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生·野·死, 그 압축된 삶을 산 야구기자 이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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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生·野·死, 그 압축된 삶을 산 야구기자 이종남
  • 유동현
  • 승인 2024.04.0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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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31) 故 이종남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고 이종남 기자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시절의 고 이종남 야구기자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여(女)와 남(男)의 ‘하루’ 분류법.

- 여자의 하루: 햇살 따듯한 날, 쇼핑하고 싶은 날, 화장 잘 받는 날, 산책하고 싶은 날, 왠지 우울한 날, 하이힐 신고 싶은 날 등등.

- 남자의 하루: 야구 중계하는 날, 하지 않는 날.

웃자고 하는 분류법이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남자 중 ‘프로야구’에 광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화다. ‘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광팬들을 만들어 낸 숨은 공신이 있다.

고(故) 이종남(1953~2006) 기자다.

이종남은 한마디로 ‘야생야사(野生野死)’의 삶을 살았다. 야구에 살았고 야구에 죽었다. 1953년 인천출생으로 축현초와 인천중학, 제물포고(15회)를 졸업했다. 서울대 문리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1977년 한국일보에 입사하면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회부 기자로 출발해 1979년 4월부터는 스포츠부에서 야구 기사를 전담했다. 82년 경향신문 체육부에서 잠시 일하다가 스포츠 전문지로 자리를 옮겼다.

 

고교 졸업 앨범 속 이종남
고교 졸업 앨범 속 이종남

 

1985년 <스포츠서울>이 창간되었다. ‘야구기자’를 한다는 조건으로 주저 없이 창간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20여 년간 야구기자로 한 우물을 팠다. 1985년 6월 22일 창간한 <스포츠서울>은 서울 시내에서 창간 첫판이 2시간 만에 동이 나 추가 인쇄를 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창간 초기 밤을 새워 아침 9시까지 신문을 찍어도 모자랄 정도였으며 길거리 가판대에서 1백만 부가 팔리는 기록을 종종 세우기도 했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시스템인 음성 정보 야구 중계를 실시간 제공하기도 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 스포츠>의 아성에 강력한 도전자가 등장했다. 이후 스포츠 신문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스포츠동아, 스포츠조선, 스포츠경향, 스포츠투데이가 잇달아 창간되었다.

당시 스포츠 신문은 직장인들의 출근 필수템이었다. 전철이나 출근길 가판대에서 조간 스포츠신문 한 부를 사서 점심 먹은 후, 퇴근 후 집에서,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정독’을 했다. 그들은 전날 벌어진 야구의 결과를 복기하고 그 뒷이야기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어봤다. 스포츠 채널이 없었던 시절 야구 중계는 한정적이었고 팬들은 스포츠 신문을 통해 중계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야구팬들의 필수 독본 ‘땅표’

야구는 대표적인 기록 경기다. 매일매일 요동치는 기록의 재미에 푹 빠지게 만든 이가 바로 이종남이다.

잠깐, 퀴즈를 내 본다. ‘一땅’ ‘二땅’ ‘투땅’은 무엇인가.

답은 각각 ‘1루수 앞 땅볼’ ‘2루수 앞 땅볼’ ‘투수 앞 땅볼’이다.

그렇다면 ‘一비’ ‘유비’는? 답은 ‘1루수 플라이 볼’ ‘유격수 플라이 볼’.

난이도를 높여 본다. ‘좌희’ ‘투번’은? ‘좌익수 앞 희생플라이’ ‘투수 앞 번트’다.

끝으로 ‘포파’ ‘유직’ ‘좌홈’은? 이쯤되면 킬러 문항급이다. 정답은 ‘포수 앞 파울플라이’ ‘유격수 직선 타구’ ‘좌익수 위치의 홈런’이다.

 

스포츠 신문의 ‘땅표’

 

예전에 스포츠 신문 야구면을 펼치면 이러한 용어로 가득 찬 난수표 같은 박스가 빼곡히 실렸다. 이른바 ‘땅표’라고 불리던 야구 기록표다. ‘땅표’로 불리게 된 이유는 야구에서 ‘一땅’ ‘二땅’ ‘투땅’ 등 경기 중 땅볼이 그만큼 흔해 기록표에 ‘땅’자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신문 제작에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태어난 산물인 이 ‘땅표’를 토대로 30년 전의 야구 경기도 거의 완벽하게 복기할 수 있다.

