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는 어떻게 인천으로 왔을까
상태바
소서노는 어떻게 인천으로 왔을까
  • 이한수
  • 승인 2018.07.31 0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 최재효 중편소설 <남쪽 바닷가에>, 최정주 장편소설 <소서노>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역사의 현장이다. 이를 알면 과거와의 소통, 공감이 훨신 잘 될 것이다.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청소년들이 감동적으로 우리 역사와 만날 수 있다. <인천in>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잘 어우러진 소설과 영화를 통해 [팩션 인천사]를 연재하며 청소년과 시민들의 역사 인식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문학산에서 내려다본 소래포구 ⓒ네이버지도

 
요즘 소서노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여러 자치단체들이 소서노를 기리는 행사를 추진하고 있고 고구려 건국 이후 부여 땅을 떠난 소서노, 비류 모녀가 내려와 자리잡은 서해 바닷가 미추홀이 인천인지 충남 아산인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서노가 남하하여 나라를 세운 ‘하남’이라는 곳이 경기도 하남이 아니라 중국 산동반도 옆 하남이라는 학설이 제기되면서 반도사관 역사 왜곡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소서노라는 인물에 대한 논란은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좋은 계기가 된다고 본다. 소서노는 어디로 내려왔을까.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고구려와 백제 건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소서노의 뒷받침으로 고구려를 세웠는데, 왕위를 물려줄 즈음 부여에 두고 온 본처 소생 유리가 아버지 주몽을 찾아오자 둘째 부인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큰아들 비류는 미추홀에 정작하고 둘째 아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비류가 죽고 두 집단이 통합해 ‘백제’라 하였다.

주몽이 고구려의 도읍지로 정한 졸본의 위치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백두산 근처 랴오닝성 환인현이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학설은 사대(事大) 사관에 의해 왜곡된 것으로 실제로는 북경 근처 하북성 천진시였다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비류 백제의 성립지에 대해서도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어떤 경로로 한반도 미추홀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은 동북아시아 고대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로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고대사는 너무 전문적인 분야이고 역사서 내용도 혼선이 많아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어렵다.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역사소설이 없을까.

 
미추홀 유적지 문학산성 옛 모습
 
문학산성 현재 모습
 

먼저 소서노가 어떻게 주몽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전승된 설화를 살펴보자. 고구려 건국 신화에 의하면 동부여의 금와왕이 후궁 유화부인을 얻어 주몽을 낳았는데 본처 자식들의 시기를 받아 출가하여 졸본으로 이주해 와서 이 지역의 세력가 연타발의 후원으로 입지를 다진다. 당시 졸본 지역에는 계루부, 연노부, 소노부, 비류부 등 여러 부족이 연립해 있었는데 주몽은 그 중 계루부의 부족장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면서 실력자가 된 것이다. 동부여에 남았있던 주몽의 본부인 예씨가 낳은 자식 유리가 졸본으로 찾아오면서 후계 문제로 갈등이 생긴다. 소서노는 전남편의 자식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난다.

설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여러 씨족들의 연합과 분화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대륙에 한나라 통일 왕조가 세워질 무렵 고조선이 북만주지역의 북부여, 서간도 지역의 졸본부여, 북간도 지역의 동부여, 연해주 함경도 지역의 동예 옥저로 분열되어 나갔다. 이들 부족 국가들은 서로 통혼(通婚)을 하여 연합하기도 하고 갈등하면서 분화되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부여에서 내부 갈등이 일어나 일부 씨족(주몽)이 졸본 지역으로 이동하고 그 여파로 졸본 지역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양상이 너무 복잡해서 사서(史書)에서도 혼선이 보이는데 스토리로 재구성해 엮어낸 역사소설을 읽어보면 열국시대 우리 역사가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최재효의 중편소설 [남쪽 바닷가에]는 그 복잡한 열국시대 부족 간의 이합집산을 한편의 드라마로 엮어내어 독자들이 수월하게 2000년 전 우리 민족사 현장으로 가볼 수 있도록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백제 건국설화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어긋난 우리 역사 인식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이 소설은 소서노가 세운 백제 땅이 서쪽으로 한나라와 접한 번조선 땅이라고 이야기한다. 번조선은 고조선 강역의 서쪽 지역으로 중국 ‘북경’과 인접한 지역이다. 소서노는 여기에서 다시 한반도 남삼한으로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오늘날 인천 부천 지역에는 ‘우체모탁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소서노는 이 나라를 접수하여 백제국을 세우는 것으로 그렸다.

