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강광의 삶과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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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강광의 삶과 작품세계
  • 유봉희
  • 승인 2018.07.2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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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립미술관서「강광, 나는 고향으로 간다」회고전 열려



청년 강광(姜光, 1940-)은 화구를 챙겨 들고 조선시대에는 유배지, 전쟁이 났다 하면 피난지, 유배·소외·차단·억압·고립 등의 이름으로 기억되던, 전혀 연고조차 없는 낯선 제주도의 땅을 밟았다. 대학(서울미대)를 졸업(1965)하고 몇 년이 지난 1969년 4월이다. 1982년 2월 인천대학 미술학과에 교수로 부임하기까지 강광 화백의 제주시절은 13년이나 이어졌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해 일 년 반 동안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의 나라로 돌아와 만기 제대 후 붙박이로 머문 곳이 제주였던 것이다. 그 땅에서 강광은 베트남 참전에서 얻은 트라우마를 씻어내기로 한 것이었을까? “거칠고 부박하지만 진솔한 제주도 사람들의 삶이 좋았다” 한다. 짧지만 절심함이 묻어난다. 가난하고 어두웠던 시대, 젊은 예술가가 자신을 찾아 가는 정신적 고투의 과정이었을 터다.

그는 실향민이다. 출생지가 간혹 서울로 나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분명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났다. 작가 또한 이 점을 퍽이나 강조하곤 한다. 한국전쟁 때가 아니라 이전 아버지를 따라 월남해 서울서 살았다. 고등학교(경복고)와 대학을 모두 서울서 다녔으니 그는 사실 ‘서울사람’인 셈이다. 그런 그도 유년시절의 함경남도 북청을 잊지 못하는 듯하다. 한 작가의 생에서 유년시절은 그렇게 평생을 지배하는지도 모르겠다.

 


일제시대 북청 출신의 여류 소설가 송계월(宋桂月, 1910년(?)-1933)의 작품『가두연락』(1933)엔 북청의 지역적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식민지 사람들에게 북청은 ‘북청 물장수’로 상징되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함의 표상으로 각인되었다. 특히 여성들의 강인함은 제주도 여인들과 매한가지였다. 함경도 여인들을 ‘찔악’이라 했다. 악질의 뒤집은 말로 드세고 질기다는 뜻이다. 북청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타향에 정착해도 그들만의 유대를 형성하기로 이름났다. 스스로 북청사람으로서의 긍지가 컸던 터다.

내가 만난 강광 화백은 온화한 사람이다. 거친 생명력을 지닌 북청의 기질이 ‘서울깍쟁이’들 속에서 중화되고, 다시 제주도의 가난하되 풍족한 자연의 너그러움이 지금 강광의 인품과 풍모를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작품은 그것을 만든 작가를 닮는다고 한다. 강광의 그림은 거칠지가 않다.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화면은 조용하다.

겉으로 드러난 화면과는 달리 그것이 품고 있는 침잠한 열기만은 자못 뜨겁다. 인간 강광을 빼닮은 듯싶다. 작품 화면 너머 너머의 그 무엇이라 해야 할까?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 생산한「푸른 의자 위의 여인」(1976)·「밤-사잇길」(1981)·「상황-오름」(1983)·「오월의 노래-잃어버린 꿈」(1985) 등은 모두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다. 현대사에 드러난 살육과 은폐로 얼룩진 제주와 전남 광주의 질곡의 역사가 화면 너머 너머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강광 화백이 제주도로 왔을 당시 한국미술계는 엥포르멜(Informel) 운동이 종언을 고하고 ‘추상과 창조’를 기치로 내건 아방가르드(avant-garde) 미술운동이 한참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중앙과 거리를 둔 채 제주에서 그는 자신만의 현대미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대 앞에 직면하는 것이었고, 뜬구름 잡는 식의 과장보다는 화면을 과학적으로 분할·배치 하는 등의 실험성을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의 화면 구성이 모더니즘적이라 하지만 리얼리스트로서의 강광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작품 외적 삶 또한 늘 시대와 함께 하고자 했다. 인천대시립화운동의 일선에서부터 인천의제21 문화분과위원장, 인천민예총 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인천지역 사회운동과 깊은 연을 맺어 왔다. 고향을 북(北)에 두고 와서일까? 강광 화백이 계속 관심을 거두지 않은 것이 있었다. 통일운동이었다. 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인천대표를 맡아 헌신한 이유도 그것에 있었을 터다. 그는 이제 인천문화재단 3대(2011-2013) 대표이사를 끝으로 인천 강화에서 마리산을 벗삼아 노년의 삶을 사색하고 있다.

