는 불안감에 신앙심이 없었음에도 가톨릭계 그룹홈에서 신부가 되려고 발버둥 쳤다. “그 시절의 나와 화해하고 싶었다. 그 시절을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거인'을 찍었다.”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영재는 거짓말과 아부, 도둑질로 ‘임시 부모’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여기서 살게 해주세요.”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폭발적인 찬사를 받은 ‘거인’은 성장통보다 인생의 고통을 먼저 겪은 열일곱 소년의 이야기다. 영재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거인이 되지만 사실은 작게, 더 작게 자신을 축소시키고 싶다. 난쟁이처럼 작아져 ‘지옥 같은 제 집’이 ‘살만한 집’으로 바뀔 때까지 타인의 조그만 공간을 훔쳐 쓰고 싶다.

56세. 남자는 혼자 산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산 것 같은 음식물이 없고, 3개였던 요구르트가 2개뿐이다. 자신을 의심하기 전에 증거를 확보하기로 한다. 자로 주스의 양을 재보기로 한 것. 아침에는 분명 15미리였던 주스가 저녁에 집에 와보니 8미리다. 누구의 짓이란 말인가. 집에 유령이라도 사는 걸까.

거실에 웹캠을 설치하고 회사에서 지켜본다. 얼마 후 화면 앞을 쓱 지나가는 사람의 몸체. 여자다. 남자는 자기 또래의 여자가 거실에 있는 걸 포착한다. ‘혼자 살더니 정신이 나갔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두려워 그동안 신고도 하지 못했다. “경찰서죠? 누군가 무단침입을 했어요.” 경찰이 다다미방에서 여자를 찾아냈다. 벽장 속에 있던 여자는 남자처럼 혼자다. 58세. 놀랍게도 그 집에서 1년을 살았다. 2008년 아사히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일본에 머물던 프랑스작가가 소설로 만들어냈다.

여자는 수입이 없어지자 살던 집에서 나와야 했고 그렇게 도시를 떠돌던 중이었다. 남자가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가는 걸 본 여자는 잠시 그 집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지붕 아래, 따듯한 보호막이 있으니 좋았다. ‘잠시’가 일 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여자가 수감된 후 집주인이었던 남자는 그녀가 머물던 다다미방에 들어가 벽장 안에 누워본다. 사람이 머물만한 곳은 아니다. 한껏 웅크려야 한다. “그렇다. 그녀에게 남은 건 웅크린 동물의 모습뿐이었다.”(47쪽) 노숙인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숨죽인 동물이 되기로 한 여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2010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했다.

‘거인’의 주인공 영재는 난쟁이, ‘나가사키’에 등장하는 독신녀는 웅크린 동물이다. 이 사회는 왜 그들에게 인간답게 쉴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가. 한국에서 태어난 소년과 일본 태생인 어느 여인의 바람은 ‘지옥보다 조금 더 나은 쉼터’에서 머무르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과 부모, 집주인을 속이면서까지 그들이 원했던 것은 두 발을 뻗을 수 있는 무덤만 한 자리뿐.

시인 김이강은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않을 길 위에서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라고 물었지만 영재와 여인은 매일 숨죽이며 속삭였다. “그룹홈에서 살게 해주세요.” 영재가 ‘진짜 아닌 아버지’에게 무릎 꿇고 매달려 울부짖은 것처럼 독신녀도 매일 숨소리마저 참으며 주문을 외웠을 것이다. “당신 집에서 자게 해주세요.” 우리 모두는 우주(space)가 아닌 텅 빈 공간(space)에서 살아간다. 외롭고 쓸쓸하게.


* 기사 제목은 김이강 시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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