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해 살지" … '멍에'를 짊어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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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못해 살지" … '멍에'를 짊어진 삶
  • 이혜정
  • 승인 2010.12.29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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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 창간 1주년 기획] '꼬방동네 사람들' - ① 중구 북성동


오전 2kg(2만6천원)의 굴을 팔았다는 박모(65) 할머니가
오후에 손님이 올지 모른다며 쉴새 없이 굴을 까고 있다.
 

취재 : 이혜정 기자

'시민이 만들어가는 대안언론 <인천in>'이 창간 1주년을 맞아 기획으로 인천의 대표적인 '꼬방동네' 이야기를 펼친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의 희망을 가다듬어 보는 세밑. 하지만 '꼬방동네 사람들'에게는 추위와 생계가 막막한 계절이기도 하다. 인천 '꼬방동네'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들여다 보았다.

1. 중구 북성동 '쪽방촌' 
2. 계양구 효성동 '쪽방촌'
3. 동구 만석동 '쪽방촌'

지난 13일 오후 인천 중구 북성동 1가. 동네 끝자락에는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알루미늄 박스 건물 한 채가 있다. 몇 명의 북성동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굴 장사'를 하는 곳이다. 1~9번까지 촘촘하게 나뉘어 있다. 늦은 시각이 아닌데도 동네가 한산하다.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심스럽게 한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기자인데요. 할머니가 사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할아버지와 늦은 점심을 들고 있던 박모(65) 할머니가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사는 이야기? 우리야 이러고 살지 뭐가 궁금해? 일단 추우니까 어여 들어와." 기자는 엉덩이를 간신히 걸칠 수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가 기자에게 내준 자리는 온기가 가장 많이 도는 명당자리. 급하게 식사를 마친 할아버지는 뒷쪽 작은 방으로 들어갔고, 할머니는 다시 굴을 까려고 좁은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아가씨 굴까는 거 본 적 있어? 우린 굴을 까서 이렇게 하루하루 먹고 살어. 알다시피 이 동네 사람들 사는 게 다 그래. 이거 해봐야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지금 한창 철이니까 바짝 해서 벌어야지. 이것도 내년 4월까지밖에 못해."

박 할머니가  굴을 까서 생계를 유지한 것은 15년째. 고무장갑에 면잡갑까지 끼고 굴을 까지만, 손에는 15년이라는 세월이 묻어 있다. 할머니의 손을 쳐다보고 있던 기자의 눈길을 아셨는지 손을 가리며 "내손이 거칠지?"라며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박 할머니와 남편.

박 할머니가 이곳 중구 북성동에 둥지를 튼 때는 1957년 22살이 되던 해였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장사를 하다가 생활이 계속 어려워진 할머니는 바다가 있는 인천을 찾았다. 어릴 적 전라도 신안군 압해도에서 자란 할머니는 바다일 하나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인천을 찾은 거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바닷가에서 뭐든 나왔으니까, 적어도 굶지는 않고 살 수 있겠다 싶어서 찾아온 곳이 인천이야. 처음에 는 바다일 좀 해보려고 일거리를 찾는데, 참 안 써주더라고,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시작한 게 설탕뽑기 장사야. 그런데 뽑기 장사로는 밥 먹는 것조차 어려워 결국 얼마가지 못해 때려쳤지."

그 후 할머니는 쑥을 사서 '쑥개떡' 장사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쑥이 꽉 채워진 80kg짜리 포대를 사다가 삶고 식히고, 물에 담궜다가 20kg 밀가루 2포대와 썩어 떡을 만들었다. 할머니가 만든 쑥떡은 성인 남자 손바닥만한 크기에 밀가루보다 쑥이 더 많이 들어가 시장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했다.

"그때는 쑥개떡이 개당 20원인가 했어. 다들 없이 살았으니까 값싸고 배를 채우는 데는 최고였지. 그래서 많이들 사먹더라고. 밥 대신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 크고 묵직하게 만들었어. 우리도 없어서 쑥떡으로 끼니를 때웠으니까."

