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진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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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심’에 대하여
  • 송수연
  • 승인 2016.06.1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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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송수연/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진심(眞心). 참 진(眞)에 마음 심(心).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라는 뜻이다. 참 명확하고 단순하다. 그런데 ‘진심’은 정말 사전적 의미처럼 단순하고 명확할까. 나는 진심처럼 어려운 말이 없는 것 같다. 나의 진심은 늘 내 뜻대로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고, 상대의 진심 역시 그의 마음 그대로 나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진심은, 그것이 진짜일수록(진짜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어긋나고 미끄러지며, 거기에서 숱한 오해와 불화가 생긴다. 수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들이 반복해 이야기하는 것도 어쩌면 이 ‘진심’이라는 것을 사이에 둔 오해와 이해의 줄다리기인지 모른다. 그런데, 진심은 왜 진실한 상태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내 진심은 상대에게 오해 없이 전달될 수 있을까?

 

이미 두 편의 음악영화(<원스> 2006, <비긴어게인> 2013)로 널리 알려진 감독 존 카니(John Carney)가 세 번째 음악영화를 내놓았다. <싱스트리트>(Sing Street, 2016)는 ‘잘 만든 음악이 곁들여진 유쾌하고 매끈한 성장담’ 정도로 해석되는 듯한데, 나는 이 영화를 ‘진심을 전달하는데 성공한 음악영화’로 이해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영화에서 나는 진심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타인에게 전달되는지를 보았다.

 

영화의 배경은 1985년 아일랜드 더블린이다. 당시 아일랜드는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주인공 소년 코너의 가정 역시 이 파도에 휩쓸려 코너는 학비가 싼 학교로 떠밀리듯 전학을 간다.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곱상한 전학생이 거치는 과정은 뻔하다. 코너는 바지를 벗으라는 협박을 받고, 두들겨 맞고, 초코바를 빼앗긴다. 신부인 교장은 교칙설명서 142쪽을 들먹이며 소년의 갈색신발을 압수한다. 검정신발이 아니라서. 코너 앞에 라피나가 나타나기 전까지 소년은 맨발(신발을 빼앗긴 날 코너는 맨발로 다닌다. 그리고 라피나를 만나기 전까지 코너의 정신 역시 맨발이다)이다. 라피나를 처음 본 순간 코너는 홀리듯 그녀 앞에 서고 라피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락밴드를 조직한다.

 

그러나 급조된 밴드 ‘미래파’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그들이 만든 첫 곡 Rio 는 코너의 형 브렌든에게 혹평을 듣는다. “남의 음악으로 걔를 유혹하겠다고?” 정확한 지적이다. 진심도 전달하기 힘든데 진심도 아닌 것(남의 음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영화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지점은 그들이 만든 두 번째 곡 The Riddie of the Modle 에서부터였다. “모퉁이에 서 있는 그녀, 천사 같은 모습, 가까이 다가가보니 위험한 눈을 가진 그녀....쉽진 않겠지만 그녀를 알아낼 거야.” 코너는 섣불리 라피나를 안다고 말하는 대신 ‘알고 싶다’고 말한다. “풀 수 없는 암호”같은 라피나는 코너에게 “수수께끼(The Riddie)”이다.

 

코너는 자신의 진심을 이런 방식으로 전한다. 그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고, 모르지만 알고 싶다고 말한다. 이 진심은 라피나에게 닿아 곡을 들은 그녀는 뮤직비디오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코너에게 허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도 않은 밴드를 들먹이며 라피나에게 다가간 것 자체가 허세다. 그러나 허세에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는 법이다. 코너는 처음의 허세 이후 라피나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다. 수많은 사랑에서 실패했거나 실패 중인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왜 실패했는지 어렴풋이 안다. 우리는 솔직하지 못했다. 상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지질한 이유들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거나 상대나 나 자신을 모르면서 아는 척 했다. 진심은 이렇게 미끄러진다.

 

코너는 노래한다. “그녀가 날 빛나게 해, 그녀가 날 웃게 해, 그녀가 날 날게 해”라고(up). 하지만 코너를 빛나게 하고, 웃게 하고, 날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영민한 소년은 ‘자신이 예술작품이며 끝나지 않는 비디오’라는 것을 알고 있고, 때로는 ‘진실이 사실들로 왜곡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진실이 부정되고 사랑이 비난을 받아도 그 끝에는 진흙 속의 진주 같은 복잡한 소년과 소녀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Girls) ‘자신의 복잡함을 아는 소년들은 소녀들이 얼마나 복잡한지도 안다.’는 가사에서 나는 굴복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알지도 못하면서 너는 이렇고, 세상은 저렇고 라고 단언하고 규정하는 작품들을 여럿 만났던지라 스스로의 ‘복잡함’과 소녀들의 ‘복잡함’을 안다는 소년 앞에서 나는 놀랐다.

 

영화를 보고나서 생각했다. 전달되지 못하는 진심들에 대해서. 그것은 아마도 진심이 아닌 것을 진심으로 착각하거나, 아니면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생기는 일인 것 같다. 그러니 진심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진심을 어떻게 전하는가도 중요하다. 라피나는 코너의 신발이고 별이고 꿈이다. 그리고 코너의 오늘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오늘에 충실한 것이 코너의 사랑법이고, 코너의 진심이다. 코너는 라피나를 태우고 라피나의 꿈인 영국을 향해 떠난다. 그들이 무사히 영국에 도착할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고전적인 결말을 공유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멋대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라피나를 인정하되 라피나 때문에 자신을 왜곡시키거나 지워버리지 않는 코너의 선택은 믿음직하다.

 

‘실수해도 좋아. 앉아서 이야기만 하진 마. 시간이 가고 있잖아. 당당히 맞서. 돌아보지 마.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지금 가지 않으면 절대 못가니까, 지금 알아내지 못하면 절대 모를 테니까’(Go Now) 이 영화에서 감독의 진심은 신나고 화끈한 음악에 담겨있다. 존 카니는 당대 아일랜드의 상황을 고발하거나 청춘들을 훈계하고 싶은 생각이 도무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또 생각했다. 한국의 다양한 청춘물들은 청춘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청춘을 향한 어른들의 진심은 무엇인지, 혹시 우리는 검정신발과 그것이 아닌 신발로만 신발들을 구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돌아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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