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들, 국가 전략자원으로서 말 사육의 중요 터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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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들, 국가 전략자원으로서 말 사육의 중요 터전이었다"
  • 윤성문 기자
  • 승인 2017.09.1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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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박물관, '인천의 바다와 섬바로알기' 시민강좌 열어

2017년 인천시 작은박물관 지원사업으로 진행되는 인하대박물관(관장 이영호)의 시민강좌 ‘인천의 바다와 섬 바로알기 : 생명의 바다, 공존의 삶’이 14일 ‘인천 도서 지역의 국영목장 설치와 목마군의 삶’(2강)을 주제로 계속됐다.

강사로 나선 임학성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교수는 "예로부터 말을 다스리는 일은 나라의 중요한 업무였으며, 부강한 국가는 말의 수 말했다"며(故問 國君之富 數馬以對) "인천해역의 섬들은 국가의 전략자원인 말을 기르기 위한 중요한 터전이었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말은 병조(兵曹)의 사복시(司僕寺)에서 관리하였다. 그리고 말을 직접 돌보는 목자(牧子)는 군역(軍役)이 없는 일반 양인 중에서 선발하였는데, 이들 목자들로 목마군(牧馬軍)을 편성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자 7명이 115필(암말 100필·수말 15필)을 관리하였다. 1678년경 전국의 목자는 5,178명으로 그 가운데 제주도가 1,386명(26.8%)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도는 874명(16.9%)이었다.

말의 숫자는 1470년(성종)에 약 4만 필에서 1502년(연산군)에는 3만 필로 점점 감소하여 1870년(고종) 무렵에는 4,646필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이유는 조선 전기에는 공도정책(空島)의 영향으로 섬에 사는 사람을 제한하였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입도정책(入島)으로 전환해 섬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말 목장 구역이 축소되었기 때
문이었다.

조선시대 말 목장은 대부분 섬이나 바닷가의 곶에 설치하였는데, 인천해역의 섬들은 특히 서울과 가깝기에 말 목장이 많이 설치되었다. 17세기 후반 영흥도에는 말 119필과 목자 281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인천해역의 15군데 말 목장 중 말의 수는 4번째, 목자 수는 2번째에 해당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 목자 중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임세재(林世載)의 평택임씨를 들 수 있다. 특이 이들 가문에는 17세기부터 1894년까지 거의 200년의 호적자료 51점이 남아있기에, 조선시대 말 목장과 목마군의 상황 특히 영흥도의 사정을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임 교수는 말했다.

마지막 강의로 9월 23일(토)에는 오전 9시부터 인천해역 남단의 섬을 돌아보는 역사기행이 개최될 예정이다.(문의전화 032-860-8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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