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를 위하여
상태바
무인도를 위하여
  • 이세기
  • 승인 2015.09.17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세기의 섬이야기①] 이세기 / 시인



무인도만큼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도 없다. 심중에 맺힌 말은 파도가 잡아먹으면 그만.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을 가는 것처럼 흥미로운 일이 또 있을까?

근래에 “선갑도를 살리자”는 섬사람들의 목소리가 크다. 섬을 살리자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섬만큼은 섬주민이 잘 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인도이자 원시의 비경을 간직한 섬을 채석장으로 망친다는 것은 도통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공의 때가 타지 않은 섬을 짓뭉개 골재로 만들어 뭍에 내다 팔겠다는 심보가 고약하다.

그게 어디 자신들이 만든 섬인가. 원래부터 스스로 그렇게 있었던 섬을 마치 자신들의 소유물인양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탐욕이 기가 차다.

와세다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대학 경내를 산책하다가 무인도연구회(無人島硏究會) 모임을 알리는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무인도회가 어떤 모임의 성격을 가진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만은 설렜다. 때마침 방학이라서 아쉽게도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멋스러운 모임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인도라는 명칭에서 풍기는 멋도 있지만, 현대인의 자화상인 소외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인도하면 떠오르는 것은 ‘자유’다. 섬을 통해 자유를 만끽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모임이 미더웠다. 무인도를 자유로 읽어내는 행동이 아름답다. 신통방통하게도 젊은이들이 섬을 찾는다는 방점에 이르러서는 섬의 활로가 마냥 기쁘다. 미지의 세계인 섬과 젊음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 여러모로 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무인도연구회가 반가웠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았다.

틀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젊은이들이 어디론가 떠나야할 곳이 있다면 아마도 그 첫 번째 길은 섬이 될 것이다. 훌훌 상처를 털고 자유를 호흡할 수 있는 품이 섬에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섬에 가는 것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섬에는 즐거움이 있다. 오감이 열리는 즐거움. 갯바위에서는 갯내음이 난다. 새하얀 모래밭은 태양의 열기로 뜨겁다. 갯벌은 무수한 생명으로 꿈틀거린다. 파도는 새하얀 이랑으로 몰려와 바위를 쉼 없이 때린다. 해송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숨통이 열린다. 오욕에 찌든 더러운 마음까지 날려버릴 것만 같은 이 즐거움!

내가 직접 가 본 선갑도는 무인도답게 꿈틀거렸다. 섬에 직접 발을 딛고 가보니 별천지다.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생명체로 가득하다. 골짝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원시림과 이끼들, 남방계와 북방계 식물이 공존하고, 갯방풍, 가침박달, 고란초가 있는가 하면 바위손, 섬백리향 등 도통 보기 어려운 식물군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흔히 섬을 격절의 공간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섬만큼 다양성을 머금은 곳도 드물다. 온갖 생명 천지다. 모든 게 획일적인 공간으로 치닫고 있는 육지와는 다르게 섬은 공존의 장소이다. 마치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꿈을 꾸는 자들의 군집! 오히려 신생의 거처에 한 발을 내딛는 것조차 죄송할 따름이었다.

하룻밤을 묵으면서 나는 벌거벗은 자유를 꿈꿨다. 이 지상에서 아직은 남아있는 원시의 자유가 밤새 나를 일깨웠다. 머리맡에서 출렁거렸던 물때 이는 소리조차 영험했다.

이렇게 야생을 생생히 품은 수려한 섬을 일거에 채석장으로 파괴하겠다는 발상에 아연 질색했다. 인간에 대한 실망! 섬을 파헤치고 파괴하는 것에 무관심한 것은 죄악이자 방조다. 우리는 병이 들어도 단단하게 들었다. 내 것이 아니면 무관심이라는 병!

나는 가끔 지인들에게 우리 시대만큼 평화로운 시대도 없다고 자조 섞인 영혼 없는 말을 읊조리곤 한다. 우리 세대에 실망을 느끼는 것은 여전히 개발지상주의라는 유령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빼앗고 있다는 데 있다. 알고 보면 어떤 시대이고 불행하지 않았던 세대는 없었다. 모든 당대는 언제나 불행하다. 불행을 못 느끼는 미몽한 자아가 있을 뿐.

획일화된 몽매의 주체로 사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삶은 없다. 나는 오늘도 자기 안의 신령을 갖고 있는 인간본위로의 귀환을 소망하지만, 우리가 만물의 주인이라는 망상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고서는 무수한 괴물을 만드는 인간중심주의는 사라질 턱이 없다.

생각건대, 손발이 두뇌의 노예가 아니듯이 우리는 몽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환한 방에 산다고 해서 세상이 온통 환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두운 구석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무인도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니듯.

내가 생각하는 무인도는 자유다. 눈이 부실만큼 새하얀 모래밭, 원시의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음, 파란 바다. 벌거벗은 분투의 자유! 나는 오늘도 외친다. 무인도를 살리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