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선생....독립운동가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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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선생....독립운동가의 거장
  • 이창희
  • 승인 2019.03.04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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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창희 /인천in 시민기자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에 희사




독립운동가 최재형선생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흥백은 노비였으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최재형은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러시아 지신허로 갔다. 최재형은 한인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는 동안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굶기를 밥 먹듯 하여 11살이 되던해 포시에트 항구에 가면 밥을 굶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가출을 감행해 포시에트를 찾아갔을 때는 너무 기진해서 그만 바닷가에서 정신을 잃고 만다.
  
최재형을 발견한 것은 선한 러시아 선장이었다. 그 선장부부는 나이가 많았고 배를 가지고 세계를 도는 선주였다. 최재형은 러시아 선장 부부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선장의 부인은 학식이 뛰어났다. 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가르쳤고, 선장은 최재형이 해외에서 견문을 넒힐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최재형은 1871년부터 1977년까지 6년동안 선장부부와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웠고 이를 통해 최재형은 풍부한 학식과 폭 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7살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통해 한인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제대로 받게 해주고 한인인부들을 데리고 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어 러시아의 니꼴라이 2세로부터 은급훈장을 받는다.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1년 수입이 10~12만 불에 달하는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특별히 조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조선인 사회에서 도헌(군수 정도 되는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 지위가 높아졌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아 한인마을마다 정교회 학교를 무려 32개나 세웠다. 한인들은 최재형을 페치카 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최재형은 그 후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둔다. 1907년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난다. 그리고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참여한다.

 

 최재형 선생 생가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류인석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옛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또한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킨 동의회를 결성하였는데, 동의회는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모두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하는 군사적 활약을 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가 40여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4명에 불과할 만큼 가벼운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이로 인해 의병들이 러시아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 징집, 무기 수거 등으로 의병 활동을 방해했다.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하는 안중근의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싼값에 무기를 사서 대한의군을 먹이고 입히는 숙식을 최재형의 집에서 했다. 그만큼 최재형은 군납업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고 집도 큰 저택이었다. 안중근이 이끄는 대한의군이 신아산전투등 국내진공작전에 연전연승하다고 영산전투에서 참패를 하게 된다. 참패의 원인은 포로를 석방하여 대한의군의 비밀루트가 발각된 때문이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최재형을 무장해제시킨다. 최재형은 자금난에 문을 닫게된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안중근은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한다. 그 후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최재형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을 모의한다. 당시 하얼빈은 중국의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조차해서 다스리던 땅이었다.

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니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의사는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연습을 한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사주고 안의사가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계획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불법재판을 받고 순국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더욱 러시아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최재형은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음모로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거래를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최재형은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과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최초 임시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에서 외교부장을 맡았다. 그 이후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최재형은 교육가 사업가 독립운동가 언론가 등 다양한 길을 걸으며 오로지 한인들을 위해 살았고 엄청난 돈을 벌어 한인들과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재형은 또 선택해야 했다. 그에겐 조국만 있을 뿐 이념이 없었다. 일본이 반혁명군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혁명군과 함께 싸우길 택했다. 1918년 10월 말, 한인 사회당 간부인 이동휘, 김립, 이인섭은 하바로브스크에서 몸을 피해와서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동쪽인 한인 농촌에서 회합을 하였다.

당시 홍범도는 솔밭관 최의관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홍범도를 지도자로 해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 이 계획을 추친하기 위해 한인 사회 지도자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같은 사람들에게 몰래 찾아가서 자금 지원을 요청해서 그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런 적극 지원은 일제군의 첩보에 걸렸고, 이로 인해 최재형은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19년 망국 이후 신한촌에서 가장 먼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대한 국민 회의'라는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상해 임시 정부보다 한달 빠른 시점) 대표는 헤이그 밀사의 정사였던 이상설이었고,  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도 최재형이다. 그는 1920년 청산리 전투 &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에게 체코와 러시아제 기관총 등 무기를 구입해 공급하며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여건이 여의치 않아진 최재형은 한 초라한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20년 러시아 내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최재형의 나이 63세였다. 현재 그의 손자 최발렌틴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 최재형의 사진과 관련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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