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 옆에 스피커가 딱’, 땡중이 나의 클래식 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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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옆에 스피커가 딱’, 땡중이 나의 클래식 사부
  • 이재은
  • 승인 2016.11.07 0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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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못하는사람들] (5회) ‘그루브 레코드’ 박일흥 씨

집이 좀 살았기 때문에 오디오가 있었어요. 아버님이 음악을 좋아하셨고. 자연스럽게 FM 라디오를 듣고 AFKN도 많이 들었죠. 공부할 때도 FM 켜놓고 하고. 클리프 리차드, 탐 존스가 세계에서 최곤줄 알았어. CCR, 딥 퍼플도 좋아했지. 내가 공부를 잘했어. 공부가 안 됐으면 음악 쪽으로 빠졌겠지. 음악을 직업으로 해본 적은 없어요.

클래식은 대학 2학년 때 처음 접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비발디 사계 등을 듣고 명동으로 음반을 구하러 다녔다. 원 음반사 주인이 그의 사부였다. 하루는 스님이 가게에 들어왔다. 스님이 웬 클래식? 콧방귀 한 번 뀌어주고 음반만 쳐다보고 있는데, 웬걸.

내가 사부로 알던 음반사 주인이 스님한테 절절 매는 거야. 뭘 물어봤는데 대답을 못 해. 그래서 스님한테 말을 걸었어요. 젊은 애가 클래식 듣는 걸 대견하게 생각했나 봐. 파주에 있는 절에 한 번 오라고 하더라고. 갔더니 대웅전 뒤에 암자, 암자라기보다 작은 건물. 문을 열었더니 불상이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스피커가 두 개, 턴테이블이 두 개. 스피커 옆으로 기역자 니은자로 엘피가 정리돼 있고. 그때만 해도 음반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음반을 500장 갖고 있는 거야. 헨델의 메시아, 바흐의 칸타타. 그런 음악을 들으시더라고. 헨델의 메시아는 기독교 쪽 아니에요? 그러고는 내가 처음 듣는 얘기를 해주는 거야. 레이블, 음반회사, 라벨(재킷은 같아도 라벨은 다르다), 퍼스트 에디션, 세컨드 에디션 같은 걸 스님한테 배웠어.


스님들은 선문답으로 말하잖아요. 한 장을 꺼내더니 이건 내가 잘 모르는 연주자인데 너가 한 번 알아봐, 그래요. 생전 처음 보는 거였죠. 그걸 갖고 명동을 헤매고 다니면서 물어보고. 누가 엘피 많이 갖고 있다고 하면 무작정 가는 거예요. 초인종 누르고, 음악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맨땅에 헤딩. 좋은 분을 많이 만났어. 대견하게 생각하더라고. 음악 듣고 판 몇 장 얻어오고. 스님한테 하나씩 배우다보니까 (클래식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게 된 거야.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갔어.

‘정통 스님이 아닌 이단’, ‘짝퉁 스님’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어, 영어, 일본어도 잘 하고, 그에게 성경을 풀어주기까지 했다. “한자를 좀 아나?” “네, 조금 압니다.” 스님이 책 한 권을 툭 던졌다. “한 번 보게.” 20분 넘게 들여다봤지만 아는 게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선문답은 그거에요. 너가 한자를 안다고? 그럼 한 번 봐라. 한자는 좀 안다고 자부했는데 내가 너무 모르는 구나…. 그 양반 하시는 말씀이 무식이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무식이라는 거예요. 클래식에서만큼은 그분이 내 사부예요. 첫 사부는(명동의 가게 주인) 엉터리야. 정통이야, 이쪽이.

그 양반이 지휘를 하는데 메시아 전곡을 다 해. 음악을 들으면서 지휘하는 거야. 소프라노, 알토, 정확해.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이야. 한 마디로 학잔데 그때 당시에는 돌중으로 생각했어. 한편으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어. 저런 땡중이 다 있나 하고. 보세요. 불상 옆에 스피커가 딱. 그거부터 이상하잖아요. 헨델의 메시아, 모차르트 레퀴엠, 칸타타 같은 건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거든. 그건 하나님이거든.

