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의 근간 비류백제, 인천 한나루 능허대
상태바
백제사의 근간 비류백제, 인천 한나루 능허대
  • 이한수
  • 승인 2018.08.28 07: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KBS 드라마 [근초고왕] / 연극 [능허대, 바다를 품다]
 
능허대에서 본 아암도, 송도신도시
 

삼국시대 역사는 한강 하구를 차지하기 위한 삼국 간의 다툼의 역사라고 서술해도 될 만큼 한강은 지정학적 요지(要地)였다. 고조선 시대에는 요하 유역이 선진 문명권이었는데 삼국시대가 시작될 무렵 황해 항로를 통해 문화 교류가 왕성해지면서 한강 하구가 황해 문명권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중국 대륙에서 작은 부족국가들을 통합시켜 거대한 한나라 제국이 형성될 때 황해를 둘러싼 산둥반도, 요하유역, 한반도에 해양제국 백제가 탄생한다. 근초고왕 집권기에 백제는 최강국이 되었으며 한강을 중심으로 황해 전역을 관장하게 된다.

백제는 황해 유역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발해만 지역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 고구려는 분열된 부여족들을 통합시켜 나가면서 만주 전역을 차지하게 된다. 서쪽으로는 요하와 남쪽으로는 한강까지 진출하면서 점점 강성해진다. 결국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격전을 벌이게 되고 광개토대왕이 집권하면서 고구려가 한강 유역 점령하게 된다. 392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강 하구 관미성을 차지하면서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고 그 후 근 200년간 한강 하구는 삼국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격전장이 된다.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연합했다가 곧 이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기도 하는 등 복잡하게 지배권 다툼이 벌어지는데, 결국 신라가 차지하게 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한강 하구 유역은 한반도의 심장이었던 것이다.

백제로서는 중국의 요서지역과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잇기 위한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강 하구 유역을 장악하는 일은 국가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황해도 장산곶과 요서 땅의 산둥반도를 잇는 해로는 부여 유민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백제를 세울 때부터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학교에서 백제의 강역이 한강 이남 충청도, 전라도 지역이라고 배워서 백제가 중국의 동해안, 인도차이나 반도, 일본 열도를 포함한 환황해(環黃海) 전역을 경영하기 위해 한강 하구와 황해 직항로를 장악하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인지 공감하지 못한다. 아직도 주류 사학계에서는 비류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역사 교육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이미 많이 알려진 문제이다. 백제의 중국 대륙 경략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는 KBS의 드라마 [근초고왕]을 첫손에 꼽는다. 이 드라마는 이문열 대하소설 [대륙의 한]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는데 영화로 만들어져 공중파로 방송되면서 학계의 논란거리인 백제의 ‘요서경락설’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드라마 [근초고왕] 함선
 

비류왕의 아들 부여구(근초고왕)와 부여찬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지고 부여구는 요서땅으로 도피한다. 부여찬은 해씨 왕비의 소산이고 부여구는 진씨 왕비의 소산이니 결국 해씨와 진씨 두 가문의 권력 투쟁이 낳은 결과라고 봐야 한다. 비류왕 바로 전 왕이었던 분서왕의 적자 부여준까지 고구려 고국원왕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르려고 획책하니 왕위 다툼은 국운을 좌우할 지경이 되었다. 해(解)씨는 온조계이고 진(眞)씨는 비류계의 성씨로 파악되는데 백제 건국 초기에는 이 두 집안의 권력 다툼으로 왕위 승계가 무척 복잡했다.