할머니가 쑥개떡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석유로 심지를 올려서 불을 올리는 '석유곤로'를 썼다. 불이 매우 약하니까 떡 한번 찌려면 하루종일 걸렸다. 장사를 하고 들어와서 쑥을 재놓고 밤 12시부터 아침 10시까지 하루종일 쪄야 하루 장사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아이를 가진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쑥떡 장사를 그만두게 됐다. 간간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몸이 아픈 남편은 일을 그만뒀고, 할머니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아이들을 떼놓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꽃게 장사, 생선장사, 새우젓장사 등 보따리 장사가 될 만한 장사는 다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인가 잘은 기억 안 나는데…. 이 동네가 전부 하꼬방(지금의 쪽방촌을 그 당시에는 일본말 하꼬방으로 불렀다)이었는데, 그걸 다 철거하고 나서 결국 나도 장사를 못했지. 이전에는 이곳이 전부 북성동이었는데, 그때 철거하고 나서 지금의 북성동과 만석동으로 나눠진 거야."


북성동 '꼬방동네' 주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굴을 판매하는 곳.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할머니 손은 바삐 굴을 까고 있었다. 오전에 깐 굴 2kg(2만6천원)을 겨우 팔았기 때문에 오후에 조금 더 팔려고 부지런히 굴을 까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자식들과 왜 함께 살지 않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자식? 그 이야기는 안 물어봤으면 좋겠네. 자식들은 그냥 다 잘 살아…. 그런 사연이 좀 있어." 할머니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이내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아들 하나 있던 게 멀리 가버렸어. 어느 날 갑자기 A형 간염이라고 하더니 얼마 안 있다가 갔어. 결혼한 지 1년 만에 그러고 나서 며느리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아예 연락두절이야. 우리 막둥이 아들이 참 잘했는데…. 속 한번 썩이지 않고 공부도 잘하고, 번듯한 직장 다니면서 용돈도 주고 했는데. 에고 말하면 뭐 할꺼야? 내 가슴만 아프지. 이제 그만해 우리 아저씨 들으면 화낼라." 

방에 있던 할아버지가 문을 열더니 "목욕 간다고 하지 않았어? 어여 가."라고 재촉한다. 할머니는 "그만해. 우리 아저씨나 나나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기자 아가씨 우리 자식이랑 비슷한 나이 같은데, 말을 하다 보니 별말을 다하네. 이제 그만하고 어여 가."라며 고개를 돌린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자식들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고향은 인천이 아니지만, 줄 곧 살아온 이곳이 내 고향"이라는 할머니는 "사는 날까지 이곳에서 그냥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 
 
북성동 '꼬방동네' 주민들의 유일한 휴식공간 '노인정'

기자는 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후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인기척이 없는 한산한 골목길 끝자락 널찍한 공터 앞. '우뚝' 서 있는 건물로 발길을 향했다. 그곳은 북성동 '꼬방동네' 주민들이 고된 삶을 뒤로 하고 '유일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북성동 노인정'이다.

북성동 '꼬방동네'는 대부분 1951년 1.4후퇴 때 이북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과 1960~70년대 전국 곳곳에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올라와 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유난히 노인들이 많다.
 
노인정에 들어서자 낯선 젊은이 방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전부 문쪽을 향해 쳐다본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노인정 안에는 30여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장기를 두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낸다.

한 할아버지가 "뉘슈? 젊은 아가씨가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라고 궁금한 듯 묻는다. 그 할아버지는 노인정 총무를 맡고 있는 황운철(67)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어떻게 사시는 지 궁금해서 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들어와. 근데 우리 사는 게 왜 궁금해? 뭐하는 사람인데?"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노인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르신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기자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저 기자인데요"라고 하자 황 할아버지는 "아! 기자야? 여기 할아버지 할머니들 대부분 말 잘 안 해 줄거야. 기대는 하지 말고 들어와. 오는 데 고생했을 텐데,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답한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오며 황 할아버지는 말한다.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냥 이곳 사람들 옛날에 피란 오고, 1960년대쯤 저기 밑의 지방에서 올라와서 여태 여기서 이러고 산 거야. 막노동하고, 굴 따고, 조개 잡고…. 옛날에 인근 앞바다들이 전부 청정지역이었으니까. 없어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옛날에는 이곳에 공장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먹고살려고 왔지. 난 여기 14살 때 와서 50년간 줄곧 살았어. 없이 산 사람들은 부모님 때부터 없이 살다가 자식들까지 물려줄 수밖에 없으니까, 그냥 여기서 이러고 살고 있는 거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기자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들의 무관심에 안쓰러운 듯 황 할아버지는 "여기는 내가 말한 게 다야. 아무리 어르신들한테 말 걸어봤자 말씀을 통 안 하시니까, 저기 돌아가면 굴을 까서 파는 사람들 있으니까 거기 가서 물어봐."라며 안내한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알고 찾아오는 취재진들 물음에 지친 북성동 '꼬방동네' 주민들은 기자를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김모(88)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낸 두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16일 오후 다시 북성동 '꼬방동네'를 찾았다. 자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을 지나 작은 언덕 위에 살고 있는 김모(88) 할머니를 몇 차례 방문 끝에 만났다. 여러 가구가 다닥다닥 모여 사는 집 중 하나. 1층에는 페인트칠이 깨끗했고, 문 앞에는 파란 고무신 한짝이 덩그라니 놓여 있다. 2층에는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틀 위에 플라스틱 판자를 겹쳐놓았다.

