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관미성을 정복한 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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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관미성을 정복한 광개토대왕
  • 이한수
  • 승인 2018.09.11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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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정우 소설 [광개토태왕], 김진명 소설 [몽유도원]


4세기말 근초고왕 때 가장 강성했던 백제는 5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와 대치하면서 점차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 무렵 고구려는 서북방 선비족을 평정하고 남방 정벌에 나서면서 백제와 영토 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선비족과 대치하고 있을 때 중국 대륙은 5호16국 시대를 마감하고 위진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다. 분열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선비족이 대륙을 주름잡았던 시대이다. 흉노족이 약화되고 선비족이 몽골 만주 지역을 차지하면서 대국을 세우게 되는데 중국 사서(史書)는 이 시기를 5호16국, 위진남북조 분열기로 서술하고 있다. 북방지역에서 차례대로 세워진 강대국 연나라, 위나라, 수나라, 당나라는 모두 선비족 계통인 탁발, 모용 씨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나중에 요나라를 세운 거란도 선비족의 일파이다.

우리들에게는 [삼국지]라는 한족(漢族)의 역사서가 익숙해서 위촉오 삼국시대는 잘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대륙을 지배했던 흉노, 돌궐, 선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흉노는 유라시아에 걸쳐 거대한 훈제국을 세워 로마를 제압했고 돌궐족은 중앙아시아 아랍 세계를 장악하고 투르크 제국을 세웠다. 선비족은 몽골이 원 제국을 세울 때까지 실질적으로 중국 북방 대륙을 지배했다. 그들 선비족이 중국 대륙에서 연, 위, 수, 당을 세울 때 만주 대륙은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대륙의 실제 지배자는 북방 유목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우리는 중국의 삼국지 역사보다 우리 고구려사를 더 모른다.

중국 대륙 남쪽은 진나라로 통일되고 북쪽은 위나라로 통일되어 나갈 때 고구려는 위나라와 연합하여 연나라를 복속시키고 남진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5호16국 시대에는 연나라가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 때에는 연나라가 침략해 들어와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어머니 태후가 인질로 잡혀가는 등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을 거치면서 국력이 점점 강해지고 장수왕 대에 들어 연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연나라를 제압하고 나서 고구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그 첫 성과는 광개토대왕의 관미성 정복이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閣彌城(각미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關彌城(관미성)’과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관미성’과 같은 성으로 추정된다. 여러 사료를 종합했을 때 관미성의 위치는 예성강 하구 지점인 것으로 파악되는데 성곽 주변의 지형지세에 대한 기술과 부합되는 곳은 교동도 화개산성 터로 보인다. 지정학적으로도 교동도는 백제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쿠로시오 해류가 교동도 앞 바다에서 서쪽으로 휘면서 중국 산둥반도 쪽으로 흘러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 요지였다. 관미성이 정복되면서 대륙백제와 교통이 끊어지면서 백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난하(롼허) 하류 진황도


이설(異說)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요서 진황도설과 임진강 하구 오두산성설이다. 2007년 MBC에서 방영한 [태왕사신기]에서는 고구려가 백제를 칠 때 큰 전투가 벌어진 ‘관미성’이 중국 요서 지방에 있는 것으로 그렸다.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관미성 주변의 강 ‘패수’를 황하 북부 하남성의 강으로 보는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패수’가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이며 한(漢)과의 경계이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료에 근거해 서백제 관미성을 발해만의 난하 하류 ‘진황도’로 추정한 것이다.

 
드라마 [광개토태왕]의 관미성 장면


2011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관미성을 강화도 옆 교동도로 그렸다. 관미성 주변을 흐르는 패수를 황해도의 예성강으로 보고 관미성은 예성강 입구에 있는 교동도 북단에 위치했을 것으로 본 주류 사학계의 학설을 반영했다. 관미성이 백제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략적 요충지라면 가장 유력한 지점으로 강화도를 추정할 수 있다. 한성백제와 대륙백제를 잇는 해상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고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예성강 하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서 관미성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조정우의 소설 [광개토태왕]은 관미성 전투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강화도 주변 위성사진


  혈구도(강화도) 북단에 위치한 관미성은 험준한 지형을 골라 견고한 성벽을 세운데다, 북부와 동서부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남부는 해자(성벽이 안이나 밖에 구덩이를 파서 물을 채운 못)에 둘러싸여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한성의 관문이라 불리는 군사 요충지였다.
  그날 혈구도의 연안은 아침 내내 짙은 안개가 끼어 담덕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은 아무 저항 없이 동음홀(황해도 연백) 앞바다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백(관미성 성주)은 다급하게 명했다.

