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병고’와 ‘외로움’은 내 인생의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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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병고’와 ‘외로움’은 내 인생의 재산"
  • 최일화 객원기자
  • 승인 2015.07.2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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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번째 시집 낸 랑승만 시인

‘가난’과 ‘병고’와 ‘외로움’은 내 인생의 대단한 재산

19번째 시집 낸 원로시인 랑승만


지난 7월 21일 오랜만에 랑승만 시인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1933년생이다. 올해 우리나이로 83세다. 시인은 1980년 한국잡지기자협회 회장으로 일할 때 잡지협회 이사회 참석 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금까지 35년째 투병생활을 하며 시작에 몰두해 왔다. 새로 시집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늦은 시간에 연수동 주공아파트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는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맏아들 ‘정’이가 금세 대답을 하며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다. 방으로 들어서니 선생님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계셨다. 염려하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선생님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고 표정도 밝으셨다. 병원출입도 못해서 아들이 약을 타다 먹는 것이 고작이라고 하셨다. 아들 정이가 얼음물에 녹차를 타서 내놓은 후 새로 나온 아버지 시집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생사를 뛰어넘는 우주의 뜨락>, 실로 원로시인의 면모가 그대로 내비치는 제목이라고 느끼며 책장을 펼쳤다. 몇몇 낯익은 제목이 눈에 띄어 시 선집을 내신 거냐고 여쭈니 몇 편을 제외하곤 모두 신작시들로 펴낸 시집이라 하셨다. 나는 책장을 넘기다가 한 편을 읽어본 것이 우연히<놋그릇 이야기- 3>이라는 시였다. ‘1940년대 조선 사람의 하늘이었던 유기령별곡鍮器靈別曲’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놋그릇에 영혼을 불어넣어 일제 말기 전쟁에 혈안이 된 일제가 백성들의 놋그릇을 모두 강탈해서는 대포알을 만든 그 암울한 역사적 사실을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노래한 서사적인 작품이다. 비교적 긴 시의 말미 부분을 인용해본다.

…………………………

…………………………

전략(前略)

…………………………

태평양 전쟁에서 밀린

쪽배놈들

대포알, 총알 만들고 남은

놋그릇들을 주워 모아

대륙침략의 선봉 왜놈장군

「노기마레스께」의

죽은 귀신 담은 ‘노기마레스께’의 신사를

南山에 만들어 세우고

고귀한 조선의 하늘

놋그릇들로 ‘노기마레스께’

말 탄 동상을 만들어 세웠나니

‘노기마레스께’동상의

목줄기에 달라붙은

조선의 놋그릇 鍮器靈이

노하시어

엉 엉 엉 서럽게 우셨나니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놋그릇 이야기- 3 마지막 연)

 

우연히 펼쳐진 시를 읽고 ‘노기마레스께’가 궁금하여 여쭈었다. 선생님은 일본 놈 장수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던 인물이라며 일제의 악랄한 만행을 얘기하시던 중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여러 번 선생님과 대면을 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이날 처음 듣는 것이었다. 시인의 나이 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연세 마흔 살 때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야학으로 학생들에게 조국의 역시와 한글을 가르치셨는데 결국 일제의 강압으로 그마져 못하게 되자 그만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가족사는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그날 처음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셨다. 방에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초상화가 어머니 초상화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 또 하나의 초상화가 세워져 있었는데 마치 개화기 지식인 모습을 한 젊은이의 초상화였다. 저 초상화는 누구의 것이냐고 여쭈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부처님의 초상화라는 말씀이었다. 의아하게 생각하여 재차 여쭈니 그 초상화에 대한 설명을 하시는 것이었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그 초상화가 있고 선생님 거처에 하나가 있는데 이번 시집에 <머리 안 깎은 부처>라는 시가 있다 하시기에 나중에 돌아와 그 시를 읽으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머리 안 깎은 부처


영취산靈鷲山 니르바나 언덕 안마당에서였다.

