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 8세기 제의 유적 발굴, 그 상상의 나래를 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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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 8세기 제의 유적 발굴, 그 상상의 나래를 펴다
  • 황은수
  • 승인 2016.07.08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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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황은수 / 인천 남구청 문화예술과 전문위원

이따금씩 문학산에서 유물을 발견했다는 신고 전화를 받는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열일 제쳐놓고 현장에 나가 민원인과 추정 유물을 맞이하였다. 필자 역시 고고학 전문가는 아니기에 시립박물관에 찾아가거나, 주변 지인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대체로 작은 파편이거나 용도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모양의 돌덩어리인 경우가 많았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문학산 일원에 사람들이 모여 군락을 이뤘고, 지금도 우리가 그 위에서 터를 일구고 살아온 만큼 도처에서 유적이나 유물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화를 겪으며 지표상에 남아 있던 역사적 흔적들을 상당수 잃어버렸기 때문에, 보통 이러한 상황에서 ‘설마?’하는 기대감 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필자의 응대 역시 당연한 현상임을 전제하고, 여러 가능성을 저울질 한다.

지난 2012년 10월, 모 연구자가 문학산 등산 중에 유적을 발견했다고 연락을 취해왔다. 삼호현(사모지고개)에서 문학산 정상 쪽으로 능선을 따라 약 150m 올라오면, 높이 3m 정도 되는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곳으로 이로 인해 바위 양측으로 등산로가 갈라졌다 다시 합쳐지는 지점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지나다니는 등산로 한 복판에서 완형에 가까운 토기가 반쯤 형체를 드러낸 채 묻혀 있던 것이다. 따라서 2014년 해당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문학산성에 오르는 능선 가운데 설치된 7~8세기의 방어용 초소로 추정하고 유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복토를 하였다.

다시 올 해 해당 유적의 명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예상과는 달리 ‘통일신라 시기 제의 유적’이 나타난 것이다(인천in 7월 5일자 보도). 문학산(성)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면, 내심 ― 신화를 역사로 만들어줄 ― 백제 관련 유적이나 유물을 발견되기를 고대했겠지만, 학계 모 전문가는 중부지방에서 최초로 확인된 통일신라 시기의 제의 유적이라고 평한다.



<발굴조사를 끝낸 제의 유적 전경 사진>


유적은 바위 상단 쪽 능선에 바위를 감싸는 ‘ㅁ'자 형태의 기단을 설치한 1칸짜리 기와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육안으로 보이는 기단부는 제단을 만들기 위한 테두리 정도로 여겨진다. 여기서 수습한 유물 약 100여점은 주로 건물지 주변과 바위(자연암반) 틈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대부분 7~9세기 기와편과 토기편이었는데, 기와 중에는 ‘淳化元年七月日官’이 새겨진 명문 기와도 있다. ’淳化‘는 북송의 연호로 고려시대 990년(성종 9년)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건물지 외곽에서 청동기시대 마제석촉 3점과 상감청자편 2점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대체적으로 유적이 집중 사용 시기는 8세기 전중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출토 유물 사진 : 명문기와(좌), 토기 잔(우)>


더불어 조사기관[(재)한국고고인류연구소]에서는 유적의 입지적 측면에서 큰 바위에 의탁하여 서쪽의 큰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유구가 만들어져 있고, 난방이 이루어지지 않는 제단 형태의 건물지로 보이며, 생활유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정 기종(잔 형태)의 유물이 한 곳에 집중된 점, 산성과 약 300m 떨어져 있어 산성의 유물이 흘러 유입될 가능성이 없는 지점에서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유물이 출토된 점 등을 들어 유적의 성격을 제의 유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산성’이라면 기본적으로 군사적인 필요성에 의해 축성되어 활용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유물이 나올 거라는 선입견, 또 옛 문헌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나 이야기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물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대감, 이 모두를 날려 버리는 유적이 돌연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 이 제의 유적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겠지만, 이제 문학산이 품고 있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제의 유적과 결부지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이 삼호현에 이르러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고 순항을 기원하기 위해 사당(제의 유적)에서 제를 올린 후 고개를 넘어가 한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학산 일원의 고인돌, 안관당, 산신신앙, 사지(寺址), 나아가 조선시대 인천 앞바다 섬들의 신주를 모아와 제를 올렸던 원도사 등과도 연결고리를 가늠하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따라서 중부지방에서 최초로 확인된 통일신라 시기의 제의 유적이라는 학술적인 평가보다는 오랜 기간 서해 바다에 기대어 역사를 이어온 인천지역의 역사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잊혀져왔던 문화유산의 귀환이 반가울 뿐이다.

한편, 얼마 전 문학초등학교 강당 신축을 위해 진행한 시굴조사에서 기단 혹은 석축으로 추정되는 석렬 유구가 확인되었고, 조선시대 자기와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정밀 발굴조사로 전환하여 명확한 성격과 구조를 규명하고 있는 중이다. 개발에 밀려 현재 건물 2동만이 남아 있는 인천도호부(시 유형문화재 제1호)의 유적이 다행히도 학교 운동장 밑에 고스란히 묻혀 있던 것이다.



<문학초등학교 강당 신축부지 내 시굴조사 현장>


이렇듯 그동안 잊혀져왔던 역사적 흔적들이 하나둘씩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작년 문학산 정상 개방에 발맞춰 들려오는 기쁜 소식에 여기 지면을 빌어 독자들과 공유하고 함께 향후 보존방안을 고민하고 싶다. 우리 개개인은 역사의 소비자이면서 능동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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