"저기요. 계세요?" 5번 정도 불렀을 때쯤 할머니가 "누구세요?"라며 문을 연다.

할머니는 낯선 이의 방문에도 들어오라며 손을 잡아 끌었다. 문을 열면 화장실조차 없는 7평짜리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방에는 텔레비전, 5단짜리 옷장에 쌓여 있는 두터운 이불 몇 채와 김치 냉장고, 요강 등이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이 걸려 있었고, 찬 바닥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전기장판을 펼쳐 놓았다.

"할머니 뭐하고 계셨어요?"라고 묻자 "그냥 텔레비전 보면서 그냥 이렇게 앉아 있었지"라며 누군인지도 묻지 않은 채 전기장판 위에 않으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1946년 24살이 되던 해 영종도에서 인천으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처음 시집을 와서 가난한 집안을 이끌기 위해 북성동 인근에 있던 방축회사를 다녔다.

"내가 여기로 시집을 왔는데, 어찌나 가난하던지.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가 다 그랬어. 이전에 이 근처에 있던 도일방축회사가 있었거든. 거기서 일을 했어. 혹시 이불 만들기 전에 당목을 짜는 거 알아? 나 그거 하면서 15년 동안 일했어. 그럭저럭 공장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남편이 중풍에 걸려서 더욱 힘들어졌어. 아휴~ 말도 마. 남편 병간호를 하면서 일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어."

어려운 살림에 업친데 덮친격으로 남편이 중풍에 걸리자 형편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을 해야 했던 방축공장을 그만두고, 간간이 파출부 등 남의 집 살림을 하며 남편 병간호에 매달렸다. 그러다 지난해 돌아가셨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할아버지 죽고 나서 밥도 안 먹히고, 사는 낙도 없어. 아파도 내 옆에 있을 때가 좋았지…. 혼자 이러고 있으려니 적적하네. 내가 무슨 복이 이리도 없는지 아들 둘 딸 둘인데, 아들 둘 다 먼저 앞세워서 보내고…." 할머니는 목이 멘다.


김 할머니가 사는 집. 

둘째 아들은 목재소에서 목공일을 하다가 2003년 위암으로 죽었고, 페인트 칠을 했던 큰 아들은 2007년 간경화로 사망했다고 할머니는 전했다.

"우리 아들들 효자였어. 내가 돈이 없어서 못 가르쳤어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지들 살기도 바쁘면서도 나 고생한다고 돈도 붙여주고, 약도 타다 주며 자주 왔었는데. 이제 다 지난 이야기지. 이 김치냉장고 보이지? 우리 작은 아들이 죽기 전에 사주고 간 거야."

할머니는 두 아들이 먼저 죽고 난 후 가슴통증이 심하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아휴~ 내가 가슴에 맺힌 게 많아. 못 살아서 고생한 것보다 자식 먼저 보낸 게 더 마음 아파. 딸 자식들이라도 잘 살았으면 좋으련만, 만석동에서 굴을 까서 그걸로 먹고 살고 있어."

두 아들이 죽고 난 후부터 한 달에 40만~50만원 기초생활수급비와 노령연금 16만원으로 생활을 꾸리는 할머니. 남편마저 저 세상으로 떠난 지난해부터는 기초생활수급비 15만원과 노령연금 8만원 등으로 간신히 산다고 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 혼자 됐으니, 죽는지 사는지 누가 알어? 나이 먹으니 모든 게 서럽기만 해. 옛말에 자식들 먼저 보내면 가슴에 묻고 간다더니 그 말이 맞나봐. 애들 그러고 나서 약 없으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


중구 북성동과 인현동 '꼬방동네'에는 현재 87가구 176명이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부분 노인인 이들은 먹고사는 일조차 어렵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이들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모진 '풍파'를 거치며 살아온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똑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의 생애를 돌봐야 하는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특히 이들을 돕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의 노력은 더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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