석가모니는 따뜻한 햇살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제자 브루노 尊者가 차를 다려 드리고

제자 브루노는

머리 안 깎은 석가모니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삭발 출가 하루 전의 일이었다.

석가모니는 웃었다.

無名과 煩惱와 머리칼은

同質品性이다.

내일 머리를 깎아라.


브루노가 머리 안 깎은 석가모니의 얼굴, 초상화를 그려 남겼다.

참 인간의 얼굴을

그리고 머리를 깎아드렸다.

 

머리 안 깎은 석가모니의 참 얼굴

肖像畵 하나

우리 如泉庵에 모셔져 있네.

 

세상 寺刹에

앉아 있는 부처는

그저 단순한 미술품인 것을.

 

그 이튿날 석가모니는

肖像畵 한 장 달랑 남겨두고

제자 브루노 손잡고 동이 트기 전

宮城을 빠져나갔네.

위대한 출가의 첫걸음 아닌가.

 

머리 안 깎은

참 인간의 석가모니 肖像畵

英國 大英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는데

내 如泉庵에 또 한 장

모셔져 있는 名品일레라.


나는 궁금하여 ‘머리 안 깎은 부처’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으나 그 초상화를 찾을 수 없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출가 직전 머리 안 깎은 부처의 초상화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었다. 다음에 선생님을 방문해서는 그 초상화에 얽힌 얘기를 꼭 다시 들어보아야겠다.

나와 선생님의 인연은 꼭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인천에 온지 6년째 되던 해인 1985년에 나는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때 나는 인천에 문인협회가 있는 줄도 몰랐고 시인이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듣지 못하고 혼자서 열심히 습작을 쓰고 있던 때였다. 내가 알고 있는 문학지는 <현대문학>, <심상>, 그리고 <시문학> 정도였다. ‘시문학’지에 몇 번 작품을 보내봤으나 번번이 소식이 없었다.

원고 보내는 일에 시큰둥해진 나는 직접 시집을 출간하기로 마음을 먹고 발문을 누구에게 부탁드릴까 고심하던 중에 한 여성지에서 랑승만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힘겹게 투병하시며 시를 쓰고 계신 선생님의 기사가 내 눈에 번쩍 띄었다. 인천에도 시인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됐고 나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물어물어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그때 아마 어머니가 담근 맑은 약주를 한 병 들고 찾아갔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기꺼이 발문을 써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셨다. 그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과 마찬가지 고독과 병고와 가난이었다. 고등학교 학생인 듯한 큰아들과 중학교에 다니는 둘째아들과 함께 살고 계셨다. 사모님은 이미 잡지 기사에서 읽은 대로 선생님을 곁을 떠난 지 오래된 시점이었다. 선생님은 내 첫 시집의 발문을 써주셨다.

“이 시인에게 있어 미사여구나 겉 치례 같은 형용사 따위는 금물이겠다. 그렇다고 결코 아무렇게나 안이하게 다루어진 작품이라 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각박하고 냉엄한 현실(엄동)이라도 봄이 오는 자유를 노래하기 까지 커텐도 치고 난로도 피워 동장군의 횡포를 이겨내는 생활인의 슬기로운 자세를 일상의 생활어까지 구사하여 결코 거부감 느끼지 않게 따뜻하게 노래해주고 있다. 이 알마나 정감어리고 재미있는 분위기의 작품이냐.”

선생님은 칭찬 일색이셨다. 처음 중진 시인에게 칭찬 섞인 발문을 받고 나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발문은 이어졌다.

“그는 이렇게 시를 쓰며, 신앙하며, 그가 바라보는, 꼭 그가 써야하는 소박한 시 정신 속에서 새로 탄생하는 것이다. 시의 엽록소인 서정성의 결핍으로 윤기를 잃어,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는 바삭바삭한 영양실조 된 시가 행세를 하는 우리 시단에서 이만큼 축축하고 끈끈한 정감 있는 시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칭찬을 하시던 선생님은

“하지만 아직도 최일화 시인의 작업은 더 많이 험난하게 남아 있다. 더 말을 아끼고, 가다듬고, 에스프리의 값진 보배를 천착하여 보석처럼 빛나고 단단한 언어를 찾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따끔한 충고를 주시기도 했다.