강광 화백과 함께 지역사회 일을 한 적이 있는 나는 그의 인품을 이미 알고 있다. 평소 강광 화백은 목소리를 크게 내는 법이 없다. 적은 말투 속에서 느릿하게 나오는 뱉어내는 한마디 한마디는 정곡(正鵠)을 얻기 일쑤다. 그만큼 말의 울림이 클 수밖에 없다. 그 울림이 그림으로 제주도립미술관 전체에 퍼졌다. 지난 7월 7일(토) 오후 2시 30분, 나로서는 처음 찾는 제주도립미술관이었다. 새벽까지 월드컵 8강전을 보느라 잠을 못잔 탓에 제주의 바다와 바람이 주는 여유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제주도립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자 그때서야 “여기가 제주구나” 하는 느낌을 얻었다. 입구에「강광, 나는 고향으로 간다」란 글씨 선명한 플래카드가 반겼다.

귀향(歸鄕)이란 말이 생각났다. 북에 두고 온 북청 유년시절의 고향은 사뭇 그립기만 하지만 제주 바다는 청년시절의 고향처럼 강광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전시장에는 제주시절 그와 그림을 함께 한 제자, 후배들이 자리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두 딸과 사위, 손주들도 모였다. 내년이면 팔순(八旬), 이런 잔치가 어디 있겠는가. 강광 화백은 어린아이처럼 수줍어했다. “잘 모르겠어” 이 말 한 마디 뿐이었다. 강광 화백의 오랜 벗이자 아내인 박서혜 시인은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엔 슬프기도 하다” 했다. 잔치는 잔치였다.

 


강광 화백은 지난 1969년 제주에 온 이후 인천대 교수로 떠나기 전까지 제주 오현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지도한 화가 제자가 꽤나 많다. 지난 1977년 강광을 포함한 제주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 결성한 ‘관점’ 동인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고향이자 예술의 둥지였을 것이다. 그날도 이들은 모였다. 강요배·고영훈·백광익·오석훈 등 이들은 제주를 떠나 한국 화단의 중추이자 원로로 평가받는 작가들이다. 이들 모두 그날은 강광을 추억하기에 바빴다. 강광 화백의 오현 미술반 제자이자 제주문화재단 이사장인 박경훈 화백은 전시 축사를 통해 은사를 길게 추억했지만 나는 이 대목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36년 간 제주는 강광을 잊었다. 너무 늦은 전시에 선생께 죄스러울 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인천을 생각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나는 제주도립미술관 전경(全景)을 뒤에 하고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제주가 고맙고 부러웠던 것이다. 이방인을 고향사람처럼 추억하고 기리는 제주사람들의 그 마음이 고마웠고, 대규모 회고전을 열 수 있는 넉넉하고 품격 있는 도립미술관이 있어 부러웠던 것이다. 지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 초, 인천에서 시립미술관 건립추진운동이 있었던 것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는 화랑과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인천 문화현장을 끼고 살았기에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운영하는 화랑에서 작가들로부터 추진서명을 받았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이 다가온다. 지금, 그 움직임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미술관 건립 소식조차 가뭇하다.

송도신도시를 자랑하면서 인천이 국제도시란다. 지역의 원로 작가 하나 초대해 회고전조차 열 수 없는 인천, 제주도립미술관을 나오면서 심한 부끄러움에 하마터면 정말 울 뻔 하기도 했다. 인천에 종합문예회관이 있으나 이것은 미술관이 아니다. 시립미술관은 전시장 뿐 아니라 학예연구실 등이 들어서 지역 미술을 체계적으로 전시·연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도시축전을 한다면서 수천억 원을 하룻밤 꿈처럼 허공에 날린 것이나 아시안게임에 쏟아 부은 그 엄청난 시민의 혈세는 시민들에게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인가? 제주는 아프게 물어오고 있었다. 지난 7월 10일, 제주발 김포행 비행기에서 생각했다. “내가 다시 이렇듯 규모가 크고 장엄한 강광 화백의 전시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인천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전시가 마무리 되는 가을 제주를 찾아 다시 강광의 바다를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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