삼국사기 건국 설화에는 비류 온조 형제가 함께 백제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중국의 사서나 일본의 사서에는 비류와 온조가 서로 다른 혈통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종합하여 보면 부여족의 여러 일파가 요서, 위례, 마한 등 도처에 정착해 부족국가를 세웠다가 나중에 합쳐 백제가 성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그리고 있는 왕권 다툼은 부족국가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중앙 집권 고대국가 체제로 성장 발전해 나가는 역사 발전 과정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비류 온조 건국 설화도 부여계 온조계 등의 부족들이 통합되어 나가는 과정을 집안 이야기로 비유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해씨(온조계) 집안은 부여준과 음모하여 비류왕을 독살하고 진씨(비류계)와 부여구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워 부여구를 요서로 추방한다. 부여준은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힘을 빌린 만큼 영토 일부를 내어줄 수 밖에 없게 되고 부여준의 추악한 음모를 알게 된 부여구는 크게 분노한다. 동족을 배신하면서까지 권력을 쥐려는 욕심은 점점 더 사나워지고 궁궐 내부에서는 부여준 뒤를 이을 태자를 세우는 문제로 친족 간에도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 밖 사정도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다. 고구려는 한반도 백제가 집안싸움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요서 백제를 치려고 한다. 5호16국 분열시대 요하 유역은 고구려, 비류백제, 연나라, 조나라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조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략한다. 부여구는 고구려와 조나라의 침략을 물리쳐 요서 백제의 지도자로서 위상이 높아지고 추종자들과 함께 한성백제까지 장악하려고 한다. 부여준(계왕)은 한성백제로 돌아오려는 부여구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가 맞서지만 비류왕의 친서가 공개되면서 부여준(계왕)의 사악한 음모가 밝혀지고 부여준은 부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한성으로 돌아온 부여구는 이복동생 부여찬과 어미 해비를 처벌하고 왕위에 오른다. 씨족 간의 통합을 위해 왕후를 해씨 집안에서 맞이하려고 하자 이를 두고 자신의 집안 진씨 가문이 반발하면서 두 집안 간의 갈등이 또 일어난다. 왕위에 오른 부여구(근초고왕)는 왕권을 강화하고 마한을 정벌한다. 남쪽 땅을 평정한 뒤에 군사를 북쪽으로 집결시켜 고구려를 쳐서 평양성까지 함락시킨다. 이 때 태자 근구수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구려 고국원왕은 전사하고 만다. 4세기 무렵 해상왕국 백제는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것이다.

 
백제의 강역 교과서 지도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나라인데 그 강역이 중국 북경 근처에까지 이를 정도로 강성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할 테지만,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서는 대부분 승전국 신라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조선시대 역사서 또한 중국을 받들어 섬기는 중화(中華) 사대주의에 물들었을 가능성이 큰 만큼 백제사가 크게 위축되어 서술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만큼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백제사는 사실과 많이 다를 것이다.

식민사관과 중화주의(中華主義)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재야 사학자들 연구 성과 덕분으로 감춰진 우리 민족사가 복원되고 있다. 조선족에 의해 일어난 홍산문명이 황하문명보다 1000년이나 앞선 선진 문명이며 한반도와 만주, 몽골 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종족들이 동일한 문화권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검증되고 있다. 더 나아가 카자흐스탄, 터키 등 중앙아시아 일대를 누볐던 투르크족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궈낸 수메르족까지 단군, 배달의 선조 환인족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우리 조상의 상고사는 장대(壯大)했다.

최근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접하면 이문열 소설 [대륙의 한]이 학계의 연구 성과와 달리 근초고왕 대의 대백제 역사를 너무 협소하게 서술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 아쉬움이 반영된 것인지 드라마는 원작과 달리 대륙백제의 스케일을 크게 그렸다. 근초고왕 때의 백제를 만주 요서지방까지 장악할 만큼 강성한 대제국으로 그려냈다. 이문열의 [대륙의 한]보다는 윤영용의 소설 [근초고대왕]이 드라마 제작에 더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이다. 시대주의에 빠진 김부식에 의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의해,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우리 역사가 얼마나 축소 왜곡되었는지 통감케 하는 드라마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 역사가 협소하게 왜곡된 사연에 대한 이야기로는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을 권하고 싶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 왜곡의 실상을 직접 추적해서 밝혀낸 보고서 같은 소설이다. 1984년에 KBS 다큐멘터리 '일본 속의 한국' 제작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직접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직접 목격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를 사실적으로 전하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하듯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은 일본이 자기 민족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칠지도와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사실은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 역사의 왜곡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2016년 공연 포스터