‘땅표’는 야구팬들의 필수 독본이었다. ‘땅표’만 들여다봐도 마치 경기를 직접 본 것 같았다. 스포츠 신문은 가끔 난수표 같은 이 땅표 보는 법까지 기사로 실었다. 이 땅표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사람이 <스포츠서울>의 이종남 기자다. 물론 일본 스포츠 신문을 참조해서 만든 것인데 미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했다. 당시에도 KBO 기록원이 각 경기장에서 기록을 했지만 땅표 만큼 일목요연하지 못했고 게다가 밋밋했다.

당시 다른 스포츠 일간지에서도 이 땅표를 흉내 낸 기록표를 실었지만 가독성과 경기 상황의 재현, 최근 5경기 타율 표시 등의 측면에서 <스포츠서울> 땅표만 한 퀄리티를 내지 못했다. 라이벌 <일간스포츠>가 비슷한 ‘땅표’를 모방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땅표 뿐만 아니라 그의 컬럼도 인기 있는 읽을거리였다. <스포츠서울>에 연재했던 ‘이종남의 야구 산책’은 야구로 다양한 주제의 글쓰기, 스포츠에 얽힌 역사 등 스포츠 기사의 전형을 보여주며 한국 스포츠 언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촌철살인 컬럼을 통해 야구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과 통찰력으로 한국야구가 가야 할 길과 비전을 제시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투성이의 야구 기사를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쓰고, 일본식 야구 용어도 하나둘 뜯어고치는 데도 한몫했다.

 

‘주력’ 덕분에 낚은 특종

이종남은 야구기자로서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지켜봤고 프로야구의 성장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선수가 녹색 다이아몬드 필드에서 뛰어다닐 때 그도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이전까지만 해도 야구기자라면 으레 야구장 한편에 마련된 기자실에 앉아 기록지나 훑어보며 기사를 쓰는 풍토였다. 그는 야구장에서뿐만 아니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장 밖에서 선수와 야구인들을 만나 동고동락했다. 항상 자료 가방을 끼고 야구장을 출입하면서 얻은 ‘채권장수’라는 별명도 그에겐 영예로운 호칭이었다.

그는 야구기자라면 두 가지의 ‘주력’이 필요하다고 늘 말하곤 했다. 주력(走力)과 주력(酒力)이다. 부지런히 발로 뛰고 사람을 만나 술자리에서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이 ‘주력’ 덕분에 남다른 특종을 낚을 수가 있었다. 89년 ‘럭키금성그룹(현 LG)의 MBC청룡구단 인수’와 93년 ‘KBO 오명(吳明) 총재 내정’ 등 다수의 특종 기사를 발굴했다. 특히 96년 현대 유니콘스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보도함으로써 고향 인천시민들에게 ‘듣던 중 반가운’ 특종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야구계의 ‘마피아 두목’으로 통했다. 162cm로 키는 작았지만 부드러움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췄고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마피아는 ‘마음과 피가 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의 줄임말로 의형제처럼 지낸 선후배 야구인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이종남은 2002년 8월, 파업으로 뒤숭숭했던 <스포츠서울>에서 사상 첫 임명동의제를 통해 편집국 사령탑을 맡았다. 능력과 신망을 겸비한 그를 후배들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부국장에 임용된 지 4개월 만이었다. 그는 편집국 분위기를 야구로 치자면 ‘신바람야구’ ‘자율야구’로 만들어 <스포츠서울>의 전성시대를 이끈다.

 

2005년 5월 7일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SK-LG전 시구자
2005년 5월 7일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SK-LG전 시구자 이종남

 

“인천 촌놈으로 태어난 것 감사”

그는 야구기자 이전에 야구선수였다. 축현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갔다. 인천야구가 그렇게 녹록지 않고 게다가 축현 야구부는 축구 정도는 아니어도 인천에서 나름 강팀이었다. 그 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아쉽게도 중고 시절 야구 글러브를 낄 기회는 없었던 그는 서울대를 입학한 후 야구부를 부활시켰다. 74년 서울대 재학 시절 졸업논문 준비는 제쳐버리고 야구부를 부활시키는데 한몫했다. 이른바 서울대 야구부 연패 신화의 첫 단추를 낀 장본인인 셈이다. 그는 좌익수로 뛰었다. 대한야구협회에 야구선수로 정식 등록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학창 시절 교과서보다 야구 룰 북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메이저리그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60〜70년대 미국 야구에 심취해 메이저리그 역사와 선수 이름과 각종 기록을 줄줄이 꿰차고 다녔다. 그는 기자로 뛰면서 선수들을 만나면 자신도 초등학교와 대학에서 선수로 뛴 것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들려줬다. 선수들은 물론 구단 프런트 관계자들과 격의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바쁜 야구기자 생활을 하면서 휴일도 잊고 틈만 나면 야구 서적을 펴내는 데 정열을 바쳤다. 이미 1970년대 말에는 혼자서 ‘야구산업사’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세우고 문답식 규칙 해설서 ‘스탠드의 명심판’을 펴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프로야구 이중노출’, ‘사람 좋으면 꼴지’, ‘야구가 있어 좋은 날’, ‘질레트에서 이영민까지’ 등 다양한 야구 관련 서적을 잇달아 펴내 신문 지면으로 전할 수 없었던 프로야구 뒷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했다. 특히 일제시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사라진 사료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닌 결과 한국야구 100년사를 집대성한 ‘한국 야구사’를 출판했다.

