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진 단죄, 늦어진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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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진 단죄, 늦어진 수훈
  • 송정로 기자
  • 승인 2019.03.02 0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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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이원규 작 <마지막 무관생도>, MBC 다큐 3일 재방영




인천의 소설가면서 최근 <약산 김원봉>(2005년) <김산 평전>(2006) <조봉암 평전>(2013) <김경천 평전>(2018) 등 독립운동가들의 평전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이원규 작가. 그가 10여년 고심 끝에 지난 2016년에 내놓은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MBC는 3.1운동 100주년 특집으로 다큐 ‘마지막 무관생도들’을 2부로 제작<인천in 2월22일 보도>, 지난 25일에 이어 3월1일 오후 5시50분에 방영했다. 이원규 작가는 1일 2부 방영 후 페이스북에 “내 작품이라 뻔히 아는데도 눈물이 났다. 순간 잘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나는 친일행위를 꾸짖듯 쓰지 않고 내면의 양심을 파고 들었는데, 다큐는 내 책보다 더 내면 묘사에 파고 들었다”고 평했다. MBC 3.1운동 100주년 특집 2부작 다큐는 3일(일) 오전 8시부터 연속해서 재방영할 예정이다.
 
원작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중국, 러시아 현장 답사, 미공개 자료 발굴 등을 통해 역사적 팩트들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그 빈틈을 상상력으로 결합해 시종 재미와 긴장, 그리고 긴 안목의 역사적 교훈까지 주는 역작이다.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주목받는 것은 먼저 스토리의 형식이다. 출판사는 <마지막 무관생도>를 ‘소설로 읽는 역사’라로 명명했는데, 실제 한 권의 탄탄한 역사책으로 손색이 없다. 소설 형식으로 책을 엮어갔지만, 실제인물과 실제로 있었던 사건, 사실들을 고증된 정확한 자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즘 말하는 팩션(faction, fact+fiction)을 리얼하게 개척했다. 그러나 읽다보면 무게의 축은 팩트에 쏠리게 된다. 250개여에 이르는 본문 하단의 세밀한 각주가 무게추 역할을 하고 있다. 250여개의 각주(200자 원고 1800장 분량) 중 40%는 ‘대한제국무관학교생도 성적순 명부’ 등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자료, 일본국 관보, 지방의 군(郡)신문 등에 실린,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찾지 못한 1차 자료들이다.
 
<마지막 무관생도>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에 이어 3.1독립운동, 해방, 한국전쟁과 근대화에 이르는 격동기를 거쳐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공포(2004) 및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2009)에 이르기 까지 친·항일 100년의 역사를 긴 안목으로 통찰할 수 있다는데 있다. 특히 마지막 무관생도 45명의 삶을 결말까지 통째로 조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생생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애초 일본행을 거부한 유일한 생도는 왜 친일로 돌아섰는가. 도일 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없는 군대가 뭔가’라며 분개해 퇴교한 생도는 왜 조선총독부 서기로 일하였는가. 경술년 나머지 대다수 생도들도 강제합방 소식에 통곡하며, 항일투쟁을 결의했는데, 이를 실천한 생도는 4명(지석규(이청천), 이종혁, 조철호, 이동훈 – 김광서(김경천)은 선배기수)에 불과하다니. 이원규 작가도 이 사실을 확인하고는 실망하여 ‘조국을 배반한 인물들의 생애마저도 끌어안을 수 있을 때까지’ 여러해를 기다려야 했다고 하였다.

 
 


1909년 8월 삼청동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폐교될 당시 마지막 무관생도는 1학년 23명, 2학년 22명 등 총 45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본행을 거부했던 김영섭 한 명을 뺀 44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 이들 가운데 11명은 중도에 자퇴 혹은 탈락했으며, 33명이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됐다.
 
여러 등장인물 중 지석규, 김광서, 이응준, 홍사익 4인이 부각된다. 이들 네 명 중 김광서와 지석규는 일본군을 탈출,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극적으로 자리바꿈을 한다. 그 분수령은 1919년 3.1운동이다. 두 사람이 함께 탈출한 날은 1919년 6월6일이다. 김광서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 항일투쟁에서 전설적 인물로 불린 ‘김일성 장군’의 실제 주인공으로, 김경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석규는 이청천의 이름으로 풍찬노숙 처절하게 무장투쟁하다 1940년 광복군 총사령관에 오른다. 
 
4인이 피의 맹세로 독립투쟁에 나서기로 헸으나 홍사익과 이응준은 갈등 속에 포기하고 만다. 그들 판단에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에 너무 약했다. 국제정세도 좋지 않았다. 3.1운동에서 해방까지 26년이 걸린 것이다.
 
해방 후에도 통탄스러운 장면은 계속됐다. 식민통치를 받은 나라들은 독립전쟁을 한 사람들을 중용하고 과거청산을 맡기는 것이 상례이건만 미군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한 통치를 점령지 통치로 여긴 것이다.
1942년 1월 김경천은 러시아에서 사망하고, 이청천은 살아 해방을 맞았다. 일본 육군 중장까지 이른 홍사익은 필리핀 수용소에서 전범으로 체포돼 1946년 9월 사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미 군정청은 이응준에게 한국군 총수를 뽑는 국방부장의 추천을 의뢰했다. 이응준은 이승만 대통령 취임 후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한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재임할 때 조선인의 입대를 권유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선동했다.



 <러시아에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김경천 장군>


고대했던 행방 후 역사의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혹독한 처벌을 각오했던 친일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생각도 못했던 행운을 이어갔다. 이응준은 예편 후 체신부장관, 반공연맹 이사장을 지내며 군의 원로로서 96세까지 살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이청천은 1946년 4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뒤 광복군을 재건하려 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응준은 2007년에서야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 가장 먼저 ‘일제강점기 중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로 지목된다. 이어 2009년 홍사익 등 9명이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명단에 들었다. 그리고 이들에 더해 16명의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너무 늦어진 단죄였다.
 
1962년 지석규가 건국훈련 대통령장을, 1980년 이종혁이 건국훈장 국민장을, 1990년 조철호가 건국훈장 국민장을, 1998년 김광서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그리고 2012년 이동훈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너무 늦어진 수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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