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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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 곽현숙
  • 승인 2016.09.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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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곽현숙 / 아벨서적 대표

배다리 헌책방 ‘아벨서점’ 곽현숙 대표가 28일 저녁 <인천in>에 글을 보내왔다. 8월 어느날, 전화 한통화를 받았는데, 1951년 발간된 ‘소년세계’라는 잡지를 찾는, 송림국민학교 출신의 노신사로 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곽 대표는 잡지를 찾는 그의 사연과 과거 스토리를 듣고, ‘가슴 밑바닥에 숨어있던’ 옛 동심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기고하셨다. <편집자>



<1922년도 송림국민학교 모습>


8월 무더위에 책 창고에서 책 정리를 하는데, 책방에서 전화가 왔다. 찾는 전화라고 번호를 불러준다.

“여보세요 아벨서점입니다.”
“여보세요? 아벨서점 곽현숙 사장입니까?”

허스키하면서도 카랑카랑하게 힘이 실린 남자 어른의 목소리

“네 맞습니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 난, 배다리를 소개한 기사를 보고 전화했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저는 언론에 종사했고, 관훈클럽 회원인 문명호라는 사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1951년에 나온 잡지 ‘소년세계’를 찾는데... 배다리 기사에 보니까 잡지 소장가 서상진씨가 아벨전시관에서 잡지 전시를 하셨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 전화를 드렸습니다.”

1951년 이라면 전쟁중이였는데 어린이 잡지가?

“네 그 분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러세요? 제가 ‘바다’라는 노래의 작사가입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순간, 가사 첫줄에 가슴 밑바닥에 숨어있던, 동심으로부터 봇물처럼 밀려드는 ‘해맑음’이 8월의 찜통 속 창고의 더위를 확~악 밀어냈다.

“아! 그 노래요? 어렸을 때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랜데요.”
어린 날의 찬가였다.

“배다리라고 했죠? 제가 송림국민학교 5학년 때, 대구에서 나오는 ‘소년세계’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 잡지 어린이 글짓기 공모전에 ‘바다’라는 동시를 보내 응모했었는데 우수작으로 뽑혔었죠.”

열기가 실린 선생의 목소리보다 더 놀라운 일은 당시 5학년 어린이의 시가 우리들의 어린 날에 희망의 돛을 세웠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가 인천에서 돋아난 글이라니...... 같은 학교 마당에서 뛰놀던 선배가?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 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 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넓고 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노랫말을 한자 한자 적어 나가다 보니 바다의 하루가 나라 역사를 봇물처럼 펼쳐내는 듯하다. 문명호 선생이 어린 날 바라보던 인천 앞바다 갯벌은 지금은 엄청난 출입항 물류와 거대한 선박들로 수평선을 바라보기가 어렵게 꽉 차있다.

문명호 선생 말씀이 휴전 후, 친구가 YMCA에서 ‘네 시가 노래로 불리고 있더라’고 해서 확인 해보니 사실이더라고 했다.
보내오신 ‘객석’ 1985년 8월호 잡지 복사면에는 <동요 ‘바다’의 작사가 문명호와 작곡가 권길상의 만남>이 120쪽에 실려 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난 두 분의 대담기사였다.





만남을 숙제처럼 안고 있었다는 권선생의 인사말로 시작해서,

“권 : ‘바다’라는 동시를 쓴 것은 언제입니까?”
“문 : 제가 국민학교 5학년때인 1951년 대구에서 나오는 ‘소년세계’라는 잡지에 게재했던 것 인데, 이렇게 좋은 곡이 붙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권 : 동시를 쓰게 된 동기라면?”
“문 : 그 당시 저희 집이 인천 신흥동이었는데, 저는 송림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2층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데, 그 전경이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학교가 끝나면 바 닷가에 나가서 굴도 따먹고 뛰어놀기도 했지요. 어느날 2층에서 밖을 내다보며 그 작품을 썼습니다. - 중략-
“권 : 이 노래는 그 당시 어린이들이 많이 불렀어요, 저는 KBS 어린이 프로에 ‘누가누가 잘 하나’에 심사도하고...... 제 작곡에는 ‘아빠하고 나하고’ ‘꽃밭에서’ ‘둥근달’ ‘바다’ ‘스승의 은혜’ 등 많이 불리더군요, ‘바다’는 특히 좋아하는 곡입니다.”...

