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千)의 ‘인간’을 연기하는 연극배우 전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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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千)의 ‘인간’을 연기하는 연극배우 전무송
  • 김윤식
  • 승인 2024.04.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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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사람들]
(33) 전무송 연극배우 - 김윤식 / 시인 ·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전무송
전무송

 

- 기술보다 중요한 인간 내면의 연기

1920년대 인천에서 연극 운동을했던 정암(鄭岩)을 비롯해 서일성(徐一成) 등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를 배출했던 인천은 대를 이어 최불암(崔佛岩), 전무송(全茂松) 같은 오늘날 원로급 대 배우들을 세상에 내보낸다. 이 중에 전무송(1941~ )은 인천의 명문 인천중학교 7회 졸업생이다.

전무송은 말 그대로 천의 인간을 연기하는 배우다. 그만큼 연기의 폭, 여러 인간형 표출의 스펙트럼이 다채롭다는 말이다. 연기 인생 60년 이력 속에 그가 출연한 작품마다 서로 다른 인간의 내면 무늬, 다른 감성과 체취가 선명하게 묻어난다.

1986년 미국의 계간 연극 전문지인 『드라마 리뷰』 봄호에 실린, ‘연기에 있어서 기술적인 측면보다 인간적인 면을 중시한다’고 토로한 전무송의 연극관(演劇觀)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 잡지에 미국의 유명한 전위 연극배우 데이비드 워릴로를 비롯해 이태리, 영국, 일본 등지의 배우들과 나란히 ‘세계의 연기자란’에 실렸다.

그동안 그가 출연한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그 역할과 연기의 다양함을 살펴보자. 전 세계 연극 팬들을 공감시킨 아서 밀러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의 한국 무대에서 전무송은 소시민적 삶의 행복과 좌절의 주인공 월리 로먼 역을 해냄으로써 한국 배우로서 이 배역에 가장 적합한 배우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는가 하면, 사무엘 베케트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부조리한 인간 존재와 삶의 본질을 연기하는 주인공 블라디미르 역할을, 그리고 SBS TV극 <임꺽정>에서는 비열한 듯, 음흉한 듯 기묘한 웃음의 모사(謀士)꾼 인간 서림(徐林) 역할, 그리고 영화 <만다라>에서 불심(佛心) 속 갈등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 떠돌이 지산 스님 역할 등을 연기해 낸 것이다.

그뿐인가. 그는 그 외에도 해럴드 핀터의 ≪생일파티≫, 유치진의 ≪마의태자≫, A.후가드, W.앵초나, J.카니의 ≪시즈위벤지는 죽었다≫, 또 몰리에르의 ≪동 쥐앙≫ 등에서도 그는 여러 인간을 연기해 보인 것이다.

전무송은 스스로 자신을 특징 없는 배우라고 말한다. 배우는 마음 먹기에 따라 ‘몸을 바꿀 수 있는 유동체론’도 내세운다. 자신이 특징 없는 유동체여서 자유로이 변신해 ‘천의 인간형’을 연기한다는 논리다. 이것이 바로 ‘기술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인 면을 중시’하는 그의 연극관, 연기론의 본체인 듯하다.

 

1983년 연극 세일즈 맨의 죽음 공연 시 전무송
1983년 연극 <세일즈 맨의 죽음> 공연 시 전무송

 

- 가난과 방황의 탈출구, 동방극장

전무송이 대 배우로 오늘에 이르게 된 계기는, 저 옛날 신포동에 있던 동방극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느 한 신문에 한 고백 속에 지금은 사라진 동방극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어부였던 아버지 슬하의 7남매 중 장남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처럼 배를 타고 바다를 젓는 뱃사람이 되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내 눈길은 동방극장 전면의 영화 간판으로 쏠려 버린 것이다.

본래 그는 중구 내동 출생으로 축현초등학교를 나왔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야구를 했던 전무송은 인천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야구부 창단과 함께 2루수를 맡아 선수로 뛰었다. 활발한 성격에 머리도 명민했던 그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집안에 견디기 어려운 가난이 닥친 것이다.

