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 떠나는 젊은 청춘의 마음을 오래 지켜온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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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떠나는 젊은 청춘의 마음을 오래 지켜온 나무
  •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 승인 2015.02.0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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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 이야기 (2) : 월성 육통리 회화나무

천년고도 경주시의 북서쪽에는 평안한 마을 안강(安康)읍이 있습니다. 안강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며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 매양 평안하기만 하겠습니까만, 고요한 마을인 까닭인지 언제라도 마을 이름처럼 평안함을 느낄 수 있는 선한 마을입니다.

이곳 안강에는 경주 사람들이 ‘경주의 정이품송’이라고까지 부르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18호에 지정된 ‘월성 육통리 회화나무’입니다. 1989년까지 월성군에 속했다가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95년에는 아예 경주시로 통합해 이제 월성이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지만, 근사하고 곱게 늙은 이 나무에만 옛 이름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근사하고 곱게 늙은 나무라고 하긴 했지만, 실제로 나무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여느 회화나무에 비하면 그 생김생김이 훌륭하다 하기에 조금 못 미칩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긴 세월만으로도 근사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사하다’고 한 건 그래서였습니다. 겉 모습만으로 그리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들어와 이미 오래 전에 우리 땅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회화나무는 자람새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긴 세월 동안 건강하고 늠름하게 살아가는 나무로 손꼽히는 종류입니다. 느티나무 못지않게 가지를 넓게 펼치면서 자라기 때문에 오래 된 마을의 당산나무나 정자나무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우리의 대표적인 노거수 종류이지요.

회화나무는 선비들이 좋아했던 나무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옛 선비들은 집을 옮겨갈 때에도 이 회화나무를 함께 옮겨갈 만큼 아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이죠. 또 회화나무에 우윳빛 꽃이 피어날 즈음이 곧 학동들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야 할 시기라는 점에서도 선비의 상징이 될 법합니다. 그런 저런 까닭에 회화나무는 아예 ‘선비나무’ ‘학자수’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양에서 회화나무를 Scholar tree 라는 별명으로 부른다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과거 시험이 있었던 것도 아닐텐데, 동서양이 이 나무를 보고 받은 첫 느낌이 비슷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회화나무는 발음을 정확히 하기 쉽지 않습니다. 까닭에 지방마다 회화나무의 표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홰나무’나 ‘회나무’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생뚱맞게 ‘호야나무’라고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게다가 전체적인 생김새가 느티나무와 비슷한 까닭에 두 종류의 나무를 섞어서 부르는 지방도 있어요. 회화나무를 한자로 표기할 때에 ‘괴(槐)’를 쓰는데, 이 글자는 느티나무를 뜻하기도 하는 바람에 더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산림청의 보호수 목록 가운데에도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혼동하는 경우는 종종 발견됩니다. 생김새나 분위기는 비숫하지만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이고, 회화나무는 콩과의 나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나무입니다.

 

경주 안강읍 육통리 마을 안쪽, 마을회관 곁에 서 있는 회화나무는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회화나무 가운데 오래 살아온 나무로는 손꼽히는 한 그루의 거목입니다. 6백 년 전에 이 마을에 살던 김영동이라는 젊은이가 이 자리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중국의 홍건적이 고려에 칩입하던 고려 공민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김영동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움터에 나가기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가 떠난 뒤 홀로 남을 어머니 걱정을 덜어낼 수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청년 김영동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어머니께 마치 자신을 보살피듯 이 나무를 보살펴 달라고 말씀 올렸습니다. 나무가 잘 살아나면 자신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였지요. 그게 이 나무가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시작입니다.

그러나 전장에 나간 젊은 청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김영동의 어머니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과 그의 후손들은 청년의 지극한 효성을 생각하며, 마을의 상징으로 나무를 애지중지 보살폈습니다. 나중에는 이 나무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 날 밤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올렸습니다. 동제는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6백 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나무는 높이 19미터, 가슴높이 줄기둘레 6.2미터의 거목으로 자라났습니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소원은 이루지 못했으나 나무에게 기댄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나무가 소원을 잘 들어주는 영험한 나무로 근방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월성 육통리 회화나무는 찾아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동반합니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 즉 생육 공간이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마을 중심에 서 있고, 나무 바로 곁에 마을 회관이 있으며, 그 곁으로 여러 채의 살림집들이 이어지는 바람에 나무가 선 자리가 비좁다는 상황이 그 이유입니다. 나무 바로 곁으로 마을 골목 길이 붙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됐습니다. 그나마 얼마 전까지 이 골목길 맞은 편에 있던 낡은 집을 철거해 공간이 조금 넓어지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주요 통로인 나무 옆 길은 어쩔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건 사람의 마을에 들어와 살기 위해서 나무가 겪어야 하는 하릴없는 운명일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우리 곁에 살아남아 더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더 많이 들어주기를 바라고 싶지만, 우리가 그에게 해 준 것이 지나치게 모자라 안타까울 뿐입니다.

 


□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이 원고는 홈페이지 솔숲닷컴(http://solsup.com)의 ‘나무를 찾아서’ 게시판에 함께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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