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을 가로지르는 소년의 비상(飛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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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을 가로지르는 소년의 비상(飛上)
  • 송수연
  • 승인 2016.04.2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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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송수연 /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영화 <4등>(정지우 감독)은 대회에만 나가면 4등을 도맡아 하는 수영선수 준호 이야기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2등도 3등도 아닌 4등이라니... 준호 엄마는 아들 때문에 안달이 난다. 아들을 닦달하던 엄마는 결국 ‘메달을 따주는 선생’을 붙여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한 때 천재 수영 선수였던 전력을 가진 코치는 만년 4등 준호를 ‘거의 1등’(경기장에서도 집에서도 엄마는 준호가 2등을 했다고 하지 않는다. 계속 ‘거의 1등’이라고 한다)으로 만든다. 엄마도 준호도 동생 기호도, 그냥 취미로 하게 내버려두라고 말하던 아빠까지도 모두 신이 난다.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동생이 “정말 맞고 하니까 잘한 거야? 예전에는 안 맞아서 늘 4등 한 거야?”라고 묻기 전까지는.

 

일찍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엘리트 체육은 정신력에 관한 수많은 전설과 영웅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빵 한 조각, 우유 한 팩 때문에 주먹을 뻗고, 끊임없이 달렸다는 배고픈 복서와 러너의 이야기는 지나간 시대를 표상하는 유사영웅담이다. ‘우유 한 팩을 마시고 싶어서’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와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음이 밝혀지고 난 이후에도 국가 대항 축구나 야구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먹이는 단어는 ‘정신력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정신력의 싸움은 진짜 정신력만의 싸움일까? 헝그리 정신이 사라진 시대에 필승을 위한 전략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코치는 준호에게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적당히 눙치고 돈이나 받을 생각이었던 그가 준호의 재능을 발견하면서부터 이른바 사랑의 매타작이 시작된다. 코치가 볼 때 자세도 좋고, 발전가능성도 많은데 도통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준호에게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으로 준호에게 없는 ‘헝그리 정신’을 심어준다. 폭력 때문에 국가대표를 관둔 그가 아이를 두들겨 패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때 감독님이 나를 더 때리고 강하게 키웠으면 내가 더 성공했을 텐데.” 엄마 역시 아들이 맞는다는 걸 알지만 이를 묵과한다. 엄마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하는 게 더 무섭다.”

 

<4등>은 무한경쟁 속에서 성공을 향한 열망과 도태될 것에 대한 두려움, 결과만 좋다면 과정의 불합리함 정도는 가볍게 넘어가는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특히 코치에게서 준호로 다시 기호에게로 이어지는 폭력의 연결고리는 우리 사회에서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대물림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자꾸 속고 또 스스로를 속여서 그렇지 간절함이나 정신력은 폭력 따위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폭력에 ‘사랑’이나 ‘관심’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영화는 준호가 햇볕을 쫓아 레인을 가로지르는 순간, 폭력과 뒤섞여 오염된 사랑, 관심, 정신력, 간절함 등을 폭력으로부터 구해낸다.

 

내가 뽑은 <4등>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이 지점이다. 수영을 그만 둔 준호가 새벽에 몰래 수영장에 들어가 도둑수영을 하는 장면. 수영장에서 가장 강한 규칙은 레인이다. 레인은 무정형의 공간에 줄을 긋고, 출발점과 반환점을 왕복하는 단 한가지의 길만을 허락한다. 아무도 이 규칙을 깨지 못하고, 이 규칙 너머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준호가 두 번째로 레인을 가로지르자 환상인 듯, 아닌 듯 공고하게 도열된 레인이 풀어지고 어두운 수영장에 햇볕이 들어온다. 색색깔의 레인은 한 송이 꽃처럼 보이고, 준호는 흡사 한 마리 돌고래 같다. 물과 다툴 필요가 없어진 준호는 물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레인을 가로질러 본 경험은 엄마의 닦달과 코치의 매질 속에서도 찾을 수 없던 열망을 소년의 마음에 심어준다. 준호는 이제 혼자 힘으로 수영을 한다. 엄마 차를 타지도 않고, 도와주는 코치도 없다. 그래서 소년의 길은 더 듬직하다. 혼자 힘으로 찾은 자신의 길에서 때론 지치고 때론 힘들겠지만 아마도 준호는 처음처럼 쉽게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폭력이나 외압으로 얼룩지지 않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찾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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