이 시집을 발간하고 찾아뵈었더니 인천 문인협회 회원들 주소를 주시며 어느 회원에게는 ‘님’자를 붙이고 어느 회원에게는 ‘씨’자를 붙이고, 또 어는 회원에게는 선생님이라고 써서 시집을 발송하라는 충고의 말씀을 자상하게 일러 주셨다. 나는 그렇게 겉봉에 주소를 써서 인천 회원들에게 시집을 발송함으로써 문단 데뷔의 절차를 마친 것이다. 그 후로 인천문협에 가입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인천문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선생님의 19번째 시집을 한 권 받아들고 와서 나는 자꾸 감개가 무량해진다. 83세 노시인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시편들이 시집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 이 시집이 어떤 여건에서 탄생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엄숙해지고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이다. 선생님이 쓰신 <자서>와 <시인의 에스푸리>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한 몇 대목을 만나게 되었다. 우선 <자서>의 부분을 살펴보기도 한다.

“끝으로 실로 아름답게 명 팔순기념시집을 탄생시켜 주신 도서출판 JMC(자료원, 메세나, 그래그래>사의 임직원과 제주도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엄마 박연자 여사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뜻을 드린다.”는 대목이다. 나는 그동안 선생님이 아내하고는 거의 완전히 결별의 상태로 지내오시고 그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이 ‘자서’ 부분을 읽고는 가슴이 쿵쾅거릴 지경이었다.

어머니 없는 두 아들과 함께 아내 없이 근 사십 년을 살아오신 선생님으로부터 시집 ‘자서’에 이런 대목이 나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내막을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하겠느냐만 아이들 엄마가 어디에 살고 있고 이 시집 출판에 어떻게든 도움을 주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나는 선생님을 뵙고 두 아들들을 볼 때마다 측은한 감정이 마음에 차오르곤 했다. 선생님도 선생님이려니와 두 아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한 번도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늘 지니고 있었다.

자녀가 어머니와 연락이 되는지, 아니 한 번이라도 만나기는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깊고 넓고 질긴 모자지간의 정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그리고 또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시인의 에스프리’ 부분들이다. 모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지만 다음 부분은 선생님의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나의 시에서 맑고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학적 신조를 탄생시켰다. 즉, 시 한편을 쓰면 10년은 살고, 시 한 편 발표하면 20년은 더 살고, 시집 한 권 세상에 내놓으면 30년은 더 산다는 문학 정신적 정신생활 부활의지이다. 이는 내 시력詩歷 60년의 경륜이 터득한 진리이며 시의 등불이다. 그래서 내게는 끔찍한 재산이 탄생되었다. 내 인생의 삶의 무게로써 “외로움”, “가난”, “병고” 이 세 가지가 내게는 대단한 재산이다.

이 세 가지 재산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힘이 되어 의지와 집념으로써 내 아픔과 한을 이겨가며 시로써 거듭난다. 이 세 가지 재산은 내게 있어 절대적인 스승이 된다. 불가佛家의 말씀에 번뇌 즉 보리菩提란 진리가 있다. 즉, 번뇌 그 자체가 큰 보리(깨달음, 지혜, 행복)란 것이다. 어째서 인간의 고통인 번뇌가 최고의 지혜를 얻어 행복을 터득할 수 있겠는가.

‘생사生死 즉 열반’과 같은 말로써 중생의 미견迷見으로 보면 미망의 주체인 번뇌와 각오의 주체인 보리가 전연 딴판이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두 가지가 그대로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시력詩歷 60년의 경륜으로 터득한 시詩의 진리가 되고 있다.“

 