가난은 사춘기 심리를 더욱 헝클어뜨려 그를 방황으로 몰았다. 그 방황의 탈출구가 바로 동방극장이었다. 멋진, 그리고 마음 설레게 하는 유명 배우들의 모습이 그려진 동방극장의 영화 간판이 그를 잡아끌었던 것이다. 동방극장의 뒷문이 그를 마음의 안식처로 인도하는 입구가 되어버렸다. 여러 편의 영화를 숨어서 보면서, 집안의 가난도, 학교 공부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중학교 3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가난과 극장 뒷문을 드나들던 사춘기의 방황은 결국 그를 다른 고등학교로 가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물론 졸업과 동시에 밥을 벌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더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영화배우에 대한 몸속의 뜨거운 열망을 누를 수는 없었다. 학교 밴드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이라도 불어야 했다. 그렇게 또 3년을 보내고 1961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순간에도 그의 집념은 오로지 영화배우가 되는 것뿐이었다. 영화배우로서 출세를 하고, 돈도 벌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대학 대신에 충무로를 드나들었다. 영화인들이 자주 찾는다는 태양다방에 가서 종일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주위에서는 그저 선하고 평범한 서민의 얼굴이라고 했지만, 그 무렵으로는 비교적 작지 않은 174cm의 키로써, 혹 어느 영화감독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전무송에게는, 말린 과일 트럭을 끌던 배달부 운전기사에서 일약 할리우드 유명 영화배우로 출세했던 록 허드슨 같은 행운은 오지 않았다. 헛된 집념, 헛된 희망. 말 그대로 백일몽이었다.

 

1997년 2월 sbs연속극 임꺽정에서 서림역을 맡은 전무송
1997년 2월 sbs연속극 임꺽정에서 서림역을 맡은 전무송

 

- 서울 드라마센터 연극 아카데미 1기생이 되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씁쓸한 백일몽의 허송 1년여를 접으면서 전무송의 집념은 연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62년, 서울 드라마센터 연극 아카데미 1기생으로 들어갔다.

남산 중턱에 있는 이 연극 아카데미는 극작가요, 연출가로서 우리나라 연극예술계의 거목이었던 동랑(東廊) 유치진(柳致眞) 선생이 1962년 4월에 세운 연극 극장 드라마센터의 부설 연극 전문 교육 시설이었다. 문자 그대로 전문 직업 배우와 연극 인재를 양성하는 순수 연극 아카데미였다. 오늘날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이 아카데미가 발족한 것은 1962년 10월이었다.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연극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해서 연기자, 곧 배우의 길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배우의 길이 생각처럼 평탄한 것도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연극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까지도 전무송은 연극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조차 분명히 몰랐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순진하게 사람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스타가 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시련과 눈물이 찾아왔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꿈꾸던 화려함 대신에 시련이 기다렸다. 유치진, 이해랑(李海浪), 이원경(李源庚), 오사량(吳史良) 같은 스승들은 혹독했다. 1학년 때 유치진 작 ≪소≫에서 겨우 한 마디 대사를 맡았다. 스승 오사량은 그나마 엉터리 연기라면서 따귀를 올려붙였다.

눈물을 쏟고는 드라마센터 분장실에서 기식하며 연기 수업에 몰두했다.

 

오태석 작 연극 태 에서 신숙주 역의 전무송
오태석 작 연극 <태> 에서 신숙주 역의 전무송

 

- 집념과 끈기, 피나는 노력으로 시련을 딛고

1997년 12월 18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전무송의 회고 기사 내용 중 일부이다. 여기에 소개된 작품 ≪소≫는 1학년 말 워크숍 공연작으로, 1년간 공부하고 연습한 것을 총결산하는 공연이었다. 교수진들도 이 1기생들에게 더없이 크게 비중을 두었던 터여서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엄한 지적과 질책이 내려졌다.

“너 때문에 연극 다 망쳤다”

이런 호된 꾸지람을 받을 때, 초짜 배우 지망생 전무송이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념과 끈기와 피나는 노력 끝에 전무송은 1964년, 연극 아카데미 졸업 작품 ≪춘향전≫에서 드디어 주인공 인 도령 역을 맡아 유치진으로부터 “가능성이 보인다”라는 격려를 듣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드라마센터 창단 기념 작품 ≪마의태자≫에서도 역시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두 무대를 계기로 전무송은 드라마센터가 배출한 첫 연극배우로서 이름을 널리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련이 아니라 연기에 대한 또 한 차례의 뼈아픈 회초리를 맞게 되는 것이다. 군대에서 제대해 돌아온 1970년, ≪생일파티≫ 공연 당시의 일이었다.

이 연극에서 전무송은 드라마센터 연극 아카데미의 같은 1기생 배우 신구(申久)와 주인공 스탠리 역에 더블 캐스팅되었다. 신구는 연극 아카데미의 입학 동기생이었지만,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인 선배였다. 그러나 스탠리 역 하나를 두 사람이 동시에 맡았으니, 선의의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연습했다.

