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려면 치유가 먼저 - 공수경 단편 청소년소설 <상후, 그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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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려면 치유가 먼저 - 공수경 단편 청소년소설 <상후, 그 녀석>
  • 이한수 선생님
  • 승인 2015.02.04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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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13.

단편 <상후, 그 녀석>이 수록된 [조태백탈출사건-제6회 푸른문학상 수상작품집](푸른책, 2008) 본문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 어른은 없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 못 하면 미래가 암담할 뿐만 아니라 사람대접도 못 받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거든요. 스트레스가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닙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아드레날린 같은 생리 물질을 분비하게 하여 몸에 활력이 생기도록 한답니다. 인류의 진보는 도전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라고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견디기 힘들 만큼 심한 스트레스에 늘 시달리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강박증이 생겨 공부는커녕 심각한 정신질환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공부를 위해서도 속으로 뭉쳐 있는 울화를 풀어내야 합니다. 독서 치료(리딩큐어), 영화 치료(시네마테라피)는 그 유효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독서 치료의 전문가들은 치료가 이루어지는 원리를 삼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작품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마음속에 억눌러 두었던 감정을 표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강박증을 일으킬 정도로 심해진 심리적 긴장을 완화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문학 비평 용어로는 ‘카타르시스’라고 하는데 감정 배설(눈물)을 통한 정서의 순화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지만 해소할 데가 없어 속으로 뭉쳐 있다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표출되면 그게 바로 히스테리(화)라는 겁니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면(화를 내면) 그 자체가 또 심리적 상처가 되어 아픈 기억을 더욱 깊숙이 묻어두게 되니 치유가 더 어렵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치유가 되도록 하려면 부드럽게 차근차근 아픈 기억을 되살려 내고 그때의 심정을 표현하는 통찰의 과정을 밟아 가야 한다고 합니다. 영화 치료의 이론적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독서 치료 이론가 ‘메닝거’가 작품을 통해 독자는 동일시, 정화, 통찰이라는 삼단계의 심리적 반응을 한다고 했는데,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에 공감하게 되고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먼저 그 속을 들여다봅시다. 그 고통을 보게 되면 아이가 왜 신경질을 내며 폭력적인 행동까지 하는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라야 그 마음속에 맺혀 있는 울화를 풀어줄 수 있습니다. 전교 5%의 성적이면 아주 우수한 편인데 그렇게 공부를 잘 해도 엄마를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고 갈등은 더 깊어지니 이를 어찌 하면 좋습니까. 정말 미쳐버릴 노릇이지요. ‘상후’는 잠에서 깨어나면 먼저 책상에 가 앉는 게 버릇이 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만큼 성적도 좋습니다. 중간고사 성적도 그만하면 괜찮게 나온 편인데 엄마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1%에 들 수 있다며 만족할 줄 모릅니다. 시험 잘 보면 점찍어 둔 뮤직비디오 사주기로 약속한 걸 까맣게 잊었는지 한마디로 거절을 합니다. 짜증이 아니 날 수 없습니다. 엄마는 힘내도록 동기 부여 한다고 그랬다지만 성적 결과에 따라 보상을 해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상후’는 속으로 골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상후’의 마음속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상후는 학원에서 돌아온 뒤, 엄마와 눈도 맞추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가 상후 뒤를 따라 들어왔다.

“뭐 하는 거니? 학원 다녀왔으면 엄마한테 인사부터 해야 할 거 아냐? 버릇없이.”

상후는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했다. 그와 동시에 엄마 손이 상후 머리로 날아왔다. 상후는 잠시 정신이 얼얼해졌다.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 손이 다시 날아왔다. 상후가 엄마의 손목을 잡았다. 엄마는 멈칫하는 듯하더니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너, 당장 놓지 못해?”

상후는 엄마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엄마가 다시 상후의 머리를 쳤다. 상후는 가만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배운 거야? 도대체 누가 이렇게 가르쳤니? 이게 자식이 부모한테 할 태도야?”

엄마는 상후의 묵묵부답에 더 화가 나는 듯했다. 엄마는 요즘 들어 잘 안 들던 회초리까지 동원해 상후를 위협했다. 상후는 자신이 왜 맞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소리지르고 회초리로 때릴수록 상후의 마음 속 화산은 더욱 뜨거운 용암을 뿜어 낼 뿐이었다.

상후는 엄마가 나가고 난 뒤, 엠피쓰리를 틀었다.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스피커 소리를 높였다. 엄마가 들어와 엠피쓰리를 껐다.

“압수야. 너 같은 녀석한테 이런 걸 사 준 내가 미쳤지.”

엄마는 엠피쓰리를 빼앗아 방을 나갔다. 며칠 만에 다시 엠피쓰리를 빼앗긴 것이다. 상후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목이 터지게 소리를 질렀다. 한참 후, 이불을 감싸 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초점이 사라진 상후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상후는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잠이 깼다. 목이 말랐나 보다. 시계를 보니 11시 50분이었다. 주방으로 나가 물을 마시고 들어오다 베란다를 힐끗 보았다.

‘그 녀석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상후는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집을 찾았다.

‘이렇게 남의 집을 훔쳐보는 것도 법에 걸리는 거 아닌가? 보지 말까? 아냐. 내가 이상한 걸 보는 것도 아니고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안 되는 행동이긴 한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이런 갈등을 하는 사이, 상후의 눈은 벌써 그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역시 ‘BB’ 그룹이 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녀석을 찾아보았다.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상후의 눈에 점점 그 녀석이 생생히 보이기 시작했다. 상후와 비슷한 학년 같았다. 헐렁한 청바지에 헐렁한 검은색 티. 눌러쓴 모자 아래로 보이는 녀석의 자유로운 표정. 그 녀석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몸짓이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했다. 빙그르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어, 저 녀석 좀 봐.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었어.’

그 녀석은 텔레비전 화면과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학생들이 잘 공감하는 작품입니다. 독서 토론을 할 때 학생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몇몇 학생은 이 작품의 주인공과 비슷한 자기 경험을 말할 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어른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부 때문에 몽유병에 걸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 논평하는 게 일반적인데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꼭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공부 때문에 발생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은 바로 이런 공감대 차이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상후’가 베란다에서 본 옆 동 아이의 힙합 댄스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입니다. 상후는 꿈속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 옆 동 아이 집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베란다에서 깨어나기까지 했으니 몽유병 증세인 게 분명합니다. 어찌 보면 꿈속에서라도 그토록 꿈꿔온 힙합 댄스를 마음껏 출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강박증은 더 심해지고 울화가 어디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공감한 아이는 속으로만 눌러둔 자기 고민이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란 걸 알게 되고 그 고민을 털어놓을 용기도 갖게 될 겁니다. 이 작품을 읽은 어른은 그 고민에 대해 공감하고 들어줄 수 있을 겁니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도,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도 꼭 이런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동이 없는 각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강요된 각성은 스트레스만 키우고 스트레스는 강박을 일으켜 나중에는 히스테리를 터트리게 됩니다. 공부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하는 통찰의 기회가 된다면 그런 감동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배움은 큰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고생한 보람이 됩니다. 문학 작품, 즉 감동적인 스토리는 감정이입이 되어 공감함으로써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합니다. 서둘러 암기하고 파악해야 할 과제가 감동을 줄 리 만무하고 그런 과제 수행은 통찰은커녕 스트레스만 쌓이게 할 뿐입니다. 문학마저도 아이들의 울화를 치밀게 하다니 작금의 우리 교육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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