인용한 글에 선생님의 문학관이 함축 요약되어 있다고 본다. 참으로 귀한 말씀이다. 선생님의 삶의 여정을 조금이라도 지켜본 이는 알 것이다. 그 병고와 가난과 고독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이 시집을 보면서 비로소 옛날부터 하시던 그 말씀들이 진실이며 그 진실이 이제 탐스러운 열매로 익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엔 독자보다 시인이 많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아픔이 없는 문학, 절실하고도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은 채 언어유희로서의 문학, 간판이거나 장식으로서의 문학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상위의 가치이여야 할 문학이 하위의 가치에 예속되어 권력이나 세속생활의 시녀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엊그저께는 홍명희 선생님의 시집 출간 소식을 접했다. 인천의 문단에 80대 문학을 굳굳하게 지키고 계신 원로 선생님들의 참으로 경하해야 할 성취에 우리 후배 문인들은 참으로 감사함과 존경을 드려야 마땅하다. 그럼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집엔 6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제 5부로 구성되어 제1부에 11편, 제 2부에 연작 ‘간난이 한’ 13편, 제 3부엔 연작 ‘먼저 떠난 바람소리’ 5편, 제 4부엔 연작 ‘놋그릇 이야기’ 5편, 제 5부엔 26편의 시가 실려 있다.

우선 연작시를 살펴보면 2부의 ‘간난이 한’은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을 노래한 시편들이다. 선생님의 어머니 존함이 ‘간난이’였던 것. 3부의 ‘먼저 떠난 바람 소리’는 이 땅에 살다가 먼저 떠난 시인들을 노래한 시편들로 시의 대상이 된 시인들을 보면 박재삼, 박봉우, 서정주, 구상, 박남수, 전봉건, 이형기, 이한직, 김관식, 천상병 등 시인으로 시인들의 시를 빌어 와 짤막짤막하게 고인들을 회상하기도 하고 함께 어울리며 지냈던 문단 야사적 내용이 한 편의 시로 탄생되어 있기도 하다.

4부의 연작 ‘놋그릇 이야기’엔 우리나라 놋그릇에 영혼을 불어넣어 전쟁에 혈안이 되어 놋그릇을 모두 강탈해가서는 총알, 대포알을 만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1부엔 부처님에 귀의하는 시인의 간절한 참회와, 염원과 찬미와 부처님 품에 한 생애를 맡겨드리는 장엄한 시편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5부에서는 기억과 일상 속에서 얻은 시편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럼 1부에 수록된 표제시 ‘생사를 뛰어넘는 우주의 뜨락’을 인용한다

 

생사를 뛰어넘는 우주의 뜨락

 

나뭇잎 한 장 노을에 흔들리면 백 리 밖 강물이 넘쳐나고

 

나뭇잎 하나 바람에 떨어지면 천 리 밖 산자락이 들썩이고

 

천 리 밖 산자락이 흔들리고

강물이 넘쳐나고 하늘이 흔들리면

새의 날개, 꽃망울 하나, 구름 한 조각 풀잎이 흔들리고

 

아니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달빛 젖은 천강에 흔들리고

천강이 흔들려서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나니……

 

달빛 잠긴 강물이 이윽고 잠을 자고

달빛 내린 산자락이 고요해지고

 

적멸의 기쁨이 내려앉아

자유로운 새의 날개가 깃을 접고

꽃잎ㅍ이 고개를 수그리고 구름이 멈추고

우리들의 마음이 큰 자유의 강물에 잠기나니……

 

아, 한밤중 달빛 잠긴 천강이 춤을 추노니

아, 생사를 뛰어넘는 저 우주의 뜨락이 바로 여게인가

2004년 월간문학 6월호에 실린 이 작품에 대해 독문학자이자 고려대 교수인 송용구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을 했다.

“불교의 연기론에서 우러나온 통합적 세계관을 미려한 언어의 붓으로 채색하고 있는 시적 풍경화이다. 어느 한 곳에서도 단절과 막힘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호흡과 숨결을 주고 받으면서, 소통의 길을 열어간다.

죽음과 삶, 시작과 끝,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허물어져 있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했던 <열린 세계>란 이런 시세를 일컫는 것이 아닐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열린 세계>속에서 <나>와 <너>의 구분 없이 <유>와 <무>의 차이마저도 뛰어넘고 있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千江>의 <춤>에 사무쳐 있다.“

그러면 비교적 시인의 근황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시 두 편 소개하고 마무리하려 한다.