그러나 막상 무대의 막이 올라가는 날, 유덕형(柳德馨) 연출자가 “넌 아직 멀었다” 이 한마디로 그를 출연에서 제외해 버린 것이다. 청천벽력! 술에 취해 대들어 보기도 했지만, 그때 그가 느꼈던 수치와 좌절감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에게 ‘아직 먼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아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활발하면서도 모나지 않은 부드러운 성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집념과 끈기가 있었다. 그의 집념과 끈기, 오기는 실망과 좌절의 회초리를 맞을수록 더욱 강해지고 질겨졌다.

오냐. 연기로 보여주자.

결국, 그는 그 후 ≪생일파티≫가 재공연될 때, 여봐란듯이 단독으로 주인공 스탠리 역을 맡아 혼신을 다해 열연함으로써 크게 호평을 받은 것이다.

연기자로서 그동안 크게 보람을 느꼈던 것은 무엇보다 1976년 동랑 레퍼토리극단이 무대에 올린 연극 《하멸태자(太子)》 공연이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원작 「햄릿」을 연출가 안민수(安民洙)가 번안하여 초연한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았지만, 미국 공연에서는 생각 외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미국 댈러스로부터 미니애폴리스를 거쳐 뉴욕, 그리고 네덜란드 등 세계 16개국을 순회, 공연하면서 대단한 갈채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의 첫 공연은 놀라웠다.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을 할 때, 미국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환호와 함께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도무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이다.

 

77년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 하멸태자역의 전무송
77년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 하멸태자역의 전무송

 

“그때 문득 눈앞에 고생 속에 연극을 하다가 무대를 떠나버린 선배, 동료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버리더군요. 그러면서 아, 나는 끝까지 연극을 해야겠구나.”

전무송은 깊은 감격과 감회 속에 자기도 모르게 두 눈에 물기가 어리면서 이런 결연한 다짐이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진즉 외국어며, 연극이론이며, 깊이 있는 연기자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한 공부를 왜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했던가, 하는 뼈아픈 후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어찌하랴. 그런 공부는 나보다 똑똑하고 나은 사람들, 후배들에게 맡기자. 나는 주어진 내 얼굴,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자. ‘천의 인간’을 더 성실히, 더 열심히 연기하는데, 오로지 일생을 바치자. 결연히 이런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 연극배우 17년만에 출연한 영화 <만다라>

이렇게 오로지 외길 연극의 길만 걷던 그가 영화에 데뷔한 것은 연극에 몸담은 지 17년이 되는 1981년이었다. 최초로 영화 <만다라>에 출연했던 것이다. 중학 시절 동방극장 뒷문 출입 이후 30여 년 만의 일이다. 화제가 된 것은 전무송 하면 연극계에서도 유명했던 ‘영화 불(不)출연’의 옹고집이 <만다라>로 인해 깨어진 사실이었다. 그가 고집을 꺾은 것은 <만다라> 작품이 워낙 좋았던 데다가, 평소 가까웠던 임권택(林權澤) 감독의 집요한 권유를 저버릴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고집을 꺾고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전무송의 인생에는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그해 10월에 열린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과 남자 신인상, 두 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것이다. 그 이듬해에도 <삐에로와 국화> <화녀>에 출연해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영화배우로서도 크게 명성을 떨친 것이었다.

 

1981년 영화 만다라 출연시 전무송
1981년 영화 만다라 출연시 전무송
81년 영화 만다라에서 전무송(앞)과 안성기(뒤)
영화 만다라에서 전무송(앞)과 안성기(뒤)

 

평생 연기자로서 전무송은 연극, 영화, TV 드라마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또 뛰어난 연기로써 앞서 언급한 영화상 외에도 두 번에 걸친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 영화평론가협회 남우주연상, 대한민국 연극상 남자연기상,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제8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제65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연기 틈틈이 신문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 대학 강단에 서서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했고,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또 사회봉사를 위해 불우 이웃 돕기 바자회 같은 데에도 두루 참가했다.

선한 외모와 온유하고, 성실하며 근검한 성품으로 무대 밖에서는 없는 듯이 살아온 존경 받는 연기자 전무송.

그가 세상에 이룬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세상에 드물게 연기자 가정을 이룬 것이다. 딸 현아(炫俄)는 영화배우로, 사위 김진만(金晋滿)은 연출가로서 교수로서 활동하며, 아들 진우(鎭旴) 역시 배우로서 아버지의 대를 잇고 있다.

천의 인간을 연기했지만, 선한 얼굴 때문에 속 시원하게 해보지 못한 역할이 있다며, 이제 무대를 내려가기 전에 아주 지독한 악역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83세의 대배우 전무송. 동방극장 뒷문을 나와 충무로를 걷고, 남산에 올라, 시련과 좌절을 넘어서서 평생 연기자의 삶을 산 인천중학교 출신 전무송은 오늘 이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원로 연극배우로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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