  “속히 봉화를 올려 달을참(교동도)과 동자홀(김포시)에 원군을 요청하거라.”
  이때 이미 담덕은 병선 2백 척을 이끌고 혈구도 해협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어느덧 혈구도 해협을 가렸던 안개가 개이고 아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담덕은 뱃머리에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면 회한에 잠겼다.
  ‘아바마마, 오늘 기필코 백제 수군을 격퇴하여 할아바마의 피맺친 원한을 갚겠나이다.’
- 조정우 [광개토태왕] 중에서 -

광개토대왕은 태자일 때 12세의 나이에 후연 정벌 전쟁이 참전할 만큼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용맹한 군주의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조정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백제 정벌에 나선다. 수군을 양성하여 수공 작전으로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 관미성을 함락시킨다. 아시아 최강의 수군 군사력을 자랑하던 백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백제 진사왕은 패전 직후 사망하고 조카 아신왕이 등극하지만 국운은 점차 기울어 간다. 광개토대왕은 관미성을 정복하고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 북방 거란 정벌에 나서게 되고 백제 아신왕은 실지(失地) 수복에 나서지만 결국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고 만다.

광개토대왕은 관미성을 정복하여 백제를 제압하고 거란 정벌에 성공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고구려인 1만을 데리고 오는 등 대외적으로 큰 성과를 올렸다. 대왕은 영토 확장에서 뿐만 아니라 내치(內治)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다. 태학과 조의선인으로 신진 개혁파를 양성하여 내정 개혁을 이루어 내고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국가 통합력을 크게 신장시킨 역사적 인물이다. 문벌 귀족들의 사병을 해체하고 5대 문벌 연맹체를 혁파하는 등 국가 체제 발전을 급속하게 이루어내면서 역사를 크게 진보시킨 것이다. 태자 담덕이 어린 시절부터 용맹한 전사로 큰 전공을 세우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린 작품으로 정호일의 [천손의 나라]를 추천한다.

 
비각이 세워지기 이전의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대왕의 사후 1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학계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장수왕이 부왕을 기려 세운 비석에는 대왕의 업적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후대에게 귀중한 역사 연구 사료가 되었지만 비문의 보존과 해석을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 간에 미묘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비석에 새겨진 ‘각미성’의 위치에 대한 논쟁보다 ‘임나’에 대한 논쟁은 훨씬 심각한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구절에서 훼손된 세 글자를 ‘任那新’으로 복원했다고 주장하며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들은 이 구절을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임나,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작된 ‘임나일본부설‘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의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형상화한 소설로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이 많이 알려졌는데 광개토대왕 비문의 왜곡 조작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소설로는 김진명의 [몽유도원]이 가장 유명하다. 이 작품은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사실은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입증 자료를 추적하면서 밝혀진 일들을 실감나게 그려 독자들을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의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동경대학원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유학생 박상훈은 조선시대 그림 '월중도하도'를 소장하고 있는 야마자끼 미술관을 찾아간다. ‘월중도하도’나 ‘몽유도원도’같은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일본에 빼앗겨 아직도 되찾아오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개탄한다.

상훈은 80대 노인 '우에노 에이지' 살인 사건 수사에 자문 역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죽은 노인이 소장한 책이 모두 광개토대왕비와 관련된 논문들이고 상훈은 이 분야 연구자라 수사 자문으로 초빙되었고 상훈 자신도 일본 역사학계의 광개토왕 비문 연구에 관심이 많은 터라 수사에 적극 참여한다. 또 다른 살인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수사는 미궁에 빠져들고 사건이 광개토왕 비문의 조작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혹이 점점 커진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이 광개토왕 비석을 변조시켰다는 ‘석회도말론’을 주장했던 서울대 이정호 교수가 사망하면서 수사는 한일 양국으로 확대된다. 비석이 있는 만주, 시베리아, 멀리는 바이칼 호수까지 탐사하면서 비문 조작의 실체를 밝혀낸다.

실제로 김진명의 소설 [몽유도원]은 일본 극우 역사연구소가 획책한 광개토왕 비문 조작 음모를 밝혀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제 일본은 ‘임나일본주설’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작가가 중국에 소장되어 있는 여러 탁본을 탐색하면서 ‘百殘###羅’의 훼손된 세 글자 중 첫 번째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저본을 발견하면서 일본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낸다. 이 저본은 비문이 훼손되기 전의 글자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 사라진 세 글자 중 첫 글자가 ‘東’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세 번째 글자의 일부분 ‘斤’이 남아 있고 첫 글자가 밝혀져서 이 구절은 ‘百殘東征新羅’으로 추정되고 ‘백제가 동쪽 신라를 정벌했다.’로 해석된다. 한반도는 원래 일본 속지였으니 되찾자는 ‘정하론’이 침략자들의 거짓말이었다는 게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러나 일본의 후안무치는 변함이 없다.

정한론은 대동아공영권으로 확대되고 일본은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어 아시아의 인민들이 처참하게 살육당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위안부 강제동원, 남경대학살, 경신대참변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은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정한론 주창자 ‘요시다 쇼인’의 신사를 참배하고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히면서 한국은 “단지 어리석은 나라일 뿐”이라고 망발을 하고 있으니 정한론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조선총독부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며 했던 말이 되살아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 아베 노부유키 연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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