그는 초짜 기자 시절부터 야구 외국 서적을 들고 다니면서 번역에도 힘썼다. ‘챔피언 만들기’, ‘위대한 야구’, ‘심판도 할 말은 있다’, ‘미국야구 일본야구’, ‘추억의 다이아몬드’, ‘야구란 무엇인가’, ‘야구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등의 번역서를 냈다. 이 책들은 야구사의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야구기자들의 참고서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야구가 공식 보급된 해는 1905년이다. 도입 100주년을 맞아 그는 2005년 4월 25일 ‘종횡무진 인천야구’를 발간했다. 야구가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온 100여 년 전의 모습부터 당시 SK가 인천 연고팀으로 자리 잡고 성장하기까지의 ‘구도(球都)’ 인천의 야구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담아내고 있다. 인천야구를 중심으로 풀어나갔지만 세계야구사와 한국야구사의 줄기를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종횡무진 인천야구’ 발간 당시 이종남
‘종횡무진 인천야구’ 발간 당시 이종남

 

이종남은 2005년 4월 <스포츠서울> 이사로 퇴직했다. 그즈음 그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6개월여 동안의 투병 끝에 건강 회복에 진척이 있자 다시 한국야구발전연구원 초대 원장을 맡았다. ‘종횡무진 인천야구’는 병마와 싸우며 탈고를 마친 책이다. 폐암 말기인 3기 진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은 그는 자신의 유고집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존 덴버가 부른 ‘Thank God I'm a Country boy’의 바로 그 톤으로 ‘하나님 저를 인천 촌놈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라고 늘 마음속으로 노래하고 다녔다”.

그는 2006년 6월 5일 녹색 다이아몬드를 영원히 떠났다.

향년 53세.

야구로 치면 완투승을 할 수 있을 만큼 투구력이 좋은 투수가 5회 말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고 갑자기 마운드를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평생 야구기자였다. 흔히 취미가 밥벌이가 되는 순간 그 취미는 고통의 산물이 된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행복한 ‘덕업일치’의 삶을 살았다. 야구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신바람 나게 야구기자의 길을 걷다 야구판을 떠났다.

 

2006년 11월 29일 한국야구발전연구원 창립발기인대회 (왼쪽에서 세번째 이종남 초대원장)
2005년 11월 29일 한국야구발전연구원 창립발기인대회 (왼쪽에서 세번째 이종남 초대원장)

 

<스포츠 서울>의 특별한 보훈의 달

스포츠서울은 2015년에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지면을 빛낸 스타들과 특종 기사들을 들춰보는 한편 스포츠서울을 거쳐 간 선후배의 이름을 회상하는 기사도 실었다. 여기에 이종남이 실렸다.

스포츠서울 야구팀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고(故) 이종남 기자다. 앞서 열거한 많은 이들이 이종남 기자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종남의 아이들’이 스포츠서울 30년의 야구부(팀)을 이끌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종남 기자가 야구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땅표’를 비롯해 각종 기록에 관한 정립도 상당 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늦은 야근 뒤에도 한국야구위원회(KBO)로 달려가 이상일 전 사무총장 등과 함께 토론하고 작업하며 밤을 새우곤 했다. 야근과 정상 근무를 반복하던 데스크 시절에도 틈만 나면 야구장으로 달려가 현장에서 직접 관전하고 야구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며 야구와 함께 살았다. 그의 업적은 또 ‘사람 좋으면 꼴찌’, ‘야구가 있어 좋은 날’, ‘이중노출’, ‘프로야구 확 뒤집어보기’, ‘종횡무진 인천야구’, ‘한국야구사’ 등 그의 손에서 탄생한 야구서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번역서도 여러 책을 냈는데, 특히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는 야구 전문가와 팬들은 물론이고 야구기자에게도 필독서로 꼽힌다.

<스포츠서울> 야구팀 전·현직 기자들은 6월이면 이종남 기자를 언제나 떠올린다. 그들은 6월, 다른 의미에서 ‘보훈의 달’을 보낸다. 고(故) 이종남 기자를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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