두면을 빼곡히 담은 대담 당시, 권길상 선생님은 미국 LA에 사시고, 문명호 선생은 동아일보 외신 기자로서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다가 대담 한 달 전에 귀국한 사실을 읽게 된다. 권길상 선생이 시를 이야기 하니까 문명호 선생은 바다라는 노랫말에 주인공인 것을 알고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지만, 그 말은 자신에겐 당치 않은 말이고 ‘기자’ 라고만 생각한다고 말씀했다. 동아일보 주필로 계셨었고 현재 ‘대한언론인회’ ‘공정언론 시민연대 공동대표’이며 관훈클럽 회원으로 언론계에 평생을 몸담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언론인상’도 수상하셨다.

문명호 선생과 두 차례 전화 대화에서, 권길상 선생은 몇 해 전에 작고 하셨다고 했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사와서 4학년과 5학년을 송림국교에서 보내고 서울로 이사가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던 긴담 모퉁이 길, 시립도서관 옆 시장 관사 사이에 있었던 집, 바닷가 갯벌에서 굴도 쪼아 먹으며 뛰놀던 일, 외국 군부대 한쪽 깊은 골이 있어 수영하던 2년간의 기억 속 면면을 70년이 가깝도록 생생하게 기억해내셨다. 바닷가를 좋아해서 더욱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당시 인천시장 이름이 표양문이었다는 사실도 말씀 끝에 덧붙인다.

나는 문명호 선생께서 잡지 ‘객석’을 사진으로 보내오신 매일에 이런 답을 드렸다.

‘객석 잡지기사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동심 속에 베이스로 깔려있는 동요 ‘바다’가 온몸 깊숙이 들어와 빙글빙글 어린 날로 안내 하네요. ‘넓은 바다 안고 선 우리학교는 ...... 모교의 교가도 힘차게 울립니다. 책을 만지는 사람으로서 1951년이면 전시중인데 잡지가 출판 되었었다는 사실도 신기하고 감동적인 일입니다. 주필님의 전화를 받고 난 후 계속 흥얼거려지는 노랫말은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면 부를수록 감동적인 말 어감에 빠져 책을 정리하던 창고에서 소리를 맘껏 내어 불러 보기도하며 기쁨을 누렸습니다.
해방으로 나라를 찾아 살려가려는 와중에 전쟁이란 극한상황에서,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 속 사람들에게 인천 앞 바다가 문명호라는 맑은 동심에게 노랫말을 실어 권길상 작곡가 가슴을 열고 대한민국에 희망을 뿌린 ‘대사건’이 아니었는가 하는 가슴의 울림이 진하게 번집니다.
저는 1950년생입니다. 우리시대 사람은 나라 없음을 실감나게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므로 나라가 소중함을 바라보게 했었죠.
주필님의 전화 한통으로 우리가 어려서 무심히 불렀던 노래 속에 파란 공간으로 숨 길을 열어준 예언적 메시지가 있었으며, 마음을 받혀 주는 힘이 되었음을 새롭게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바다’라는 동요는 우리시대에 살았던 어린이들에겐 힘찬 희망가 였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어 온 몸이 기립박수를 치게 합니다.‘......하략

어렸을 적 사진을 부탁드려보았다. 어떻게 생긴 어린이에게 노랫말이 고여 글로 나왔을까 궁금했다. 고맙게도 현재 사진도 보내주셔서 글말에도 싣고, 전시관 한쪽에 노랫말과 사진을 올려 놓을 생각이다.





‘소년세계’ 잡지는 서상진 선생이 알아보기로 약속했다. 전쟁 중 책이라 어렵겠지만 꼭 찾아지길 염원한다.

사계의 변화 속에 무던히 견디어 내야할 올 여름 더위 같은 시간들도 우리에게 닥쳐오지만 견딜 힘을 주는 일들이 함께 우리 일생 곳곳에 있음을 회상하며, ‘그랬었구나!’ 하는 마음이 '파란 사랑' 처럼 빙글빙글 돌아 흐른다.


문명호 선생의 근황(동해 국제세미나 발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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