강단 사학계에서는 아직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 역사는 온조계 역사에 국한되어 있으며 만주 대륙에 있던 비류백제가 백제사 근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면서 대륙백제와 한성백제를 이어주는 황해 직항로의 한반도 출항지 인천 한나루와 능허대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한나루를 한자로 표기하면 대진(大津)이라 하여 아산만의 대진항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인천은 한강을 통해 한성백제로 연결되는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통 요충지로 유력하다 할 수 있다. 근초고왕 때 특히 한나루가 많이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태자 수(근구수왕)가 사신으로 파견되는 이야기가 [능허대, 바다를 품다]라는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한나루 옛 모습
 

수 태자(근구수왕)가 사신단을 이끌고 요서 땅으로 떠나려다가 태풍을 만나 능허대 객관(客館)에 머물 때 기생 ‘송화’을 알게 된다. ‘송화’는 귀족 집안의 여식이었는데 부모가 왜구 해적에게 목숨을 잃고 천애 고아가 되어 능허대 객관의 기생으로 들어와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같이 죽은 줄 알고 있던 오빠가 사신단의 호위무사가 되어 온 것을 알게 되고 눈물의 상봉을 한다. ‘송화’는 사신단의 한 사내를 사모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 사내가 백제의 태자 ‘수’였다. ‘송화’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이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며 뜬 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한다. 수 태자는 요서 땅에서 큰 업적을 세우고 돌아와 왕위에 오르고 나랏일을 돌보느라  ‘송화’를 보러 갈 틈이 없다.

‘송화’ 오빠 비천은 자신이 호위하는 태자가 낮은 신분의 자기 동생과의 염문으로 곤란한 처지가 될까 걱정하며 동생에게 태자를 잊어라 부탁한다. 태자가 ‘송화’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써 전하라고 하면 중간에서 없애버리고 만다. ‘송화’는 태자를 그리워하며 애를 태우고 틈만 나면 능허대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곤 한다, 오빠가 왔을 때 태자를 한 번만 보게 해 달라며 삼 년을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삼 년이 다 되었는데도 태자는 오지 않는다. ‘송화’는 결국 능허대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능허대 옛 모습
 

능허대 아래 한나루 기록 사진을 보고 요즘 모습을 담기 위해 현장을 둘러보았지만 정확한 지점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주변이 온통 아파트로 뒤덮여 있고 바다 쪽으로도 송도 신도시가 들어서 있어 원양(遠洋)으로 항해할 함선이 정박했던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 남아있는 기록 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근 100년 만에 이렇게 상전벽해(桑田碧海)를 했으니 1600년 전 삼국시대에는 어땠을까. 황해 해안에는 개펄이 넓게 형성되어 있어 대형 선박이 접안하기 어려웠을 텐데 미추홀과 요서 땅을 잇는 항로가 어떻게 운영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는데 100년 전 한나루 모습만 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인천이 낳은 미술사학의 선구자 고유섭 선생께서 1930년대 무렵 능허대를 찾은 소감을 적은 글을 보면 한나루가 이름처럼 큰 나루터였다는 것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가을 바람이 건듯 불기로 교외로 산책을 하였다. 능허대 가는 길에 도공의 제작을 구경하고 다시 모래밭 위에 가을빛을 마시니 바다 내음이 그윽이 옷깃에 스며든다. 벙어리에서 길을 물어 가며 문학산 고개를 넘으니 원근이 눈 앞에 전개되고 가을 기운이 온 들판에 넘쳤다. 미추홀의 고도를 찾아 영천에 물 마시고 큰 들을 거닐다가 신선의 열매로 여름을 작별한다. 이 곳 능허대라고 하는 곳은 인천의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한 10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모래섬인데 이 조그만 반도 같은 섬에는 나무도 바위도 멋있게 어우러져 있고 허리춤에는 흰모래가 규모는 작으나 깨끗하게 깔려 있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 달라서 막힘이 없다. 발밑에서 출렁대는 물결은 선비의 숭엄을 가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