최정주의 장편소설 [소서노]에서는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이주해 간 곳을 중국 산동반도 아래 하남으로 그리고 있다. 소서노가 남하하면서 건넌 강을 사서에서는 ‘패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패수가 어느 강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논쟁거리이다. 중국 한나라의 정복 전쟁을 피해 이주해 온 위만이 건넌 강도 패수이고 소서노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건넌 강도 패수인데 대체로 기존 사학계에서는 이 강을 대동강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이 강을 중국 북경 근처의 강으로 서술하고 있고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 요하 서쪽까지였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패수를 북경 옆 강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다. 당나라 때 써진 [북사]와 [수서]라는 역사책에서는 대방 땅에 주몽의 후손이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대방 땅을 평양 대동강 유역이라고 보는 것은 식민사관에 의한 왜곡이라고 봐야 한다.

중국 대륙에서 진나라와 한나라가 강성해질 무렵 삼조선이 주변국의 침입으로 쇄약해질 때에도 주민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주해 가는 일이 잦았다.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가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로 분열하고 졸본부여를 중심으로 고구려가 건국되어 강성해지면서도 많은 이주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본다. 그런데 고구려가 졸본을 기반으로 성립될 때 그 서쪽 지역에 있던 서부여(연나부여) 주민이 남행한 지역은 중국 동해안 하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졸본부여 세력에 밀려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부족은 비류부, 소노부, 연노부로 보는데 이 부족들의 거주지가 비류수 유역 요동 요서 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지역에서 졸본을 등지고 남하했다면 산동반도 옆 하남 쪽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 [소서노]는 대방국 하남 땅에 정착한 소서노 부족들이 한나라가 강성해지면서 다시 밀려나 황해를 건너 한반도 마한 땅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렸다. 마한은 양질의 소금 생산지이면서 황해 연안 무역으로 부유해지고 있었다. 소설은 소노부의 아버지이자 계류부의 부족장 ‘연타발’이 무역으로 큰돈을 번 거상으로 그렸는데, 이는 발해만과 산동반도, 미추홀 지역이 환황해(環黃海) 해양문화권으로 해양 교역이 활발했던 지정학적 조건을 잘 형상화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 교역 물품으로 소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미추홀 소래 지역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질 좋은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곳이었다. 
 
 
1950년대 문학산 아래 소래 쪽 항공사진
 

한 세기만 거슬러 올라가도 문학산 아래 소래 쪽이 엄청난 규모의 소금 생산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는 이 지역을 거점으로 강성해져 근초고왕 때에는 미추홀과 발해만 유역, 산동반도 일대 등 환황해 지역을 다스리는 거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근초고왕이 젊은 시절에 소금 장수를 하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는 황당한 얘기로 치부될 수 없다고 본다. 고구려의 미천왕이 실제로 소금 장수였다는 사서 기록이 있는 등 당시 소금의 생산은 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미추홀’이라는 도읍지 이름으로도 소서노의 행적을 유추할 수 있다.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기는 하지만 ‘미추홀’은 ‘졸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졸본은 ‘바탕골’이라는 의미의 우리말 ‘밑홀’을 이두식 한자로 표기하여 ‘홀본(忽本)’이라고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홀’은 지금 쓰고 있는 ‘고을(골)’과 같은 말로, 한자의 음만 빌려(음차) 써서 ‘忽’로 적었으며 ‘바탕’은 뜻을 빌려(훈차) 써서 ‘본(本)’으로 적었던 것이다. ‘미추홀’도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밑홀’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미추홀’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도읍지의 이름만으로도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한 뿌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미추홀은 비슷한 발음의 매소홀(買召忽)로 불리기도 했다. ‘매소(買召)’를 ‘소서노가 매입하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고구려 건국 시기에 남쪽으로 이주해 온 부여인들이 인천 일대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이곳이 ‘매소홀’로 불렸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소래’라는 지명이 소서노가 온 곳이라는 의미이고,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이 소서노를 기리기 위해 새긴 것이라는 주장이 뜬금없다고 손가락질 받는 등 소서노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아직 제대로 고증되지 못해 안타깝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후대에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