 

가을 나들이


노인 장기 요양보험으로

나날이 봉사활동 해주시는

이영실이란 보살님

도움으로 휘체어를 타고

세상 구경을 하러

바깥세상을 나섰네.

 

반신불구 34년만에

두 다리도 못쓰는

80노구 이끌고

목숨 새로 태어나듯

세상길에 나섰네.

 

길 가는 사람들 만나

너무 반가워 인사를 던지고

 

사람 바글거리는 세상을 돌아

가을 잎 우수수 떨어지는

공원 끼고

꼬리가 바다로 뻗어나간 ‘청량산’

정자 앞에 머물러

 

잎 푸르고 울긋불긋한

숲 속을 엿보는데

언제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는지

거기 반갑고 그리운

가을이 빨갛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시더네.

 

아 이쁘신 가을이여

은행잎 하나 주워들고

가슴에 부비노니

가을이 눈물지시네.

 

‘청량산’ 깊은 골이

가을향기로 흠뻑 젖어

사람들의 발걸음마다

가을 향기로 펄럭이누나.

 

반신불구 34년에

두 다리까지 못써

움직임 신통치 못한

외로움의 늪에 파묻혀

 

키에르케고오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

‘고독’이라 했던가.

 

키에르케고오르의 고독과

가을을 휠체어에 싣고

宇宙 한 바쿠 돌고

땅굴로 돌아오는 기쁨일레.

 

휠체어를 타신 부처님

 

저기 저 날아가는 새를

쫓아가거라.

날씨가 이리 좋으니

중생衆生들 마음도 한결

환하겠구나.

브루노 존자尊者 효강曉江스님이

밀어드리는 휠체어를 타신

부처님 마음이 싱글벙글하신가 보다.

 

새가 어디로 날아갔느냐

저기 빨간 우담바라 꽃이 핀

 

미륵부처님 계시 ‘봉경사鳳慶寺’에 가서

‘주광스님’을 만나자꾸나

봉경사 뜨락에 가서 미륵부처님께

인사 좀 드리고 오자.

아니 아니 아니

저쪽 골목길이 좋겠구나.

 

담장 밖으로 얼굴을 내민

꽃송이들 아름다운

저쪽 골목길 꽃구경 가자.

 

이 늘어진 다리 좀 올려놓아라.

부처님은 우주宇宙 한 바퀴 돌아 휠체어를 세우시더니

아픈 다리를 올려놓으시란다.

그때 마침

건너편 저쪽에서

하아얀 할머니 한 분 산을 내려오신다.

부처님께서 손을 들어 인사하신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쪽으로 날아간

새 한 마릴 못 보셨는지요.

할머니는 그냥 하아얗게 웃기만 하신다.

휠체어는 이제 암자庵子 아래

잠시 쉬어 있다.

 

아주 밝고 맑은 날의 일이었다.


이 시에는 새가 나오고 꽃이 나오고 휠체어를 타신 부처님이 나온다. 왕궁을 떠나기 직전 부처님의 시중을 들던 브루노 존자가 부처님의 휠체어를 밀고 있다. 하얀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나누시는 부처님 그리고 밝고 맑은 날씨. 아주 황상적인 환경을 설정하여 세상을 초월하여 피안의 세계를 시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을 부처님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하고 극락을 주유周遊 하며 어머니와 조우하기도 한다. 이런 배경 설정, 이런 상상의 세계를 펼침으로써 시인은 현실의 고통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2011년 18번째 시집 <영산재- 하늘 춤추어>를 발간하고 4년 만에 내놓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오랜 인고의 세월에서 농익어 원숙한 시 세계를 펼치고 있다. 83세의 연세에도 식을 줄 모르는 저 창작의 열기는 곧 인천 문단의 역사요 증거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저토록 치열한 노시인의 문학정신을 본받아 내 영혼을 세상의 빛이 될 문장을 다듬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은 랑승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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