2년 동안 절에 다녔다. 나중에는 스님하고 명연주, 작품 성향, 연주 스타일 등에 대해 토론할 정도가 됐다. 화음이 좋지 않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자네는 어디 하나에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는 구만. 끝장을 보는 구만. 이제 나보다 아는 게 많네.” 직장생활 하다 보니, 사업을 꾸리다보니, 이후에는 찾아가지 못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니까. “그때 그 양반이 일흔 정도 됐을 거야. 부인도 있고, 애도 있었던 것 같아. 대처승도 아닌데. 대학생이니까 알 건 다 알잖아. 빤하잖아. 속으로 어쩌다가 땡중이 됐을까 그랬지. 근데 아는 게 너무 많아.”

“스님이 연주할줄 아는 악기는 없었나요?”
그는 두 손을 들어 목탁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목탁이 악기였지.”


"1970년 이전에 활동한 지휘자를 좋아해요. 이때 대가가 많이 나왔거든."ⓒ 이재은


신포동에 있는 ‘그루브 레코드’는 후배가 밤에만 운영하는 카페인데 낮에는 그가 사랑방처럼 사용한다. 2만8천여 장의 엘피판을 8천 장 정도만 남기고 양도하려고 한다. 몸이 좋지 않아 몇 년 전 사업도 접었다. “지금 말도 어눌하잖아요. 용케 다시 일어섰죠. 3년 걸렸어요. 음악이 도움이 많이 됐죠.”

외국은 엘피 가게가 다시 일어나요. 중국에 엘피 회사가 있어요. 아직 초보 수준이지만 전 세계 오디오, 엘피를 싹쓸이하고 있어요. 처음엔 일본, 그 다음에 한국이었는데 지금은 중국이에요. 재작년인가 중국의 사업가가 유럽에서 엘피판 15만장을 한꺼번에 산 적 있어. 지금은 방송국에서 엘피 트는 데가 없으니까. 그 사람은 매일 판 닦고 있대요. 리스닝 룸이 5개래. 방마다 전 세계 가장 귀한 오디오가 3세트 정도. 스피커 하나에 천만 원. 수준이 우리나라랑 비교가 안 돼요.

오디오를 새로 사고 싶었던 참이라 어떤 게 좋은지 물었다. 우선 스피커를 구하고 엠프를 맞춘다. 엠프를 스피커에 맞추면 절대 맞지 않는다. 비싼 스피커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가장 추울 때 자란 나무로 만든 건 소리가 남다르지만 자기와 맞는 음질이 있다. “오디오의 원천기술이 독일이에요. 무난해요. 모든 장르를 녹여준다고 할까. 가성비가 최고죠. 오디오는 어려워요. 매칭이 맞아야 해요. 비싼 거 소용없어요. 그래도 투자는 좀 해야죠.”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죠. 30년 동안 음반하시던 분이 나한테 물어봐요. 전국에 내 제자가 20명 정도 돼요. 땡중한테 배운 그대로 알려줬죠. 클래식에 관한 모든 건 그때 그 땡중에게 배웠어요.

“고리타분한 걸 뭐하러 들어요?” “엘피는 박물관에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수많은 안티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을, 클래식을, 엠피음반 곁을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할 것이다.

평생 들어도 다 못 드는 게 바흐 음악이에요. 바흐는 바다를 항해하는 거야. 음악은 진동, 주파수가 맞아야 돼요. 톱니바퀴 10개와 11개는 안 맞잖아요. 음악은 톱니바퀴나 마찬가지예요. 수많은 명반을 들어봤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 귀에 자연스럽게 붙는 음악이 명반이더라고. 한 장 한 장마다 이야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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