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된 인천세관, 박물관 되는 인천우편국 - 신포사거리 축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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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된 인천세관, 박물관 되는 인천우편국 - 신포사거리 축항 풍경
  • 김광성
  • 승인 2024.04.19 0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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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6) 인천세관과 인천우편국이 자리한 축항 풍경
인천세관과 인천우편국이 자리한 축항 풍경 (110x55cm)
인천세관과 인천우편국이 자리한 축항 풍경 (110x55cm)

 

신포 사거리 고색창연한 르네상스 양식의 하얀 건축물이 있다.

거친 기단의 화강암, 이층 벽돌조로 그 위세를 과시했던 신식 청사.

당시 행정관서 중 가장 육중하고 웅대한 건물,

일본의 독주 시대인 1923년 완공한 인천우체국이다.

6.25동란의 포화속에서도 살아 남아 건재했던 인천우체국.

그 존재의 이면에는 조선 우정의 고난의 역사가 있었다.

 

일찍이 고종의 하명이 있었다.

‘근대식 우편제도를 도입하라!’

우편제도의 시찰을 위해 미국과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단 중

고종의 특사 자격이었던 홍영식.

그는 개화기의 선각자 답게 우정총국(서울 종로구)을 창설하고

인천, 부산 등지에 우정국 분국을 설치하는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변 모의의 대가는 참수와 가문의 멸문지화였다.

우편의 선구자, 비운의 지식인,

죽음을 예감한 그의 시 속에서 그의 탄식이 슬프게 전해진다.

 

인천중동우체국,

2019년, 안전 문제로 신흥동으로 이전을 하였고

지금은 비어 있다.

인천시는 이곳을 우정통신박물관으로 활용한다고 어제(18일) 밝혔다.

 

 

2 인천세관 1930년대(100x50)
인천세관 1930년대(100x50)

 

인천우편국을 지나 축항으로 가는 대로의 좌측에 있는 건물이 인천세관이다.

1926년 항동 1가에 있던 건물을 축항 쪽으로 이전하였다.

세관의 기능이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 사무 등을 맡아 보는

행정기관이라는 건 익히 알 터,

당시 조선은 무지하고 무능해서 수입 창구였던 해관을 활용하지 못했다.

 

개항 7년 전인 1876년에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면서

일본의 간교에 속아 7년 동안 외화벌이를 못했던 것이다.

지혜나 꾀가 없으면 당하기 마련,

게다가 창설 당시 부터 청국이 운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세무사 임명권과 모든 관세업무를 외국인들 끼리 좌지우지하였다.

주인은 뒷전이었고 객이 좌판을 벌려 주머니를 챙기는 꼴이었다.

 

해관장들은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이었는데

특히 콧대가 세고 서슬이 시퍼랬던 사람은 영국인이었다.

일본인이 게다짝(일본의 나막신)을 신고 소리를 내며 대청 복도를 들어서다가

‘갓뗌!’ 하고 영국 해관장이 고함을 치면 당장 게다짝을 벗고는

‘하이! 하이! 가시고 마리마시다!’(예, 예, 알았습니다!)를 연발하며

허리가 90도가 되도록 구부리는 꼴은 우스꽝스러운 노릇이었다고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은 전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패자(覇者)로 등장 함으로써 조선세관에 대한

모든 권한을 독점하게 되었다.

232평의 3층 목조건축물,

남아 있었다면 유형문화재가 되고도 남았을 인천세관,

인천상륙작전 때 소실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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