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찾아오는 봄의 전령사
상태바
섬에 찾아오는 봄의 전령사
  • 이세기
  • 승인 2016.04.15 1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세기의 섬이야기⑭] 이세기 / 시인
?

섬벚꽃_자월도 ⓒ 이동렬
?

섬분꽃_자월도
?

길을 가다가 어느 집 대문 앞에서 벙구나무를 본적이 있다. 어찌나 반갑던지. 아마도 집 주인이 섬에서 나온 사람이 아닐까 상상했다. 새순이 먹음직스럽게 돋아난 벙구나무가 수줍게 서있는 것을 보고는 애처롭기도 하지만 꿋꿋한 모습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 피었나.” 혼잣말을 하며 가만히 꽃을 보다 다시 길을 걷는다. 그러다 담장 안에 주눅이 든 벙구나무가 자꾸 눈에 밟히듯 따라온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섬에는 유난히 벙구나무가 많다. 마당에 진달래가 피고 가죽나무 순이 돋을 무렵이면 벙구 새순도 돋는다. 뭍사람들이 두릅나물이라 부르는 벙구나물은 데쳐서 먹으면 쌉쌀한 맛이 나는데, 겨우내 잃은 미각을 일깨워 섬사람들은 봄철에 먹는 보약이라 했다.

나는 가끔 지인들에게서 섬의 특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섬이 뭐 그리 좋을까? 가는 것도 불편한데? 나는 그럴 때마다 봄의 섬을 만끽해보라고 권한다. 뭍에서 봄을 놓쳤다면 섬에서 새봄을 맞으라한다.

섬은 봄이 늦다. 살을 에는 칼바람을 품은 북서풍이 미련을 가져서일까? 골짜기가 많아 섬그늘이 깊어서 일까? 따뜻한 햇살을 흠뻑 머금은 신록이 뭍보다 더디 온다. 뭍이 봄의 향연이 끝나고 방초로 뒤덮일 때, 비로소 섬봄이 열린다. 그래서 벗들에게 뭍에서 잃어버린 봄을 섬에서 맞아보라고 귀띔을 하곤 한다.

우선 섬에 가면 섬숲을 거닐자. 불어오는 갯바람에는 뭍에서 맛볼 수 없는 상쾌함이 있다. 봄 햇살을 맞으며 섬숲을 거닐 때면 절로 탄성이 인다. 온통 새순의 향연이 펼쳐진다.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내음을 맡아보자. 아린 생더덕 내음이 코를 진동한다. 발길을 내딛는 모든 곳에 코끝을 스치는 봄풀 향이 전해온다. 아우성치듯 가랑잎을 이고 솟아나는 봄의 전령사들이 저마다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란! 보면 볼수록 생기가 돋는다.

?

풀솜대_자월도
?

큰애기나리_자월도
?

봄햇살에 슬며시 초면의 얼굴을 내민 섬바람꽃, 섬붓꽃, 섬분꽃, 섬벚꽃 등 ‘섬’자를 접두어로 가진 야생꽃들의 행렬이 즐겁다. 눈을 시원하게 한다. 숲의 곳곳에서 일제히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민다.

섬꽃은 섬사람들의 성정을 닮았다.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사람들로 북적한 뭍과 다르게 섬은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서인지 모른다. 꽃이 섬사람을 닮은 것인지, 섬사람이 꽃을 닮은 것인지.

봄숲은 진정한 자유인을 길러낸다. 구속과 인연을 떨쳐버리는 마력을 지녔다. 봄숲에서 몸이 유난히 가벼운 것은 사람이나 꽃이나 매 한가지. 훌훌 묵은 정신을 털어내기 제격. 헐벗은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듯 몸에도 생기가 흐른다. 낙엽으로 황막한 섬숲에 여린 신록의 혀를 내미는 이맘때쯤이면 영혼도 깃털처럼 가볍다. 땅에서 올라오는 새뜻한 향과 새소리가 코와 귀를 즐겁게 한다.

나는 섬봄의 진객을 꼽으라면 물거리나무의 새순을 친다. 봄에 피는 새순은 모두 꽃이다. 섬은 유난히 물거리나무라 불리는 소사나무가 많다. 소사나무의 가느다란 나뭇가지마다 움트는 새순의 혀는 여린 봄의 정령이 아닌가 싶다. 소사나무숲에 이르면 속기(俗氣)를 떨치게 한다. 뭍의 지친 영혼을 감싸준다. 말이 필요 없다. 묵언으로 섬숲을 걷자. 새순이 나는 소사나무숲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도 속이 환한다.

섬숲은 귀를 즐겁게 한다. 황해를 날아온 새들의 지저귐! 하지만 불현 울음소리가 그친 새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도 이맘때쯤. 황해를 날아온 새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땅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순간이란! 평생 이동을 하다가 죽어가는 여린 생명의 숨소리는 무모하다 못해 처연하다.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숙연하게 한다.

섬숲을 내려와 섬둘레인 갯팃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섬에서 맞는 봄의 백미다. 나는 봄철 섬순례의 절정을 갯팃길로 꼽는다. 오감을 즐겁게 한다. 코끝에 전해오는 싱싱한 물미역과 돌파래의 내음. 물햇살의 눈부심! 섬에서의 봄은 아무래도 햇빛에 찰랑이는 봄 물결을 꼽을만하다. 아롱거리는 수천의 햇살 비늘이야말로 탄복을 토하게 한다. 치욕조차 씻을만하다. 한줌 속세를 떨쳐버리고, 물햇살에 일렁이는 해인(海印)을 바라보면 그뿐!

갯티에서는 무엇보다도 석기문화를 만날 수 있다. 뭍에서는 만끽할 수 없는 섬문화이다. 섬둘레를 걷다가 작은 돌을 주워 갯바위에 돋는 향기로운 굴을 따 먹을 수 있다. 입에서 도는 봄의 미각이 원시를 일깨운다. 돌파래의 향긋한 내음과 함께 봄바다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묘미다. 어느 갯바위 밑둥에서 생소라를 따서 먹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석기의 문화는 섬이 구속에 얽매인 인간에게 주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원시의 황홀함!

봄이 오는 섬의 매력은 섬집 뒤란 장독대에 내려앉은 햇살에서나,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섬촌부에게서 온다. 따사한 갯바위에 붙어서 굴을 쪼는 할매의 등 자락에서, 뒤란의 수줍게 핀 동백꽃에서 봄은 온다. 돌담에서 막 나와 호미로 묵정밭을 매고, 산나물을 뜯는 촌부의 손사위에서 봄은 온다. 온 천지에 봄 흙내, 사람 내가 난다. 향기로운 봄꽃이 따로 없다.

산등성에 앉아 은빛 햇살로 일렁거리는 봄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뭍에 지친 나를 본다. 풍정에 들뜬 마음은 어느덧 고요해진다. 봄이 내 몸으로 가만히 스며온다. 봄이 오는 섬에 새봄을 마중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는 이유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